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결론
신명기란 책이름은 너무나 즐겁고 기뻐서 ‘신명’이 나는 그런 신명이 아니다. ‘다시’라는 뜻의 ‘申’, ‘계명’이라는 뜻의 ‘命’, ‘기록’이라는 ‘記’로 되어 있다. 영어로는 ‘Deuteronomy’인데 ‘두번째 율법(the second law)’을 뜻한다.
막12:28-31에서 주님은 “모든 명령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묻는 성경기록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님이시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 둘째도 그와 같은 것으로서 곧 이것이니,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명령이 없느니라.” 개역한글 성경은 ‘commandment(s)’란 단어를 죄다 ‘계명’으로 번역했지만, 이러면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게 된다. 오히려 ‘명령’이란 번역이 정확하다. 이 성경기록관은 모세오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명령이 무엇이냐 물었고, 주님은 첫째 가는 명령으로 신6:4-5을, 둘째 가는 명령으로 레19:18의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을 각각 인용하셨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그분도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그분도 우리의 사랑이 필요하시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사랑을 원한다. 본질적으로 사랑이 있는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게서 인격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법이다. 이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명의 본성이자 법칙이다. 물론 우리 사랑이 없다고 하나님이 돌아가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랑 없이 존재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는 게 아닐까! 피조물에게 버림 받은 창조주라…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의미이자 가치여서, 우리에게 그 명령을 주셨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요구를 하실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죄기 때문이다. 그런 이기적인 하나님, 자기중심적으로 똘똘 뭉친 하나님은 결코 사랑도 아니며, 인격적이지도 않고, 다만 우주적인 폭군이자 선천적 애정결핍 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명령을 주셨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도를 초월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퍼부으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지금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이다. 이 명령을 듣고 부담감을 갖는 대신 그분의 사랑을 아는 우리는 이 명령 속에 감추어진 그분의 확증을 발견하고 희열에 차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이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보다 더 속이 타고 더 간절하며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발벗고 나서며 모든 걸 걸고 해결하려는 측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부부에게 아직 자식이 없다면, 자식이 없는 그때 그들의 인생과 미래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식과 실상 무관하다. 그들은 자식에게 매이지도 않고 자유롭다. 그러나 어느날 그들의 사랑의 결실로 아이가 태어나면, 아니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과 아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오히려 부모가 아이에게 매이고 자기의 모든 미래와 꿈은 이 아기로 인해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연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는 날까지 아이에게서 꽁꽁 매여 해방될 수 없게 된다. 그러할지라도 부모는 그들이 가진 생명 때문에 이러한 얽매임을 즐거이 감수하고 일평생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채, 어떤 아이가 태어날 지 모르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아이에게 온전히 매이게 된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내 인생이 망쳤다느니, 네가 원수라느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느니 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자식을 향해 밀려오는 사랑과 애정으로 인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아무리 패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이런 자식이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집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도 그 순간이, 며칠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미움은 어느덧 눈 녹듯 사라진다. 나는 지금 정상적인 경우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난 안 그렇다고 생각해도 그냥 계속 읽으시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래서 난 기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이셨단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 모양과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은 정말 사람에게 자유하셨고, 사람과 상관이 없으셨고, 사람에게 매이지 않으셨지만, 사람을 만드신 이상 이제 하나님은 우리 없이 살 수 없고, 우리와 무관히 사실 수 없고, 우리에게 떠나 사실 수 없고, 우리에게 어떤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분이 앞장 서서 해결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그런 깊고 깊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분의 구속 역사와 방법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럼 신명기는 어떤 책인가? 반복의 책이며, 복습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세는 광야세대(곧 제2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들과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그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귀가 따갑도록 계속적으로 복습시키고 있는 것이다. 광야세대는 애굽세대의 실패를 두 눈으로 목도한 세대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육체와 마음의 정욕을 좇아 산 참혹한 결과를 생생히 기억하는 세대였다. 그들은 역사의 교훈을 반복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우리 역시 역사를 통해 배운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참담한 좌절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는다. 만약 우리가 믿음의 행로에 있어서 오직 우리 자신이 겪은 직접적인 영적 체험만을 받아들이고 따른다면 우린 틀림 없이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미 우리와 같은 상황과 환경을 살아왔던 역사적인 실제 인물들이 있었고, 어떻게 그들이 실패했고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하고 결코 우리에게는 일어나면 안 되는 줄 알고 있기에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교훈 삼아 깨어있어야 하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한다. 바울은 고전10:11에서 “이제 이 모든 일이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고, 또한 세상 끝날에 처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했다.
또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과도 같다.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는 그토록 열망했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주님에 의해 영영 거절된다. 무려 40년간이나 목이 곧고 뻣뻣하며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절한, 애절한 충정에서 우러나는 호소와 간청을 유언의 형식으로 전한다.
신명기의 핵심단어는 4:1의 “듣고(hearken unto the statutes and unto the judgments) 준행하라(for to do them)”이다. 반복적으로 “잊지 말라, 기억하라”고 외친다. 잊지 않기 위해 미간에 손에 문설주에 어디든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읽고 또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라는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반복적으로 외워야만 한다. 반복하고 복습하는 것 이상이 없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도 아주 기본적인 훈련을 반복적으로 계속하는 것이다. 경건의 연습도 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주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시며,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쉴 새 없이 부르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는 경건의 연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결코 쉽게 되지 안으며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일평생을 우리는 매일 매순간 영적훈련을 강도 있게 실천하는데 있다.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었듯이, 신약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말씀이 아닌 감정과 느낌에 우리의 믿음을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신명기에는 또한 이스라엘의 미래가 예언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 조상처럼 실패할 것인가? 이스라엘은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는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들은 철저히 실패했고 그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흩으셔서 끔찍한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 놀라운 이적과 기적과 표적과 능력을 수없이 목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도 여지 없이 실패하고 말았건만, 그들보다 훨씬 못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저주가 아닌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역시 실패하고 말 것이 아닌가! 만약 신약교회마저도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고 마실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실패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을 유일한 하나님의 도구요 군대요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실패처럼 교회도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어떤 차선책이 없으시다. 교회 이외에 어떤 다른 대안이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계획 안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실패자가 아니시고, 실패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원한 승리자시며, 승리 자체이시다.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 결심이 부족해서인가? 정성이 모자랐는가? 그런데 교회는 어찌해서 절대 실패하지도 않고, 실패할 수도 없다고 장담하는 것인가? 왜 나와 당신은 성공하고야 말 것인가? 무엇으로 그것을 보장 받을 것인가?
우선 히8:9-10(KJB)을 보자. “이 새 계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계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그들이 내 계약 안에 거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계약은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곧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리라.” 여기에 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맺게 된 새 계약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생생히 새겨진 것이지, 이스라엘처럼 사람 속이 아니라 사람의 바깥에 곧 의문과 돌비에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들은 그걸 원했지만, 그들로써는 그걸 이룰 능력도 힘도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결심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혀를 좀 살살 깨물어서 그런 것도 아니며, 매일 구호를 외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의롭고 잘나고 뛰어나고 훌륭해도, 자기 자원을 가지고 자기 의를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이스라엘의 실패와 교회(성도)의 성공을 대비하고 또 그 직분들을 대비시켜 잘 설명한 고후3장에 해답이 계속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육의 심비에 한 것이다…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