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
교회협동신문
승인 2021.01.08 20:12
www.pf-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57
조상열 교수
조상열교수
약력:
-평택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Golden-Cornwell Theological Seminary
(M.Div., Th.M)
-영국 University of Edinburgh (Ph.D.)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구약학 부교수 역임
-건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임강사 역임
-가인의 표 (The Mark of Cain) 저술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 저술
-Lesser Dieties in the Ugaritic Texts and
the Hebrew Bible 저술
======================================================================
아담과 하와를 지옥에서 보았다는 개인 체험 간증의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기대한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은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의 답은 먼저 유대교 전승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제2 성전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이나 1세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아담의 원죄론을 다루고 있으며 아담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4 Ezra 7:118; 2 Esd 3:21-22; Sir 25:24-26; Wis 2:24; 4:30; 7:118; 4 Ezra 3:20-22; and 2 Bar 48:42-43; 54:19). 유대교 전승을 계승하여 발전한 신약 역시 둘째 아담(그리스도)에 반하여 첫째 아담을 실패자로 규정하고 있다(고전 15:21-22). 유대교 전승과 신약성경이 아담만 실패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원죄론에서 하와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나 배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담은 첫 인류이자 첫 부부의 대표자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원죄 이후에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라는 상상도 유대교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아담이 병들어 치료 목적으로 기름을 가져오기 위해 셋과 하와가 다시 낙원으로 진입한다는 이야기(Life of Adam and Eve)와 그들이 낙원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후회하였다는 해설이 외경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화적 기술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신약 전승도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의 첫 인물로 아벨을 제시하고 있다(히 11:4). 제사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아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믿음과 회개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 평가되고 있으나 가인의 살인사건 이전이든 이후이든 아담과 하와가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단서는 찾기 어렵다. 신약 전승은 아벨의 제사만을 언급하고(마 23:35; 히 11:4) 아담이나 하와의 제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실패자로 아담을 소개하고 있다(롬 5:14; 고전 15:22; 딤전 2:14). 아담의 실패는 하와의 실패로 이어진다.
사실 창세기에 아벨의 제사 장면이나 가인의 제사 장면 어디에도 아담과 하와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없다(창 4:3-4). 아담도 땀을 흘려 밭을 갈아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징계를 당하여(창 3:17-19) 농부로서 가인과 함께 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창 3:23), 그가 제사를 드렸다면 그 역시 가인처럼 곡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제사에 대한 평가가 없다는 사실은 아담과 가인이 함께 그들의 소산으로 곡물 제사를 드렸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다. 제사 문제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적극적인 관여자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이 제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참여하지 않아 제사 자리에 아예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사 불참은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이후의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아벨의 죽음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제사를 속행하며 살았다면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과 결론을 빼먹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술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반면 그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아벨의 선택은 신약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예표로 연결되고 있다. 당시에는 제사만이 인류의 회개를 표현할 방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부재하다는 것은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구원의 길로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2.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 예언을 믿어서 구원받지 않았을까?
