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앙에 올려진
서사라 목사의 2차 반론, ‘아담 하와 지옥설’ 등에 대한 변해서
(22.5.6)
다음은, ‘예장통합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을 역임한 최삼경목사가 발행인으로 있는 [교회와신앙]의 기자(장운철)가 서사라(Sarah Seoh)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총 8권)에 대하여 비판한 내용에 대하여 2차 변해(辨解, Defense & Explanation)하여 올리는 글이다.
❚ 아담과 하와도 지옥에 있다고? 에 대한 변해:
1. 성경 본문에 언급된 아담과 하와의 실패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구원 여부는 성경본문에서 명확히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며 동시에 유추해볼 수 있는 주제이다.
성경은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각 인물들의 구원의 문제를 빠짐없이 언급하며 지면을 낭비하고 있지 않다. 성경의 각 등장인물의 최후가 어떠했을지는 그들의 삶의 스토리를 통해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담과 하와는 실패한 자의 전형이며 실패의 결과는 너무도 명확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호세아(호) 6장 7절에는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As at Adam, they have broken the covenant; they were unfaithful to me there) 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성경은 다양한 상징과 은유적 문체의 집합체이기도 하여 여러 상이한 해석이 생산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교회사의 여러 역사적 논쟁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내가 알고 있는 혹은 내가 신봉하고 있는 '신학적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해괴하다'거나 '엉뚱한' 혹은 '황당한' 주장으로 몰아세우고 이단자나 마녀로 만드는데 열심을 다한 역사적 사례는 많기에 굳이 사례를 또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수님이 살아 당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당대의 총회 관계자들과 신학대학 교수들, 이단감별사들이 아니었겠는가?
필자는 상식이 있는 의사이자 생물학자이며 여성목회자이다. 나는 브라운 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UCLA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가슴 뜨거운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영혼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대학 연구소를 나온 사람이다. 나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 그렇게 애타게 기도하던 끝에 그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고 바울도 언급했던 그 천국도 직접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보게 된 곳은 그곳은 나의 기대에 어긋나게 천국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지옥의 한 감옥이었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필자가 아담과 하와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악담을 할리도 없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지옥에 있음을 보고도 그럴 리 없다고 여러 번 의심하기까지 했었다. 나는 심지어 그들이 구원받았고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을 정도로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본 것을 못 보았다고 하거나 들은 것을 못 들었다고 할 수 없으며 내 생각대로 각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구나가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게 된다면 그 경이로움과 극한 무서움에 거짓을 보탤 수 없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이 지옥에 있다고 한 번만 말했다면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의 말대로 '한 번의 실수'로 봐줄 수 있는 것이 되거나, 이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으니 빼도 못하는 '속 깊은 사상'을 가진 불순분자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상 검열을 당하는 상황이, 무척 슬프게 여겨진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 신앙이 성장하게 될 때 그분과 직접 대화하거나 만나보는 것을 꿈꿔보지 않을까. 필자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였고 나의 천국지옥 간증에 사람들이 나만큼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양들도 있고 이리도 있음을 보고 솔직히 너무 놀랐다.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체험을 간증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이단감별사 즉 바울 이전의 사울로 그들이 변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필자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구원여부에 대한 견해를 평가한 최근의 논문으로 조상열 박사의 "하와의 회개에 관한 연구"(조상열 외, 『성경해석의 새지평: 서사라 목사 저서에 대한 신학적 평가』, [하늘빛출판사, 2020: 14-36])와 "서사라 목사의 원죄론 연구"(조상열 외, 『성경과 영적 체험: 서사라 목사의 신학평가』, [하늘빛출판사, 2021: 16-52])가 있다.
아담에 대한 성경의 기본 전제는 그의 실패이다. 이것이 후에 오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공과 대비를 이루며 신약에서 전자를 첫째 아담으로 후자를 둘째 아담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추방된 후 그들의 믿음의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가인을 낳은 후에도 그들은 회개의 제사를 주도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살다가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홍수가 나기 직전에 아담이 죽었지만 그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해지고(창 6:5)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해질 때까지(창 6:11-13)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던 그의 후손인 노아가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 칭함받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을 듣는 차에(창 6:9), 최고 어른인 아담은 여전히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채 침묵하며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믿음의 발로는 삶의 행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아담과 하와는 원죄 이후 분명한 회개의 고백과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의 인생에서 회개와 믿음의 행로를 찾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의 반증이 된다.
