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영성 lll - 하나님의 연단
네 오늘 첫 시간은 우리 여호수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6장 8절부터 21절까 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이 이 달 마지막 시간이죠. 그죠? 이번 달은 사사기, 여호 수아, 여호수아, 사사기, 요나서 룻기, 이렇게 우리는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 장 8절에서 21절 말씀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 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 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 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 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 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 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 라 하니라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 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 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 하니라
아멘
네 오늘 이 상황을 보면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여리고가 무너지고 가나 안을 차지하는 그런 상황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은 왜 처음에 가나안을 정탐했던 그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이 있었죠?
이 사람들을 안 쓰고, 처음에 정탐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못 들어가게 하고 왜 그 다음 차 세대를 통해서 그 가나안을 들어가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그 아버지 세대하고 처음에 정탐했을 때 그들은 못 들어간다고 그랬죠. 그죠? 못 들어가니까, 처음에 그들은 들어가서 싸워서 이길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할 생각을 한 거에요. 근데 보니까 자기들은 메뚜기 같고 그 사람들 은 아낙 자손도 있고, 아주 잘 훈련된 군사들이니까 무기도 있고 하니까 우리는 도저 히 견고한 여리고가 버티고 있으니까 우리는 도저히 못 들어간다. 그리고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랬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다 엎드러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기 다리시고 오히려 그 차 세대를 통해서, 차세대, 그때 어린 아이들, 차세대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볼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이 아버지 세대와 그 차 세대의 차이가 뭐냐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먼저 아버지 세대를 가나안으로 이끌지 아니하시고 그 차 세대를 가나 안으로 가게 하셨는가? 그 차이가 뭔가?
이 두 세대의 차이가 뭔가 하는거죠?
그럼 아버지 세대를 보면 그 엎드러 죽은 아버지 세대, 그리고 그 차 세대의 아이들, 차세대가 인제 장성한 자들이 되어져서 들어가는 거죠.
차세대의 차이가 뭐냐? 아버지 세대때, 그때 가나안 정탐을 해서 사실은 하나님이 그 들이 원망, 불평하지 않고 정말 순종했으면 아마 차지했을 거에요.
그죠? 그런데 차지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뭐냐? 아버지 세대는 연단을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차 세대는 뭐에요? 40년간 광야의 삶 속에서 연단을 받은 자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 연단을 받겠습니까? 연단이 그냥 이루어집니까? 차 세대가 연단을 받는걸 보면 몇 년을 받았습니까?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을 통해서 연단을 받은 그들을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는 거에 요. 그럼 이 얘기가 무슨 얘기냐?
우리가 연단 받지 않고 쓰임 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쓰시지도 않을뿐 아니라 오 히려 우리가 성급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나는 연단되어진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연단은 1,2년 내에 이루어지냐? 5년 내에 이루어지냐? 10년 내에 이루어지냐? 보 니까 엄청난 시간이 걸리더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거는 그냥 우연이 아니고 40년 연단 받은 차세대가 가나안 들어갔잖아요? 모세도 얼마만큼 연단을 받았습니까? 쓰임받기 전에 40년 연단 받았어요.
왜 이 숫자들이 우연일까? 여러분!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숫자들은 뭘 얘기하냐 이거죠. 뭘 얘기하냐? 그 만큼 많은 시간 동안 충분히 연단된 자들이 충분히 낮아진 자들을 하나 님이 쓰시더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럼 우리인생은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지금 내가 연단 과정중에 분명히 있을거거든 요. 여러분이나 저나 분명히 우리는 연단 과정속에 있습니다.
근데 이 연단을 내가 좀 빨리 마치고 쓰임 받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쓰임 받는게 아 니라 하나님의 때에. 할렐루야. 충분히 연단 되어진 후에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에게 와 있는 고난과 환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더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걸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이지요. 나는 지금 연단되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의 삶속에서 40년을 두신 이유가 그게 사실은 징계였거든요. 그들이 불순종한 징계였는데 그러나 그 징계에 대한 40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에게 이루고자 했던 건 뭐냐면?
첫째, 그들을 겸손케 할려고 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교만하 다. 그러죠. 왜 불순종하냐? 교만하기 때문에 불순종한다는 겁니다.
그게 교만에서 비롯된다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하 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순종하는 자로 낮추기 위해서 광야 생활 40년을 일으켰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차 세대를 훈련시키는 그 목적중의 하나가 그들을 겸손케하기 위해서, 순종하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서 연단의 목적이 뭐냐 이거라는 것이지요. 순종하는 자 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거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는, 왜 내가 그렇 게 해야 됩니까? 라고 하는, 토를 달지 않는 순종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광야의 삶, 40년을 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연단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왜 그 40년동안 연단하시는가? 토 달지 않기 위해서, 할렐루야. 아멘.
