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를 지내셨던 권호덕박사님께서 서사라목사님의 간증수기 전권을 읽으시고 “서사라목사 천년왕국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2019년 11월 12일 하늘빛출판사에서 80페이지 분량의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권호덕교수님의 깊이있는 성찰과 평가와 수고에 감사드리며 아울러 마지막 시대 천년왕국설에 대한 많은 성경의 지식을 얻으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면서 아래에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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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라목사 천년왕국설에 대한 신학적 고찰-권호덕교수
내용 정리와 비판적 평가
A. 내용정리
1. 서사라 목사는 세대주의자인가? 세대주의자들이 천년왕국이전에 7년 환난기가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리고 천년왕국이 이루어 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 곧 7년 환난기, 천년왕국, 곡 마곡 전쟁, 대심판, 영원천국 순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게 비슷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런 과정의 내용은 다르다. 그리고 서목사는 구원의 역사 전체를 7단계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서목사의 성경 해석 내용이 특별하기 때문에 기존 천년왕국설자들의 질문이 많이 있을 것이다.
2. 서사라 목사는 ‘현재 하늘 낙원’의 구조와 ‘천년왕국’의 구조 그리고 ‘영원천국’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동일하다고 증거한다. 1) 성(城)안, 2) 성(城)밖, 3) 지옥. 즉 천국은 영광스러운 곳인 성(城)안과 어둡고 고통의 장소인 성(城)밖 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그 동안 그 누구도 지적하지 못한 부분이다. 서목사는 특별한 체험으로 천국과 지옥을 둘러보고 증거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말하며 이것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를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라는 것 같은 구절에서 암시되고 있다고 본다. 천국의 성 밖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말한다.
필자의 눈에는 사실 생명과일이 있는 곳인 에덴동산 그리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와서 사는 곳 이 둘은 성(城)안과 성(城)밖에 대한 그림을 제공해 준다. 그런데 아직 기독교 신학 역사 속에서 이런 내용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질문이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바라기는 비판가들은 이런 발언에 대해 자기 잣대로 일방적으로 인 비판보다는 이런 성경 구절들에 대한 주석적인 논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서목사의 발언을 재검토 하며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3. 서사라 목사는 첫째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공중휴거 직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첫째 부활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어떤 환난도 거치지 않고 천년왕국을 거쳐 마지막 영원천국에 들어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전천기설에게도 낯설지 않으나 첫 부활을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중생(重生)으로 보는 무천년기설이나 후천년기설의 비판이 있을 것으로 예상 된다. 이들은 그 동안 전천년기설자들의 주장을 이런 식으로 비판해 왔다. 그런데 과연 첫째 부활을 중생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할 것 같다.
4. 서사라 목사에 의하면, 적그리스도 원형이 등장하는 것은 7년간 평화조약을 맺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 7년 평화조약 발언은 다니엘서 9:27에 근거한다. 즉 적그리스도는 먼저 평화 공세를 통해 민심을 얻고 그 다음 대권을 장악하고 독재자의 근성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역사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적그리스도의 예표인물들이 항상 처음에는 평화 공세(攻勢)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전체주의 독재적 만행을 저지른다.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의 원형도 두 단계 곧 먼저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그 다음은 잔혹한 독재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7년이라는 기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싫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로 이해하는 후천년기설과 무천년기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먼저 웃음 그 다음 마각(馬脚)’ 두 단계 성격에 대해 왜 지적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배도의 시기를 지나면 적그리스도가 갑자기 등장한다고 본다. 우려되는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자기 신학의 이념에 깊이 빠진 나머지 성경본문의 의도를 놓치게 될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5. 서목사의 다음과 같은 증거는 린드세이의 주장과 유사하다. 첫째, 이방인들 중에 인침을 받은 자들 중에 공중휴거 당하지 않은 자들이 큰 환난을 거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은 이 기간이 끝나면 부활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간다. 둘째, 144,000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 삼년반 동안 피신처에 있다가 휴거된다. 다만 린드세이는 이들이 7년간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서목사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린드세이가 모르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함을 볼 수 있다.