두 번째 질문은 전치사 에트(꜄eṯ)에 대한 오역을 바로 잡으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가 임신하여 가인을(꜄eṯ¯qayin) 낳았고
그가 이르되 내가 남자(꜄îš)를, 주를(꜄eṯ yhwh) 창조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MT와 사역)
1절의 ‘여호와로 말미암아’(꜄eṯ¯yhwh)에서 에트(꜄eṯ)는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혹은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을 ‘여호와와 함께’(with yhwh) 혹은 ‘여호와/주(yhwh)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치사 에트(꜄eṯ)가 ‘~의 도움으로’(~을 통해, ~으로 말미암아)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또한 ‘~와 함께’로 번역해도 이는 하와가 여호와와 함께(with), 부모로서 가인을 낳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이상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에트(꜄eṯ)를 with(함께)로 해석한 경우인데, 전치사 에트(꜄eṯ)의 이러한 적용 용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목할 것은 전치사 에트(꜄eṯ)가 가인의 이름 앞에서 목적격 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문맥 내에서 에트(꜄eṯ)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에트(꜄eṯ)를 뒤따르는 단어가 다른 뜻으로 오용되지 않고 목적격의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창세기 기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트(꜄eṯ)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용법 모두 목적격 조사로 보아, 이는 하와가 가인을(꜄eṯ1) 낳고, 여호와(주)를(꜄eṯ2) 낳았다는 기술이며 이는 전체적으로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평행법적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장은 가인‘을’(꜄eṯ) 낳고 주‘를’(꜄eṯ) 낳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며 남자(꜄îš)와 여호와의 전후 문법적 관계 역시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고 있는 평행어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궁켈(H. Gunkel)은 가인과 yhwh를 동일시하고 있고 이러한 문법적 분석을 바탕으로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 등이 각자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보이스는 yhwh를 ‘구원자’(the deliverer)로 번역하면서 ‘내가 남자를, 실로 구원자를 낳았다 하니라’로 의역한다. 보이스는 첫 아들에 대한 하와의 찬양에는 구원자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창 3:15)에 대한 하와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정황은 이러한 하와의 독백에 다른 이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와의 독백에서 가인(qayin)의 이름과 (남자를, 주를) ‘내가 낳았다’(qānîṯî)는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들다, 창조하다’의 어감을 가진 카나(qānāh) 동사는 하와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카나(qānāh) 동사와 카니티(qānîṯî/*qnh) 동사는 두운체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둘은 의미론적으로도 연결된다. 즉, 본문 기자는 의도적으로 ‘창조하다’의 의미를 가진 용어를 연이어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 어근의 배열은 가인(qayin)의 이름이 ‘만드는 자’ 혹은 ‘창조자’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리하면, 창세기 4장 1절의 구문론적 평행 구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는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는 모두 하와의 첫 아들을 칭하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를 모두 동사(wattēleḏ 낳았다, qānîṯî 창조하였다)의 직접 목적어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하와가 ‘내가 가인(qayin=창조자)을 낳았고, 남자(꜄îš)를, (즉) 주(yhwh)를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와가 원죄에 대한 처벌 이후에도 여전히 신성에 대한 아쉬움과 열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와의 이러한 표현은 하와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남자(꜄îš), 즉 구원자로 인식하고 극대화된 기대를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리고 그가 내가 아들을 낳았다 하니라’(wattō꜄mer qānîṯî bēn)로 표현하지만, 하와는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며 가인에 대한 그의 기대를 뿜어내고 있다. 하와가 언급한 ‘남자’(꜄îš)는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창세기 3:16절에서 하와가 자신의 남자(꜄îš)를 갈망하고 그가 하와를 통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하와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쉬(꜄îš)와 후(hû꜄)를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 하와가 갈망할 남자(꜄îš)는 그의 옆에 있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 15절에서 언급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이 여자의 후손, 즉 남자(꜄îš)는 산고의 고통처럼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소산임을 말하고 있다.
하와는 여자의 후손인 이 남자(꜄îš)를 왕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신적인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는 그 남자(꜄îš)가 자신이 임신하여 낳은 가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와가 가인을 낳고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거나 그의 남자(꜄îš)에게 ‘창조자’를 뜻하는 가인(qayin)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그에 합당한 ‘주’(yhwh)라는 칭호(yhwh)를 준 것이다. 그래서 하와에게 가인은 신적인 존재이자 왕권을 가진 자였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구원자’로 기대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그의 이름(qayin/ 창조자)과 칭호(yhwh/ 주)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를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 믿거나 기대했을 수 있다. 이것이 원죄 이후에 하와가 범한 두 번째 죄이다. 그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구원자 상을 자신의 아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하와는 가인에 대해 높은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가인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하와의 의식이 가인이 성장하면서 교만해져 아벨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인성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3. 