저는 이런걸 보면서 많은 거 생각이 들어요.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나. 그죠? 이 하나님의 주권이죠. 그죠? 왜? 라는 토를 달지 않고 그 속에서 순종하는자. 순종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나에게 연단이, 연단의 과정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그 연단을 통해서 40년이란 그 연단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던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게 뭐였냐면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리고가 무너진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은 그들이 그 40년간 거기 있으면서 어떻게 해서 믿음이 생겼냐는 거죠? 그들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말씀하셨잖아요. 만나, 만나로 살았잖아요. 그거는 그들을 점점 slow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죠? 만나를 40년간 내리게 해서 그들을 먹여 살렸고 반석에서 물을 터서 물을 먹 게 했고,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으로 먹고 사는 거를 배우게 한거죠. 그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하고 계시고 자기들을 먹여 살리는 거를 그 믿음을 허락하신 거 에요. 신발, 신도 안 떨어지고 옷도 안 헤어지고 40년동안.
야~ 40년동안 옷이 안 헤어졌네요. 40년을 입었다는 거야. 신발도 안 떨어지고 신발, 40년간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제가 40불짜리 신발을 사 쓰는데 2년 되면 떨어지더라고.
2년 되면 앞 뒤가 그냥 터지고 2년 만에 한 번씩 제가 사요. 근데 40불이면 싸잖아. 그죠? 2년 동안. 근데 40년 동안 신발이 안 떨어진 거.
그 사막에서 그 돌 많은 사막에서 옷도 안 헤어지고. 그런 걸 보면서 그들은 믿음이, 믿음이 자꾸만 성장했어요.
그러니까 여리고가 무너지기 위해서 엿 새 동안 한번을 돌고 일곱째 날은 일곱번 돌 고 마지막에 큰 소리로 외쳐라 했을 때 그대로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 분! 그러니까 이렇게 순종하는 자, 정말 낮추어진 자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은 많이 낮추어졌다는 것이지요. 겸손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그들이 배운 건 뭐냐면? 우리가 사는 것은 나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고 나의 형편과 처지 때문에. 그러면 자기들은 죽어야지. 그러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사는 것을 배웠다는 겁니 다. 할렐루야. 하나님으로 사는 걸 배웠다.
여러분!
살고 죽는 거를 우리는 하나님께 맡겨야 되죠. 그죠? 살고 죽는 거를 하나님께 맡긴 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가든지 하나님 앞으로 갈수 있습니다. 그죠? 그리고 후회가 없고, 지금 가드라도 여러분, 후회가 없죠. 그죠? 지금 가더라도 아쉬운게 있는 사람. 지금 가더라도 우리는 아쉬운 게 없어야 됩니다. 단지 아쉬운게 있다면 여러분이 사 랑하는 자들을 남겨놓고 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이 아쉽겠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쉬운 게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살고 죽는거 한번 생각해 봐요. 살고 죽는다. 죽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 저는 이
게 제 자랑이 안되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렇게 듣지 마시고 제가 한번은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을텐데 벽에, 벽이에요 이 벽 인데 벽에 영의 세계가 펼쳐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게 보이는거야. 눈 뜬 상태에서 영화 Screen에 내가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 안에 영적인 세계가 보이는. 그게 보인게 아주 짧은 시간이에요.
뭐 긴 시간도 아니야. 나는 다른 사람처럼 많이 보고, 오랜 시간 보고 그런게 아니야. 거기서 무슨 message를 듣고 이런 것도 아니야. 그냥 벽에 영화 Screen이 하나 펼 쳐졌어요. 그리고 내가 보니까, 거기 내가 걸어 들어갈수도 있을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냥 벽인데 벽이 아니에요. 제가 그걸 느꼈거든요. 영화 Screen같다 생각을 했어요. 근데 제가 Internet에 Youtube를 한번 봤어요.
어떤 목사님의 간증인데 똑같은걸 얘기하는 거야. 어느날 자기가 벽을 보는데 벽에 영화 Screen이 펼쳐졌다는 거에요. 나는 얼마나 놀랬는지 아세요?
나는 가끔씩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하잖아요. 하는데 그게 진짠가?