필자가 천국과 지옥에서 본 것이 맞는지 성경을 다시 읽으며 확인한 후 책을 썼기 때문에 필자의 책을 읽는 독자는 기존 상식을 깨는 이야기에 당황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직접 보았던 나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늦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바이올라대학교 탈봇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를 한 것이 내 신학공부의 전부이다. 내 신학지식과 표현의 부족이 내가 본 것들을 전달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기존 상식을 깬다고 하여 내가 전하는 내용이 참으로 나의 ‘엉뚱한 성경해석능력’으로 평가절하된다면, 진심으로 진심으로 안타깝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내 성경해석 능력을 증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대로 전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2. 히브리서 11장의 해석
그러나 필자는 내가 본 것이 정말 맞는지 성경에서 확인해야만 했다. 히 11:4절은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된 첫 선례로 아담과 하와가 아닌 아벨을 지목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믿음을 입증할만한 사건과 고백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천국 입성의 근거이다.
아담이 히 11장의 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필자가 그들을 지옥에서 본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11장에서 아담을 건너뛰고 바로 아벨을 믿음의 조상으로 처음 상정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상당한 실수가 아닐까. 그것도 최초의 인류로서 상징적인 존재인데 말이다. 따라서 아벨을 먼저 제시한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장운철 기자는 '믿음의 조상은 아담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아벨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는 필자의 '성경본문 이해력이 참으로 답답하다'고 비판하며 '명단에 없다는 이유로 아담과 하와가 지옥에 갔다고 이해하는 게 정상인'지 반문한다. 지옥에 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는 그들이 천국에 없고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것에 히 11장 4절도 이를 뒷받침하였으면 했지 반대하지 않더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히 11:4절 이하의 본문을 ‘믿음의 조상 계보’로 보는 것은 보편적인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의 시각이다.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못하는 장운철 기자의 해석이 비정상인지 아니면 필자가 비정상인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전문가인 또 다른 심판관이 필요한 듯하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성경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성을 존중한다면 어느 한 쪽의 해석을 비정상으로 매도하면 안 된다. 단지 논리적인 분석과 결론만 요구될 뿐이며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3. 믿음의 계보
장운철 기자는 누가복음 3장의 계보를 비롯하여 신구약에 있는 인류 족보 혹은 아담 자손의 계보를 보고 아담을 믿음의 조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스도의 족보가 동원된 사유는 그의 신•인적 근원과 정통성을 보위하기 위함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물학적 계보에서 아담을 빼고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족속 계보의 정상에는 반드시 아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족보상의 언급이 그의 구원과 직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는 없다.
그의 족보에 언급된 모든 이가 믿음의 조상들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지 않은가. 이름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그들의 구원을 단정하거나 혹은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셋이 히브리서의 믿음의 계보에서 빠졌으니 필자의 논리대로라면 셋도 지옥에 갔다는 말이 된다는 장운철 기자의 비판은 논리의 비약이자 정말 억지이다. 필자는 족보에 등장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지옥에 있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 아니다. 첫 인류였음에도 그가 언급되지 않은 대목에서 필자가 지옥에서 목격한 그들의 상황이 대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에녹 이전에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이 히브리서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모든 등장인물을 다 언급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이 믿음의 족보에 들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는 언급되지 않고 생략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운철 기자가 강조하는 다른 계보에도 언급되고 있는 그 '아담'이 그 유명한 믿음장에서 빠져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독자들이 이해력이 높은 층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을 배려해 읽기 쉽도록 내 글을 최대한 일기체 그대로 책에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본문의 아담 문제에 대한 이러한 필자의 결론이 장운철 기자의 말대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아닌지는 이 글의 독자들이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본다.
4. 아담에 대한 해석
조상열 박사는 다음과 같이 아담의 죽음을 해석하였다.
“구약에서 아담은 인류의 기원이자(대상 1:1) 언약의 파괴자이며(호 6:7), 죽음의 형벌을 받은 왕이다.
또 제 2성전시대 유대교 문헌에서는 첫째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로 꼽히고 있다(이러한 논의는 필자의 글보다는 조상열 박사의 논문을 참고하기를 권한다). 유대교 랍비전승은 분명히 아담을 구원의 계보에 속하는 자라기보다 이 땅에 멸망을 가져온 자로 보고 있다.