가죽옷과 여자의 후손 예언도 받았으니 아담과 하와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예언도 해주고(창 3:15)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지만(창 3:21),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도 그 사건을 통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인도 하나님께 살인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표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지만 구약뿐 아니라 신약 전승에서도 그가 구원받은 자들의 조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히 11:4; 요일 3:12). 따라서 가죽옷과 표는 하나님이 앞으로 죄인들에게 행하실 구원 방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보호의 도구가 일시적으로 그들을 위험이나 부끄러움에서 가려줄 수는 있어도 그들의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기에 보호의 도구를 받았다고 아담과 하와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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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평택대학교 신학과 졸업-미국 Golden-Cor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 Th.M)-영국 University of Edinburgh (Ph.D.)-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구약학 부교수 역임-건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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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열 교수
조상열교수
약력:
-평택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Golden-Cornwell Theological Seminary
(M.Div., Th.M)
-영국 University of Edinburgh (Ph.D.)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구약학 부교수 역임
-건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임강사 역임
-가인의 표 (The Mark of Cain) 저술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 저술
-Lesser Dieties in the Ugaritic Texts and
the Hebrew Bible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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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를 지옥에서 보았다는 개인 체험 간증의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기대한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은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의 답은 먼저 유대교 전승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제2 성전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이나 1세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아담의 원죄론을 다루고 있으며 아담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4 Ezra 7:118; 2 Esd 3:21-22; Sir 25:24-26; Wis 2:24; 4:30; 7:118; 4 Ezra 3:20-22; and 2 Bar 48:42-43; 54:19). 유대교 전승을 계승하여 발전한 신약 역시 둘째 아담(그리스도)에 반하여 첫째 아담을 실패자로 규정하고 있다(고전 15:21-22). 유대교 전승과 신약성경이 아담만 실패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원죄론에서 하와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나 배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담은 첫 인류이자 첫 부부의 대표자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원죄 이후에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라는 상상도 유대교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아담이 병들어 치료 목적으로 기름을 가져오기 위해 셋과 하와가 다시 낙원으로 진입한다는 이야기(Life of Adam and Eve)와 그들이 낙원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후회하였다는 해설이 외경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화적 기술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신약 전승도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의 첫 인물로 아벨을 제시하고 있다(히 11:4). 제사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아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믿음과 회개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 평가되고 있으나 가인의 살인사건 이전이든 이후이든 아담과 하와가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단서는 찾기 어렵다. 신약 전승은 아벨의 제사만을 언급하고(마 23:35; 히 11:4) 아담이나 하와의 제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실패자로 아담을 소개하고 있다(롬 5:14; 고전 15:22; 딤전 2:14). 아담의 실패는 하와의 실패로 이어진다.
사실 창세기에 아벨의 제사 장면이나 가인의 제사 장면 어디에도 아담과 하와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없다(창 4:3-4). 아담도 땀을 흘려 밭을 갈아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징계를 당하여(창 3:17-19) 농부로서 가인과 함께 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창 3:23), 그가 제사를 드렸다면 그 역시 가인처럼 곡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제사에 대한 평가가 없다는 사실은 아담과 가인이 함께 그들의 소산으로 곡물 제사를 드렸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다. 제사 문제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적극적인 관여자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이 제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참여하지 않아 제사 자리에 아예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사 불참은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이후의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아벨의 죽음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제사를 속행하며 살았다면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과 결론을 빼먹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술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반면 그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아벨의 선택은 신약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예표로 연결되고 있다. 당시에는 제사만이 인류의 회개를 표현할 방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부재하다는 것은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구원의 길로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2.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 예언을 믿어서 구원받지 않았을까?
