베토벤이 작곡한 다섯 개의 첼로 소나타는 피아노와 첼로의 매개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더군다나 작곡가가 이 작품을 작곡하고자 마음먹었을 당시, 이 장르에 대한 모델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울 따름이다. 첼로는 16세기부터 콘티누오와의 듀오 악기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교적 첼로를 많이 사용한 보케리니나 비발디의 경우에도 첼로의 역할과 형식은 바이올린 소나타와 다를 것이 없었고, 여전히 베이스 아리아와 같은 오블리가토를 위한 악기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경우도 첼로와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을 작곡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
첼로를 독주악기의 반열에 올려놓은 베토벤의 천재성
이 ‘하찮은 저음악기’를 결정적으로 독주악기의 반열로 올려놓은 장본인이 바로 베토벤이다. 1796년에 탄생한 그의 첫 두 개의 소나타 Op.5는 유능한 첼리스트이기도 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36-1813)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본래 베토벤이 주문받은 것은 현악4중주였다. 그러나 베토벤이 왕에게 전달한 선물은 바로 첼로 소나타였다. 베토벤은 그에게 영감을 줄 정도의 탁월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던 왕 전속 첼리스트인 장 루이 뒤포르와 함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앞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첼로 애호가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첼로 소나타 1,2번을 헌정했다.
베토벤 자신의 천재성만이 이 첼로 소나타에 현대적 의미를 불어넣은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비르투오소인 뒤포르가 정착시킨 운지법과 활 기술의 원칙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첼로에 고정과 동시에 공명을 증대시키는 스파이크가 도입되었고, 멜로디 악기로서 첼로가 갖는 남성적 바리톤 음색이 완전하게 완성되었다. 첼로는 당시 유행했던 현악 4중주와 3중주에서 저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에서도 그 역할이 점점 커졌다. 그래서 당시 아마추어 음악가들 사이에서 첼로 연주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그 가운데 첼로 애호가였던 프로이센 국왕에게 고전주의-낭만주의 음악의 가교로서 가히 혁명적 처녀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Op.5가 헌정된 것이다.
두 개의 소나타 Op.5는 기본적으로 2악장으로 구성된 작품으로서,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도입부와 알레그로, 그리고 론도로 이어진다. 두 작품 모두 첫 악장의 소나타 형식은 비교적 쉬운 방식으로 2주제가 등장하고 길고 두드러지는 피아노에 의해 재현부가 연결된다. 이들 소나타는 텍스추어(texture)에 대한 일종의 베토벤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험적인 1,2번 소나타와 원숙한 3번 소나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1,2,3번은 그의 삶에서 각각 특징적인 시기에 작곡되었다. 1796년에 작곡한 Op.5는 초기 피아노 소나타들과 첫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될 무렵에 작곡되었다. 베토벤이 한 해 전에 이미 첫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 베토벤은 18세기 전반부 바로크 작품들에서 느린 도입부에서 빠른 악장으로 넘어가는 형식을 찾아냈는데, 특히 2번 G단조 소나타의 오프닝에서 부점 4분음표 리듬은 프랑스풍의 서곡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나타’나 ‘1악장’ 형식의 의미에 있어서 느림-빠름의 바로크풍의 패턴을 사용하긴 했지만 프랑스 스타일을 완벽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첫 두 개의 첼로 소나타들의 긴 첫 악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베토벤은 첼로를 독주악기로 활용해 첼로 소나타의 새 형식을 정립했다. 사진은 20세기 위대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 장면.
베토벤은 이런 방식으로 바로크 시대의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는 느린 악구들이 빠른 악구를 유도하기 위한 도입부 성격을 가지는 구조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첼로 소나타에서 이 형식을 반드시 사용했다. 1번과 2번 소나타의 1악장과 3번 소나타의 3악장이 특히 그렇다. 멜로디와 화성적 베이스를 연주할 수 있는 첼로는, 피아노와는 다른 표현 방식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 영역이 피아노와 유사하다. 그러나 각각이 독립적인 텍스추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특징이다. 더 나아가 마지막 5번 소나타에서는 이러한 형식을 확장해 낮은 음역의 느린 2악장과 푸가로 시작하는 빠른 3악장 모습으로 응용, 발전시켰다.
한편 교향곡 5번과 교향곡 6번이 작곡될 무렵에 탄생한 3번 소나타 A장조는 위대한 원숙함을 선보인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9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던 중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눈물과 슬픔의 중간 단계라고 말할 수 있는 이 3번 소나타는 1807년부터 1808년 사이에 작곡되었는데 그 특유의 칸타빌레적이고도 우울한 성격으로 인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도 직접적으로 대비된다. 베토벤은 보다 가벼운 음색과 질감을 탐구하고자 했고, 심지어 작품의 첫 오프닝에서 첼로가 혼자 진행하게 남겨두었다.
이러한 독창적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확장된 느린 악구 형식을 바이올린 소나타와 첼로를 위한 변주곡에 적용했으며, 기존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사용했던 형식을 첼로를 위한 소나타와 변주곡에도 훌륭하게 적용해냈다. 동시에 첼로 소나타 3번에서는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확장된 형식의 표본까지도 새롭게 창조해냈다. 이는 후대 작곡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베토벤의 노력으로 후대 사람들은 첼로 소나타 3번이야말로 이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임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 작곡한 첼로 소나타 4번과 첼로 소나타 5번에서 베토벤은 환상곡과 푸가를 소나타 형식과 결합하려는 새로운 도전을 다시금 선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