장운철 기자의 말대로 창 3:15절의 ‘여자의 후손’ 예언은 분명 그리스도 예언이다. 하와도 가인을 낳고 그러한 생각을 드러냈다. 조상열 박사에 따르면, 하와의 고백을 직역하면 ‘내가 남자를, 여호와를(에트-아도나이) 낳았다’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호와)‘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는 ‘에트’인데 이 에트는 바로 직전 어구에서 목적격 조사로서 가인‘을’(에트-가인) 낳았다는 표현에 동일하게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 아니라 ‘여호와를 낳았다’ 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하와는 자신이 가인을, 야훼를 낳았다고 말하는 것일까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조상열 박사는 하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그의 아들을 신적인 존재인 ‘여자의 후손’으로 믿었기에 보통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 대신 내가 ‘남자’(이쉬)를 낳았다고 하와가 말했다는 것이다. 이 남자(이쉬)는 창 3:15절의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이 남자(이쉬)는 또한 이어지는 16절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이 구절은 보통 ‘너는 남편(이쉬=남자)을 원하고 남편(이쉬=남자)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개역개정)로 번역하지만 조상열 박사는 이 남자가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15절의 그리스도 예언은 16절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와의 고백은 그리스도 예언을 자기 아들에게 잘못 적용한 결과로 하와가 가인을 편애하여 가인이 잘못된 자의식을 갖게 되어 결국 자존심이 상해 형제살인으로 이어지게 된 배경이 될 수 있었다고 진단하고 있다(조상열, "하와의 회개에 관한 연구" 참고).
필자는 전문적인 성서해석자가 아니다. 다만 구약전공 학자인 조상열 박사의 하와에 대한 위의 해석을 본문에 반영해 본다면 하와의 어록이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장운철 기자의 말대로 “하와가 하나님의 손길에 따라 자식을 낳았고, 그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었기”에 구원받았다고 보는 가정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하와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소망을 품은 것은 맞지만, 자신이 이 여자의 후손을 낳았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마음은 자신이 야훼를 낳았다라고 하는 교만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신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은 죄를 오히려 낳게 하였다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잘 알다시피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는 한참 후인 지금부터 약 2020년전에 오셨다. 그런다 아담과 하와는 지금부터 약 6000~20000년 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조상열 박사의 성경해석의 새지평에 실린 ‘하와의 회개에 대한 연구’ 참조).
5. 아담 – 오실 자의 모형
장운철 기자는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롬 5:14)이고 “첫 사람 아담은 생령 (살아 있는 영)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기에(고전 15:45) 아담이 지옥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5장은 원죄를 갖고 태어난 모든 인류(12, 15-19절)의 구원을 위해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고(6-11절), 둘째 아담의 구원과 속량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첫째 아담의 원죄도 비등하게, 대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본다(15-21절). 로마서 5:14절을 보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향이라”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 맞다. 로마서 5장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게다가 고전 15:45절(“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은 장운철 기자의 주장과 달리 전혀 다른 맥락에서 나온 구절이다. 고전 15장은 전반적으로 육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부어주셔서 그가 사람이 된 것처럼(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리스도도 죽은 자들을 그렇게 부활시키시겠다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즉 아담이 생령이 되었으니 타락이후에도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는 말이 절대 아닌 것이다.