후천년기설이나 무천년기설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는 이들은 문자적인 7년의 환난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스스로 주장한 바가 과연 옳은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나의 신학적 해석은 시간이 많이 지남에 따라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의 해석들도 시간이 많이 지나간 다음 더러는 무리한 해석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이전의 많은 신학들은 21세기라는 우주공학시대라는 새로운 신학 정황 속에서 새로운 성경주석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6. 두 증인이 7년 환난기 초기에 등장하여 전 삼년반 동안 일하고 후삼년 반에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고 휴거한다. 서목사는 두 증인을 모세와 엘리야로 보는 린드세이와는 달리 이 증인들을 어떤 기름부음을 받은 두 사람으로 본다. 기존 교회가 두 증인을 교회라고 보는데 이에 대해 서목사는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자연스럽게 인용하며 두 사람임을 주장하는데 그의 설명은 문법적으로 보아 매우 이치에 맞아 보인다. 이런 사실은 기존 천년왕국설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된다.
7. 서목사에 의하면, 아마겟돈 전쟁은 백마 타고 오신 주님과 적그리스도 무리들 사이의 싸움이며 이때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고 마귀는 무저갱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여기서도 서목사는 린드세이보다는 이 전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8. 천년왕국에 대한 서목사의 설명은 린드세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납득이 가는 설명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70이레 마지막이(단 9:27-27) 천년왕국 시작이라든가(376f.), 다니엘의 거룩한 성은 천년왕국이라든가(377), 에스겔서의 마른 뼈 부활에 이어 천년왕국이 나온다든가(366f.), 천년왕국의 장소는 지구상의 이스라엘의 산이라든가(369) (슥 14:1-11), 천년왕국은 에덴동산과 같다든가(겔 36:34-35)(371), 천년왕국에는 부활된 자들만 들어가므로 애를 낳지 않는다든가(391) 등이다. 물론 이런 내용에 대해 후천년기설이나 무천년기설은 성경적인 증거를 요구할 것이다. 사실 서목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그녀의 책에서 성경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본다.
9. 서사라 목사는 천국을 두 단계 곧 성(城)안과 성(城)밖으로 나누기 때문에 기존 세대주의자들이 성 안에 영화로운 몸을 가진 자들과 죽을 수 있는 몸을 지닌 자들이 함께 거한다는 모순을 극복하게 한다. 서목사는 천년왕국 성(城)바깥에 죽을 수 있는 몸으로 살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고(420) 천년왕국 바깥에서도 천년동안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난다고 한다(421). 나아가 서목사는 천년왕국 바깥에서 아이 낳고 죽고 하면서 천년왕국이 끝날 즈음에 하나는 낙원으로 다른 하나는 음부로 들어간다고 말한다(445). 이 부분 역시 기존 신학에서는 매우 낯설어 정밀한 성경해석적인 논의가 요구될 것이다.
10. 서목사의 경우 혼인잔치가 일어나는 곳은 천년왕국이며(계 19:7-14)(470), 슥 14:1-15은 천년왕국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496ff.) 나아가 이 잔치가 영원천국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에 비해 린드세이는 공중 혼인잔치만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에게 생기는 질문이 있다. 우리가 알기로는 주께서 재림하시면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셨던 안식상태가 이루어진다. 안식 상태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인간을 중심으로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고 봉사하는 상태인데, 즉 피곤한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상태인데, 어떻게 혼인잔치가 계속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서목사는 안식상태를 혼인잔치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에게 생기는 질문이 있다. 우리가 알기로는 주께서 재림하시면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셨던 안식상태가 이루어진다. 안식 상태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인간을 중심으로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고 봉사하는 상태인데, 즉 피곤한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상태인데, 어떻게 혼인잔치가 계속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서목사는 안식상태를 혼인잔치로 보는 것 같다.
11. 서목사에 의하면, 아마겟돈 전쟁 때 예루살렘을 치러온 자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인데 천년왕국 성(城)밖에서 100년 정도 살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하면서 살아 있으면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들이 있다(계 20:7-10) (479). 이들이 성도들의 진(陳)을 형성하는데, 곡과 마곡은 이 진(陳)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城)인 예루살렘을 둘러싼다고 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성밖에서 살면서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다는 이 내용도 세대주의가 묘사하는 것보다 더 구체성을 띤다. 이 내용도 면밀한 성경해석적 논의가 요구 될 것이다.