내가 본게 진짠가? 한번씩 의심이 일어나요. 근데 그 분이 딱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어머머! 저 분이 나랑 똑같은 얘기를 하는구나1” 근데 이제 그 영적 Screen안에서 그 본것들을 얘기를 하더라구요. 저는 그 분처럼 그렇게 자세히는 못봤어요. 그러나 초원이 있고 정원이 있고 나무가 있고, 천사들이 있는것 같고, 주님이 있는걸 본거 같애. 쫙 그냥 거기 내가 걸어 들어가도 걸어 들어갈수 있는.. 여기 벽이 없는 거에 요. 그 분도 그런 얘기를 하드라고.
근데 거기 본거에 있어서 좀 심각한 얘기를 했어요. 나는 결코 그 분이 지어낸 얘기가 아닌걸 압니다. 왜냐면 나랑 똑같은 경험을 했으니까.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냐? 살고 죽는 거 하나님한테 맡기는 거.
영적 세계가 있고 정말 우리가 바래야 될 것은 여기가 아니고 저기라는 거.
그리고 우리의 진짜 시민권은 저기에 있다는 거 그걸 말하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우 리는 내가 못 봤다고 해서,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없는 건가, 그게 아니 라 진짜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늘 내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어디에 가 있어야 되냐? 하나님, 하나님 나라, 거기에 내 상이 있고 내가 영원히 가서 거해야 될 곳은 진짜 거기고. 본 자들이 너무 많잖아요. 내가 설사 못 봤다 할지라도 본 자들이 말을 하잖아요. 할렐루야. 그걸 실제적으로 여기고 살자 이겁니다.
여러분!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가져요. 지금 이 시대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보면은 자기는 지 금 죽어도 괜찮데. 근데 가만히 보면 그 말이 믿음 안에 있는 실제 안에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식의 반응.
실제적으로 죽음이 딱 앞에 닥쳤을 때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때 가서 내 가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하면 벌써 늦는 거에요.
우리는 저 세상이 확실히 있다는 걸 알면 내가 지금 어떻게 죽어도 상관이 없잖아요, 사실은. 그런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되요. 근데 사람들은 강 건너 물 건너 얘기로 생 각해. 아유 죽음 이 찾아오면 어떡하겠습니까?
믿음을 지키겠습니까? 그러면 아이 뭐 지금 죽어도 괜찮아요. 저는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잘 알잖아요. 여러분들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어저께 누구랑 통화를 했어요. 어떤 전도사님하고 통화를 하는데 자기는 하늘 나라에 소망이 있고 뭐 지금 죽어도 괜찮다고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강 건너의 어떤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일은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식의 얘기를 하더라 이거에 요.
준비되지 않은 그런 상태 속에서 실질적으로 당할 때 과연 그 사람이 승리할수 있을 까? 순간에 Question이 있더라 이거에요. 믿음이 좋은척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는데 가만히 보면 아니야. 그런 거 느끼는 거 있죠. 나만 느끼나요? 그거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항상 어떤 신앙으로 살았냐 하면?
종말 신앙으로 살았어요. 사도 바울을 가만 한번 보세요.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한 욕 망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고, 우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야 되요. 왜냐? 그래야 세상 에 대한 한 치의 욕심도 없이 살 수 있는 거에요. 그게 하나님이 사실 원하시는 거거 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모든 믿음이 좋은, 믿음의 신앙의 선진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적혀있는 믿음의 신앙의 사람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결코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어요. 그렇게 살려면 종말 신앙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바른 신앙이라는 겁니다. 내가 내일 갈지도 모른다. 그런 신앙을 갖고 살아라는 거에 요. 할렐루야. 그러나 사는 날 동안은 준비하며 살아야 돼. 내가 언제 갈지 모르니까. 그 준비라는 거 뭐냐? 내가 갈 준비도 해야 되고 이 세상에서 착실히 살 준비도 해야 되고 두 가지를 다 해야 되는 거에요.
아멘입니까? 나는 내일 죽을 거라고 모든 걸 포기하고 이래 살아가라는 게 아니에요. 그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오늘 내가 잘 살아야 되는 거야. 아 멘. 두 가지를 다 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요리 저리 피해가드라구요. 미 꾸라지 빠지듯이, 이렇게 그런 척 하면서 아닌 것처럼 미꾸라지 빠지듯이 빠져나가드 라구.
그 다음에 여호수아 6장 2절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그 용사들을 네 손 에 넘겨주었으니
자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그 용사들을 네 손 에 넘겨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근데 그들이 보는 것은 여리고가 막 문이 닫혀있고 딱 버티고 있거든요. 근데 하나님은 네 손에 붙였다는 거에요.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거는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 을, 안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진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거야. 할렐루야. 그러니까 우리 눈 앞에는 큰 여리고가 여러분의 키보다 훨씬 더 높은 여리고. 여러분! 연속극 에 보면, 성 함락시킬때 큰 성이 막 벽위에 올라와 있잖아요. 그것처럼 여러분 키보 다 훨씬 큰 여리고가 벽돌로 쫙 올라와 있는데, 딱 버티고 있는데 저거를 주신다는거 야. 이미 줬다는 거야. 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 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그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여호수아6:2) 붙 였다는거야. 이미. 앞에는 버티고 있는데, 근데 이 거를 여호수아가 완전히 믿음으로 받습니다. 아멘입니까?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외치라 그러잖아요.