❚❚ “천국 확인 대행 서비스?”는 어불성설의 억지 주장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영적 체험(개인이 환상이나 꿈으로 본 천국과 지옥)은 개인의 주관적인 간증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경험한 것은 천국과 지옥 전부를 본 것도 아니고 일부를 본 영적 체험이다. 다음은 필자가 쓴 간증수기에 대하여 평가를 의뢰하면서 필자가 적은 내용을 여기 적어본다. “제가 어떻게 천국과 지옥을 다 알 수 있나요? 저는 제 책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만을 얘기했고, 제가 본 것이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는 경우에는 “그럴 것이다”라고 애기한 것뿐입니다. 제가 천국의 일부와 지옥의 일부를 본 것이므로 제가 말한 것이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아시아인이기에 제게는 또 동양인과 한국의 문화에 맞게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말씀처럼 결코 절대성을 가진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천국․지옥 간증은 단지 제가 체험한 주관적인 것이기에 보편성을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제 개인적인 체험이 성경의 말씀과 일치할 때에 ‘아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그것이 교리화 되거나 또는 절대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지옥(地獄)에 있는 것을 제가 본 것도 저의 개인적인 영적체험일 뿐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자기는 그분들을 천국(天國)에서 보았다하면 저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간증자는 어디까지나 천국여정에서 보고 듣고 대화하며 체험한 것들을 주관적으로 정리한 것 일뿐입니다.” 그렇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의 진실에 대하여 알려면 이후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확인해 볼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성을 가지나 어떤 간증에 대하여나 그 해석에 관하여서는 “단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It seems to be)"라고 하는 것이지 절대성을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가 한국의 그 목사님이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하시는지라 한 달 전에 소천하신 그 목사님에 대하여 나는 주님께 꼭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주님께서는 그 목사님을 필자에게 보여주셔서 그것을 나는 그 분에게 말씀드렸을 뿐이다(서사라,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수기 제 1권>, 하늘빛출판사, 2014, pp.95-96). 그것은 나도 궁금하였고 (왜냐하면 그 목사님의 사모님도 목사님이신데 평생 성도가 한 명밖에 없어서 너무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던 터였고 남편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내된 목사님은 매일 우신다고 하여) 내가 또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했을 뿐이다. 내가 그것을 업(業)으로 삼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장운철 기자가 이런 일을 가지고 필자가 “천국 확인 대행 서비스?”를 했다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일을 너무나 가볍게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필자가 체험한 꿈과 환상을 통해서 간증한 내용이 혹시라도 신학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면 신학자들의 진솔한 토론을 통해서 필자가 인지하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비판자께서 필자의 천국지옥여정을 통하여 간증한 8권의 저서를 복음전도를 위한 주님의 간절한 심정으로 읽어본다면, 필자가 과학자로서 목사로서, 보고들은 것들에다가 필자가 묵상한 성경 말씀의 구절을 필자의 지식의 한계 안에서,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고,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토마스 주남’(Choo Nam Thomas)을 만났다고? 하면서 “서사라 목사가 바로 이 사람, 토마스 주남의 ‘천국 지옥 체험기’ 내용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하는 비판은 어설픈 프레임(Frame)을 씌운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토마스 주남은 ‘천국 지옥 체험기’를 자신의 책으로 출판했다. 책 제목이 <천국은 확실히 있다>(토마스 주남, 조용기 번역, 서울말씀사, 2008년)였다. 장운철 기자는 토마스 주남의 천국 지옥 체험기인 ‘<천국은 확실히 있다> 읽어도 되는가’라는 제하의 기사를「교회와신앙」에 작성한 바 있다(2009. 4. 13. 월). 여기서 장기자는, ‘토마스 주남(Choo Nam Thomas)의 천국과 지옥 체험수기’에 대하여 3가지의 내용으로 비판하였다. 즉, 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종말의 임박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토마스 주남에게 ‘직통계시’를 내려 주셨다는 것에 대한 비판, ② 토마스 주남이 스스로를 ‘말세의 여선지자’, ‘예언의 산 증인’이라고 소개하면서 교회 공예배 중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며 추는 소위 ‘성령춤’에 관한 비판 그리고 ③ 시한부종말론 등에 대하여 문제 삼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장 기자는 “필자가 바로 이 사람, 토마스 주남의 ‘천국 지옥 체험기’ 내용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살짝 첨언하고 있다. 토마스 주남은 내 간증기에 잠시 나오는 인물일 뿐이다. 나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
내 간증기를 보면 천국에 대하여 토마스 주남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천국에서 토마스 주남을 만났다는 것이 평소 그를 비판해온 장운철 기자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 될 수 있겠으나 천국에서 본 사람을 지옥에서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천국은 그런 곳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이 왕권을 가진 자로 등장하고, 기대했던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거나 성밖에 쫓겨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필자의 천상여정의 간증 내용과 동기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필자가 쓴 차별적인 간증수기 저술방식에 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국지옥에 관한 다양한 간증 서적이 세간에 나와 있지만 필자의 간증수기만큼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간증을 스스로 검증(Self Verification)한 것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적 체험한 다양한(성경의 저자이신 주님과 함께 때로는 성경 속의 인물들과의 대화-질의응답에 의한) 에피소드들을 성경말씀의 거울에 투영시켜 그 진위성을 철저히 검증하는 방식을 택했다.