12. 서목사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있을 곡과 마곡의 전쟁을 설명하면서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의 출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천년왕국 기간이 마쳐지면 사탄이 옥에서 놓이고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싸움 붙인다(368f., 446, 479). 서목사는 스가랴 14장을 참조하여 곡과 마곡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로 천년왕국 성(城)밖에 거하는 자들인데,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성도의 진(陣)을 이루고 이 진(陳)과 예루살렘성에 대항하여 곡과 마곡이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733). 그리고 주님께서 곡과 마곡을 불로 소멸하신다(365 368, 479, 657) (계 20:7-10, 겔 38:18-22). 곡과 마곡 전쟁 이후의 일은 벧후 3:3-14 그리고 계 20:7-12) 내용과 일치한다고 하며 이른바 7년 전쟁이라고(377) 한다.
13. 서목사에 의하면, 하늘이 불에 타고 큰 소리로 떠나가고 모든 체질이 불에 녹고 현재 하늘과 땅이 없어진다(446, 657). 이때 짐승, 거짓 선지자, 마귀와 함께 유황불에 던져져 영원토록 괴로움 당하고 있고(계 20:7-12) (379), 천년왕국에 들어갔던 자들은 하늘 낙원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진다(446, 506)라고 한다. 사실 이 점은 서목사의 독특한 주장으로 다른 모든 천년기설자들이 답을 주지 못한 내용이다. 이 문제를 두고 성경해석적인 논의가 있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무천년기설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지각(地殼)에 대 변동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기간에 성도들은 어디에 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14. 서목사에 의하면,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한편으로는 음부에 있던 모든 자들, 낙원 성밖에 있으면서 이기지 못한 삶을 살은 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천년왕국때 성(城)밖에 살면서 예수를 영접하여 이기는 삶을 살은 자들이다(453). 역사적 전천년기설이나 세대주의 전천년기설은 둘째 부활에는 악인들만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서목사는 천년왕국 성(城)밖에서 살면서 예수를 믿은 자들도 이때 부활한다고 하는데 이 문제 역시 치열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5. 서목사는 “백보좌 심판”과 “그리스도의 심판” 두 가지를 말하며 각각의 특징을 지적한다. 백보좌 심판은 불못에 들어가는 자들을 심판하는 곳인 반면에, “그리스도 심판대”는 성(城)안으로 들어갈지 성(城)밖으로 들어갈지를 결정하는 심판이다. 이런 점은 다른 천년기설들은 언급하지 않는 내용으로 성경해석적인 논의가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16. 서사라 목사가 성도들의 이마에 십자가 인치는 사역과 더불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녀가 이 사역 현장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이 에스겔서 9:3-4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서목사가 영(靈)의 눈으로 본 것 곧 천사들이 나타나 인치는 것을 본 내용은 성경이 에스겔서 이 부분이 묘사하는 내용과 똑 같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증거는 무게 있게 논의해야 된다고 여겨진다. 서목사는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글 위에 나오는 부록논문을 읽어 보기를 바란다.
B. 비판적 평가
1) 서사라 목사는 그의 모든 발언을 성경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서목사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해석을 시도한다. 서목
사는 그의 저서에서, 해석하기 힘들거나 애매한 성경구절의 내용을 확인하는 측면에서, 천국에서 주님이나 믿음의 선진들과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런 점에서 천국으로 다녀온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다녀와서 기행문식으로 보고하는 것 같다.