이 모든 것들이 믿음의 문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어떤 것에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승리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믿음의 문제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여리고가 그렇게 서있어도 이미 내가 너희 에게 이걸 줬다는 거에요. 이걸 줬다. 사람은 요만해. 여리고는 크게 버티고 있는데. 이걸 이미 너희에게 줬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그들은 어디서 배 웠냐? 광야에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40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웠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큰 여리고가 버티고 서 있어도 그걸 믿 음으로 받는 거에요. 돌아라 그러면 돌고, 말하지 마라, 침묵하라 그러면 침묵하고 그 다음에 한번하라 하면 한번씩 돌고, 마지막 날에 일곱번 돌고 외치라 그랬더니 세상 에 그 큰 여리고가 무너져 내린거에요. 할렐루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이렇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될것인가? 무얼 믿어야 될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 히브리서 11 장 1절과 2절 한번 찾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 를 얻었느니라."
우리가 붙들어야 될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다음에요, 여러분!
법궤를 앞세우고 돌게했죠. 그죠? 법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때에나 그 들도 법궤를 앞세웠어요.
법궤는 뭐냐면? 하나님의 임재를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 시다. 하나님을 앞세우는 거에요. 무슨 일을 해도.
요단 강에 들어설 때에도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 강에 발을 들였다. 그래 요단 강이 쫙 갈라졌잖아요? 그러니까 뭐든지간에 하나님을 앞세우라는 거에요. 하나 님.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삶. 실패의 삶이죠. 그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나, 그런 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삶에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을,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내 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안에는 늘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고, 그 분도 나와 함께하고 있고, 그럼 우리의 삶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을 주 셨어요. 우리를 삶에다가 파견시켜 주셨어요. 그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법궤와 같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함께하고 계세요.
그럼 이 얘기가 무슨 얘기냐면은? 내가 살고 있는 그 것, 나의 삶, 내가 지금 살고 있잖아요. 살고 있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거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일이더라는 것입니다.
뭐가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요. 그러면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집 청소를 하고, 내가 지금 하루를 살고 있는데 이 삶이 뭐라는 겁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 내가 법궤를 앞세우고 가는 삶, 하나님이 나를 그 삶에 두신 삶. 그러니까 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에요. 그럼 우 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내가 무얼 하든 간에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에요. 할 렐루야.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에요. 그럼 내가 살아있는 이 자체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할렐루야. 내가 살아있는 그 자체. 내가 움직이는 것도, 내가 가는 것도, 내가 뭘 하는 것도 그게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그 삶에다가 두셨어 요.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초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계셔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야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진짜 된다는 것이지 요. 그리고 이 법궤 앞에는 누가 있었냐면요? 제사장들이, 일곱 제사장들이 양각 나 팔을 불면서 진행했어요. 법궤가 있고, 그죠? 법궤를 멘 사람이 있고 앞에 일곱 명의 제사장들, 양각 나팔을 불었다. 나팔을 불면서 진행한 거죠. 그럼 이 양각 나팔을 분
게 뭐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여러분!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악대라 그러나? 그걸 뭐라 그러죠? 그걸 앞세워서 세운 적이 있죠. 전쟁하러 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를 앞세워서 전쟁하러 나 간 그 역사가 적혀있죠. 그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메고, 그 앞에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가는 거에요. 양각 나팔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내 앞에 여리고가 버티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어떤 상 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합니다.
예, 찬송하기를 원하더라.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늘 함께 모시고 다니는 그런 삶을 원하드라는 것입니다. 근데 때로는 여러분이 환난을 만날때, 환난과 고난 속에 있을때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럴 때는 하나님은 우리가 뭐하기를 원하는 가? 환난과 고난속에서 내가 찬양이 안 나올때, 찬송이 안 나올때, 찬양이 안 나온다. 감사가 안 나온다. 그럴때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은 침묵하기를 원하드 라. 침묵하기를 원하시드라.
여러분!