간증저서에 수록된 내용에는 주님의 예언적이거나 계시적인 것도 있지만 대다수가 성경에 기반한 성경역사 속의 일들에 관련된 대화들이며, 보고 듣고 질의 응답한 것들을 가감 없이 필자는 서술하였다. 이와 같은 영적상황 속에서 자아중심적 생각이나 조작된 연출은 있을 수 없었다. 필자는 장운철 기자가 생각하는 토마스 주남처럼,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종말의 임박성을 세상에 알려주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내려 받은 것도 아니고 단지 주님께서 영의 눈을 열어서 천국과 지옥을 보게 하셨을 뿐이며 필자 스스로를 ‘말세의 여선지자’로 소개한 적도 없고 또한 정확한 시와 때를 거론하는 시한부종말론을 말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장운철 기자가 토마스 주남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필자를 동일시하여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또한 장운철 기자가 토마스 주남이 조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때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은 영어 해석상 조금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주남의 영어원본을 보면 “The Lord had told me during the preceding national election year in the United States George Bush was His chosen man for the last days president. 이것은 아마도 토마스 주남이 부시 대통령이 선출될 시기에 쓴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the last days president 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것을 번역하여 보면
‘last days’ 라는 말은 ‘마지막 시대에’ 혹은 ‘종말 때에’ 이런 말이다. 필자는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의 영어에서 조오지 부시는 예수님의 선택한 사람 (한 나라의 대통령을 세우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으로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 말은 그가 재직할 때에 종말이 올 것이다 라는 말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에 부시 대통령이 종말이 오기 전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하려면 Bush will be the last president in United States before the end of the world 이런 식으로 표현됨이 옳다. 즉 the last days president 와 the last president 라는 말은 다른 말로 보인다. 필자 역시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본다. 마 16장 2-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는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현재 이스라엘에 제 3 성전이 지어질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하나의 시대의 표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제 3 성전이 지어지면 살후 2장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 즉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 그가 그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표적에 깨어 있어야 한다.
❚❚❚❚ 서 씨가 자신의 책을 소각했다고? 필자가 유명한 종교지도자를 지옥에서 본 것은 필자의 주장이 아니고 증언일 뿐이다.
필자(서사라 목사)는 미국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한 명문대학교 포스트닥(Post Doc) 과정에서 의학계통의 논문을 쓰던 중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필자가 한 모든 학문적인 작업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즉 필자의 내면 속에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의학 논문을 쓰던 일을 멈추고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 전도하는 일에 매진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그런 전도였다. 문제는 필자가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지 않고 어떻게 확신있는 전도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께 천국과 지옥을 보여달라고 매우 심각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런 중에 필자는 매우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유체이탈(流體離脫)하여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으나 나중엔 필자의 영(靈)이 하늘나라로 가서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거나 이미 먼저 가 있던 성도들도 만나보았다. 그리고 지옥을 보았다. 이 일은 너무나 쇼킹한 체험이었다. 그 후에 필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여 왔다.
필자가 지옥에서 본 것을 증언한 내용 가운데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필자가 지옥에서 유명한 종교 지도자 (간증수기 첫 인쇄에서는 칼빈이라고 이름을 명명하였으나 명예훼손적인 면에서 또한 필자가 속한 대신교단총회와 이대위원들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첫 인쇄된 책들을 다 미국으로 보내어 폐기하였고 그리고 그 이후는 유명한 종교 지도자로 바꾸어져서 인쇄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인쇄되고 있는 필자의 간증책에서는 칼빈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집회 등에서도 이름을 언급한 일이 없다.)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종교지도자를 지옥에서 보았다는 것은 내 주장이 아니고 단지 증언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운철 기자가 ‘교회와 신앙’이라는 인터넷 잡지에서 말한 “서사라 ‘칼빈은 지옥에 있다’ 해괴한 주장”이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보인다. 필자는 어떤 신학적인 주장을 말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체험하며 본 것을 증거한 것뿐이다. 문제는 이런 증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까 하는 것이다. 필자 자신도 큰 충격에 빠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다. 필자는 주님께 왜 그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주님은 길게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가 지도자라는 책임 때문일까? 