2) 기존 교회 풍토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는 경우 기존의 주장과 다를 경우 매우 부정적으로 단죄하려는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왜곡된 보수주의 신학자들도 이런 오류를 범해왔다. 이들은 사실상 진리를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수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데서는 신학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신학 발전을 위해 보다 다른 접근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점검해야 될 것은, 그것이 성경에 부합한 것인가,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한 어떤 무엇을 도모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생리는 교회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정황을 보면서 끊임없는 신학적인 반성을 하며 성도들을 위한 바른 로드맵을 제공하는데 있다. 선입관에 얽매어 일방적인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자세는 결국 이념적 비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목사의 특이한 주장을 평가할 때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신학 발전을 위해 보다 다른 접근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점검해야 될 것은, 그것이 성경에 부합한 것인가,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한 어떤 무엇을 도모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생리는 교회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정황을 보면서 끊임없는 신학적인 반성을 하며 성도들을 위한 바른 로드맵을 제공하는데 있다. 선입관에 얽매어 일방적인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자세는 결국 이념적 비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목사의 특이한 주장을 평가할 때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3) 천국과 지옥 그리고 천년왕국에 대한 서목사의 주장은 확실히 기존 교회에서는 충격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발전의 한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매우 놀라운 것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성경의 중요한 진리가 특별한 사건 때문에 부각되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중세는 공로신앙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 팽배하여 성경 속에 하나님의 의 또는 이신칭의 진리를 발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루터가 자기 구원 문제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이 위대한 사상이 규명된 것이다. 기존의 성경해석이나 기존 신학으로만 만족한다면 신학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서목사의 증언들은 이런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4) 어떤 신학이 자기 패러다임에 갇혀서 그 틀로만 해석하려고 할 때는 성경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이념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전천년기설, 역사적 전천년기설, 후천년기설, 그리고 무천년기설 이 4가지 중에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것으로 말할 수 없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이념의 틀로 신학을 형성하고 그것을 고집하고 나아가 다른 주장을 비판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들 모두 자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세대주의가 7세대를 나누고 각 세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이 다르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언약신학과는 크게 충돌된다. 후천년기설은 19세기 이성낙관주의와 영합하여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이미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역사적 전천년기설과 무천년기설은 문자적 천년왕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이 둘은 첫째 부활을 두고 일치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 둘 다 이 세상이 불타고 체질이 녹을 때 구원의 백성들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어디 갈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서 목사는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하여 명백하게 대답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자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세대주의가 7세대를 나누고 각 세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이 다르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언약신학과는 크게 충돌된다. 후천년기설은 19세기 이성낙관주의와 영합하여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이미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역사적 전천년기설과 무천년기설은 문자적 천년왕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이 둘은 첫째 부활을 두고 일치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 둘 다 이 세상이 불타고 체질이 녹을 때 구원의 백성들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어디 갈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서 목사는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하여 명백하게 대답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5) 기존 개신교 신학은 성경이라는 문헌을 그 주된 자료로 취급한다. 개혁신학은 여기에 어떤 영적인 체험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허용될까? 아마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개혁신학은 우선 성경을 문법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성경을 깊이 해석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고 충격을 준다면, 이런 체험은 교회와 신학 발전에 큰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즉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성경진리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신학을 비판하고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경전체가 요구하는 내용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자기 왕국으로 창조하시고 건설하셨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이 자리를 차지함을 보여준다. 문제는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빗나간 것이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역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서목사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모든 사역이 죄인들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일에 올인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천국과 지옥에 가서 놀라운 것을 보고 듣고 와서 전하는 내용 그 자체를 전하는 목적이 불신자들을 회개케 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한다. 서목사의 저서를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은 그녀의 강조점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간파할 것이다. 서목사 저서에는 자기의 영달을 위하거나 자기의 어떤 이익을 위하는 그런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녀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있다.
필자가 보기엔 서목사는 성령으로 일하고 있다. 만일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을 악의적으로 그 모든 사역을 부인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비판을 한다면 성령 훼방죄를 범할 수 있음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특별한 발언은 신중하게 평가해야 되고, 평가할 경우에는 기존 성경해석에 대한 성찰 있는 반성(反省) 내지 반추(反芻)가 있어야 될 줄로 여겨진다. 사실 하나의 신학이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이전의 주석(註釋)이 나중에는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천년기설, 후천년기설, 무천년기설 등등.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고 나아가 수정이 가해지는 것이다. 서목사의 증언과 발언에 대해 진지하고 건설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 기독교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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