그 하나님은 그들이 여리고를 돌때요. 침묵하라 그랬어요. 한번 돌아도 안 무너지고, 두 번 돌아도 안 무너지고, 3번 돌아도, 여섯 번째까지 안 무너지는데 그리고 일곱 번째 날에 여섯 번 더 돌고 그래도 안 무너지잖아요.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침묵하 라 그랬어요. 왜 침묵하라 그랬을까요? 입 열면 무슨 얘기하겠습니까? 그렇죠. 원망 하고 불평. 뭐 이래가지고 무너지나? 믿음이 확 새어나가 버리는 거에요. 여러분이나 저나 환난과 고난 속에서 누가 여러분을 괴롭힐 때, 그럴 때 무조건 감사하고, 범사 에 감사하지 못하는 나지만, 하나님은 입을 열면 원망, 불평이 나가니까 그때는 침묵 하라.
내가 환난과 고난 속에서 누가 나를 괴롭히더라도 하나님께 감사가 안 나갈때는 어떻 게 하라구요? 침묵하라는 거에요. 믿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잠언서 4장 23절 한번 가보죠.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입을 벌려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고 찬양이 안 나올 때 그때 입을 벌려서 원 망과 불평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를 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한번 입으로 뱉은 것은 주워 담을 수가 없잖아요. 근데 좋은 방법은 하나 있어요. 뭐
냐? 예수 이름으로 취소하면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내가 한 모든 저주의 말들, 내 입에서 나간 모든 나쁜 말들을 예수 이름으로 취소한다” 그걸 3번하고 나면 자유해져요. 예수 이름으로 취소했으니까. 그래서 여러분. 가족이나 여러분이 살면서 한번씩 기도의 자리에 앉아서 여러분이 취 소해줘야 되요. 안그러면 그 말들이 우리를 사단이 가지고 노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 다. 그래서 여러분. 침묵하라!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수 없거든 침묵하라.
그 다음에는요. 인내의 문제가 있습니다. 인내의 문제. 여러분이 삶을 사는 것은 여리 고를 도는 거와 똑같거든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여리고를 돌고 있는 것과 같은 거에요. 근데 그 여리고가 무너져야 되거든요. 그 여리고가 무 너진다고 하는 것은 정말 내 마음 속에 간절한 소원과 기도가 응답되는 그 날입니다. 그러면 그 여리고가 무너지려면 어떻게 했나? 이스라엘 민족들을 보니까 순종했어요. 이해가 안가도 순종하고, 하나님이 돌아라 할 때까지 돌고, 하라는 대로 그대로 했어 요. 언제까지요? 무너질 때 까지.
여러분!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궈야만 몸이 깨꿋해 진 것은 그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꼭 일곱 번이 아니라 충분히 감내하고 인내한 그런 숫자드라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어떤 것에 대해서 도 여리고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 앞에 그 문제에 대하여 감사할수 없을때 침묵하고 그것이 무너지기까지, 여리고가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무너지기까지 충분히 인내할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비가 온다. 그래서 그 어느 산에 올라가지고 무릎 사이로 자기 얼굴을 파묻 고 기도를 했어요. 근데 일곱 번 정도 기도하고 나니까 저 먼데서 손바닥 만한 구름 이 보이는 거에요. 근데 일곱 번이라는게 자기가 일곱 번 해야 보인다 생각해서 한 게 아니라 일곱 번까지 하니까 보이더라는 거에요.
일곱 번을 정해 놓은 게 아니라는 거죠. 그 얘기가 무슨 얘기냐면은?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해야 되냐 이 얘깁니다. 응답이 이루어지기까지 순종하라.
인내하라. 그리고 여리고가 무너지기까지 인내하고 순종하라 그런 얘깁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거.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서 인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내하는 가운데 많은 것들의 생 각이 교차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인내해야 되는가? 언제까 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러나 그런 속에서 하나님은 또 하나님 나름대로의 우리 스스로에 대한 연단을 해 나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낮아지 고 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렇게 해서 나가는줄 믿습니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러죠? 우리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4절 찾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야 고보서 한번 찾아 봅니다. 야고보서 1장입니다. 1장 2절에서 4절 다같이 시작,
“ 야고보서 1:2~4 ”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인내하시되 온전히 인내하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가정에 문제가 터졌다. 다른 집에 문제가 터졌다. 그들을 권고하기를 온전히 인내하십시요. 할렐루야. 그래서 좋은 결과들을 맺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참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삶을 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가 또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모든 것, 우리가 움 직이는 모든 것,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먹고 살고 있는 이 모든 것도 하 나님의 일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여 주시고 또 아버지 하나님!
다시 한번 아버지,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망을 갖고, 또 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처소를 마련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또 저 하늘 나라에 더욱 더 소망을 두며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사옵고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렸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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