필자는 갑자기 야고보서 3:1 말씀이 생각났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리하여 만일 필자도 부흥회 같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잘못 가르친다면,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한다면, 나도 하나님 앞에 큰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필자는 조직신학을 오래 전공한 모 교수님이 이 문제에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 유명한 종교지도자의 생애와 헌신에 대해서는 잘 아는 분이었다. 이 교수님 자신도 그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지옥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더러 옳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와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단지 인간의 시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독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신학은 어떤 예외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굴복하는 자세로 반성하는 자세로 수행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나 모든 인간의 신학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성경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으나 성경을 해석하는 수단인 모든 신학 체계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한 사람의 신학을 절대화하는 순간 이미 이런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진다고 한다. 3세기에는 진리로 인정받던 것이 5세기에는 그렇지 않는 것도 판단되었고 또 20세기에는 옳았다고 판단한 신학이 21세기에는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신학자의 신학이 후세대 사람들에게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판하는 일이 터부시된다면 거기에는 신학의 정화 작용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칼빈신학을 이런 시각으로 보는 것이 개혁신학 생리에 어울릴 것이라고 말했다. 칼빈이나 칼빈신학이 하나님 위에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필자는 필자의 간증과 증언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아닌지를 학문적인 차원에서 평가를 받고 싶어했다. 물리 세계를 떠나 하늘나라에 가는 것 소위 입신 경험이 성경적인 근거를 지니는지, 개혁 신학적으로 온당한 것인지, 평가를 받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신학자는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망설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감히 말하건대 이런 질문을 던지고 학문적인 평가를 받는 일을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칼빈이라고 명시되었던 처음에 출판된 필자의 간증수기 지옥편과 창세기를 다 미국으로 옮겨서 폐기처분하였다. 그런 후 지옥편과 창세기가 새로이 인쇄될 때에는 필자가 속한 대신교단총회의 지도와 이대위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칼빈’ 이라는 이름 대신에 ‘유명한 종교 지도자’로 수정되어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전의 처음에 출판된 지옥편과 창세기가 배포된 것을 다 회수가 불가능하여 부분적으로 회수된 것을 지난번에 교회연합신문에 나온 것과 같이 소각 폐기처분하였다. 앞으로도 필자는 원래 칼빈 (실명을 거론하여 명예훼손적인 면이 있는) 이라고 인쇄된 필자의 책이 발견된다면 필자는 또 소각할 예정이다. 이렇게 교단의 충고와 이대위의 충고를 받아 들여서 칼빈 (명예훼손적인 면이 있는)이라 명시되어 있는 간증수기를 이제는 유명한 종교지도자로 수정되어 인쇄되고 있고 필자가 참여하는 집회에서도 칼빈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이라는 이름 때문에 계속하여 문제를 삼고 필자를 비방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죄에 해당한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필자가 속한 대신 서울 동노회의 입장문을 (2021년 1월 1일 국민일보 등 여러 신문에 게재된 내용) 여기에 밝힌다.
‘코로나 판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모든 목회자 그리고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주의 평안과 보호하심을 기도합니다. 또한 교회 본인의 사명인 영혼구원과 선교의 문에 속히 회복과 정상화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본 노회에 소속한 서사라 목사에 대한 입장문입니다.
서사라 목사는 한국과 미국에서 의사이며 과학자의 길을 걷다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과학자의 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목사가 되어 본 노회에 가입한 노회원입니다.
그가 본 노회에 가입하기 전 자신이 체험한 것을 저술한 몇권의 도서가 있습니다.
또한 다수의 교회에서 집회를 통하여 자신이 체험한 것을 간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본 노회에 가입하기 전의 본 노회의 개혁과 신학을 접하기 전, 있었던 사실이며 본 노회 가입을 하면서 자필로 과거에 저술한 도서의 내용중 신학적 문제와 기존 한국교회가 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난 사실들은 수정 및 삭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본 노회의 지도를 성실히 따르기로 하였고 지금까지 개인적인 체험을 전하다보니 혹시라도 신학적 오해를 낳게 하거나 혼란을 초래한 일이 있다면 길이 자속하며 더욱 더 성실하게 노회와 총회의 지도를 받아 혼란이 없도록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서사라 목사의 간증 가운데 신학적인 고찰이 필요한 경우에는 신학포럼이나 검증하는 시간을 통하여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신학 발전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이번 입장문을 계기로 궁금하신 것은 노회와 서사라 목사에게 문의하시면 성실하게 답해드리도록 하겠으며 꾸중이나 책망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달게 받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사라 목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믿으며 개혁과 신학을 근간으로 서울동노회원의 한 사람으로 역할을 감당할 것임을 자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 서울동노회는 차후에 서사라 목사에 관한 사사로운 입장이나 논란을 피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이러한 입장문을 무시하고 언론이나 유튜브나 SNS등으로 왜곡, 유포, 배포 등을 할 시에는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을 고지합니다.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서울 동노회 노회장 강열철 목사 -‘
그리고 끝으로 필자의 반론을 보내오면 실어주겠다고 한 <교회와 신앙>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2022년 5월 4일 서사라 목사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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