두 번째 질문은 전치사 에트(꜄eṯ)에 대한 오역을 바로 잡으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가 임신하여 가인을(꜄eṯ¯qayin) 낳았고
그가 이르되 내가 남자(꜄îš)를, 주를(꜄eṯ yhwh) 창조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MT와 사역)
1절의 ‘여호와로 말미암아’(꜄eṯ¯yhwh)에서 에트(꜄eṯ)는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혹은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을 ‘여호와와 함께’(with yhwh) 혹은 ‘여호와/주(yhwh)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치사 에트(꜄eṯ)가 ‘~의 도움으로’(~을 통해, ~으로 말미암아)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또한 ‘~와 함께’로 번역해도 이는 하와가 여호와와 함께(with), 부모로서 가인을 낳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이상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에트(꜄eṯ)를 with(함께)로 해석한 경우인데, 전치사 에트(꜄eṯ)의 이러한 적용 용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목할 것은 전치사 에트(꜄eṯ)가 가인의 이름 앞에서 목적격 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문맥 내에서 에트(꜄eṯ)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에트(꜄eṯ)를 뒤따르는 단어가 다른 뜻으로 오용되지 않고 목적격의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창세기 기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트(꜄eṯ)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용법 모두 목적격 조사로 보아, 이는 하와가 가인을(꜄eṯ1) 낳고, 여호와(주)를(꜄eṯ2) 낳았다는 기술이며 이는 전체적으로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평행법적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장은 가인‘을’(꜄eṯ) 낳고 주‘를’(꜄eṯ) 낳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며 남자(꜄îš)와 여호와의 전후 문법적 관계 역시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고 있는 평행어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궁켈(H. Gunkel)은 가인과 yhwh를 동일시하고 있고 이러한 문법적 분석을 바탕으로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 등이 각자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보이스는 yhwh를 ‘구원자’(the deliverer)로 번역하면서 ‘내가 남자를, 실로 구원자를 낳았다 하니라’로 의역한다. 보이스는 첫 아들에 대한 하와의 찬양에는 구원자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창 3:15)에 대한 하와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정황은 이러한 하와의 독백에 다른 이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와의 독백에서 가인(qayin)의 이름과 (남자를, 주를) ‘내가 낳았다’(qānîṯî)는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들다, 창조하다’의 어감을 가진 카나(qānāh) 동사는 하와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카나(qānāh) 동사와 카니티(qānîṯî/*qnh) 동사는 두운체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둘은 의미론적으로도 연결된다. 즉, 본문 기자는 의도적으로 ‘창조하다’의 의미를 가진 용어를 연이어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 어근의 배열은 가인(qayin)의 이름이 ‘만드는 자’ 혹은 ‘창조자’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리하면, 창세기 4장 1절의 구문론적 평행 구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는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는 모두 하와의 첫 아들을 칭하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를 모두 동사(wattēleḏ 낳았다, qānîṯî 창조하였다)의 직접 목적어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하와가 ‘내가 가인(qayin=창조자)을 낳았고, 남자(꜄îš)를, (즉) 주(yhwh)를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와가 원죄에 대한 처벌 이후에도 여전히 신성에 대한 아쉬움과 열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와의 이러한 표현은 하와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남자(꜄îš), 즉 구원자로 인식하고 극대화된 기대를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리고 그가 내가 아들을 낳았다 하니라’(wattō꜄mer qānîṯî bēn)로 표현하지만, 하와는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며 가인에 대한 그의 기대를 뿜어내고 있다. 하와가 언급한 ‘남자’(꜄îš)는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창세기 3:16절에서 하와가 자신의 남자(꜄îš)를 갈망하고 그가 하와를 통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하와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쉬(꜄îš)와 후(hû꜄)를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 하와가 갈망할 남자(꜄îš)는 그의 옆에 있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 15절에서 언급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이 여자의 후손, 즉 남자(꜄îš)는 산고의 고통처럼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소산임을 말하고 있다.
하와는 여자의 후손인 이 남자(꜄îš)를 왕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신적인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는 그 남자(꜄îš)가 자신이 임신하여 낳은 가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와가 가인을 낳고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거나 그의 남자(꜄îš)에게 ‘창조자’를 뜻하는 가인(qayin)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그에 합당한 ‘주’(yhwh)라는 칭호(yhwh)를 준 것이다. 그래서 하와에게 가인은 신적인 존재이자 왕권을 가진 자였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구원자’로 기대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그의 이름(qayin/ 창조자)과 칭호(yhwh/ 주)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를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 믿거나 기대했을 수 있다. 이것이 원죄 이후에 하와가 범한 두 번째 죄이다. 그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구원자 상을 자신의 아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하와는 가인에 대해 높은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가인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하와의 의식이 가인이 성장하면서 교만해져 아벨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인성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3. 가죽옷과 여자의 후손 예언도 받았으니 아담과 하와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예언도 해주고(창 3:15)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지만(창 3:21),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도 그 사건을 통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인도 하나님께 살인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표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지만 구약뿐 아니라 신약 전승에서도 그가 구원받은 자들의 조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히 11:4; 요일 3:12). 따라서 가죽옷과 표는 하나님이 앞으로 죄인들에게 행하실 구원 방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보호의 도구가 일시적으로 그들을 위험이나 부끄러움에서 가려줄 수는 있어도 그들의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기에 보호의 도구를 받았다고 아담과 하와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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