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글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

하늘이슬 2009. 11. 20. 18:08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 - 오지붕
 

1. 믿음으로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위해서 기도하는 일들은 항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가망이 있을 것이라면 굳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막연하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들이 포기한 중병 환자가 있습니다. 의사들이 포기했으면 이미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틀림 없이 큰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도가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1)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해야 합니다. (2) 주위 환경에 위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본인과 주위 사람들이 나의 기도에 대한 열정에 냉담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읽는 신문에 "2년 동안 혼수상태이던 여인, 의식의 회복하다!"라는 기사가 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베푸실 기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2. 달팽이에게서 배우십시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달팽이가 인내로 방주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속성으로 처리하려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인내가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전자 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누르는 식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고기 양념이 잘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관광객이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이 마을에서 큰 인물이 태어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마을의 어르신께서 "아니오. 어린 아이들만 태어났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처음부터 기도의 용장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품고 조금씩 기도의 시간을 갖다보면 어느 새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의 용사"가 되어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 땅에 중보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쏟아붓는 모든 시간과 눈물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344장의 가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조급하게 느껴지십니까? 지금 달팽이에게 가서 배우십시오.


3. 기도의 용사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만사형통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시간이 왜 필요합니까? 정말로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한 번 구했으면 됐지 왜 자꾸 반복해서 구해야 합니까?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중보(仲保)가 왜 중보기도에 사용되었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입니까? 우리는 사고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언제 응답이 됩니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질문들을 멈추면 안 됩니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멈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해답을 찾기 위해서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기도를 해야 한다는 명령에만 의존해서 기도를 하는 사람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앤드류 머레이나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같은 기도의 사람들처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시간을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용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4.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S. D. Gorden의 말입니다: "당신이 기도한 후에는 기도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하기 전에는 기도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는 일 말고는 이 땅에서 어떤 일도 행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가진 능력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부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치유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견고한 진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들이 괜히 가져보는 소망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갖는 믿음입니다.

이 엠 바운즈는 "하나님께서 기도로 세상을 조성해 가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기도가 많을수록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며, 악에 대항하는 힘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자본이며, 그분의 대의 성공 여부는 기도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위에 기록된 말들처럼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많은 일을 하게 해주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망들을 구체화시켜줍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까닭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5. 우리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영자, 칭지기, 또는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중재자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이 땅의 소유권을 부여받았던 것이 아니라 땅을 통치하는 책임을 위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파수꾼 혹은 관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다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모습을 두시고 그 모습이 환영처럼 만물에게 보여지게 하셨습니다: "잠시 나는 그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아담이었다."

"피조물들이 아담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이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누구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환영을 아담이나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특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말씀과 기도 뿐입니다. 말씀에 비쳐진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분을 닮아갈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하나님의 환영을 우리 삶 안에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런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6. 손과 혀와 발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은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신실한 남녀를 찾고 계십니다. 치유를 위해서 그들의 손을, 말씀을 위해서 그들의 혀를, 활동을 위해서 그들의 발을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을 성취할 사람을 필요로 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지난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서 다시 비가 오도록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엔드류 머레이가 말하는 기도의 필요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간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길 능력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것은 오직 중보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까닭에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통해서 일을 하시기를 원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자원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중보기도를 시작하십시오.


7.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멸망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누군가 그 악인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막아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을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사람들을 찾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머금고 악인을 멸망시키시는 것입니다.

피터 와그너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역사에 영향을 끼칠 만한 결정들을 인간이 내릴 수 있도록 허용하신다... 인간의 무활동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무효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를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소용 없게 만들 수는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우리의 기도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잭 헤이포드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 손잡고 이 땅에 그분의 구속 목적을 실현하는 동반자적 사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에 의해서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귀하고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특권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죽어가는 생명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특권을 마다한다면 우리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니느웨로 가기 원하십니다.


8.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것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것을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중보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이 기도 가운데서 할 수 있는 어떤 일"입니다. 바로, 대표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계획, (2)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그 계획의 좌절, 그리고 (3)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면 (1) 중보가 무엇인지, (2)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중보의 의미를 요약하면 "서로 다르거나 다투는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보는 우리의 삶 가운데 매일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매일의 삶 가운데서 누군가를 대표하고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창조로 초점을 돌려서 아담이 하나님과 창조물들 사이에서 행했던 일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뜻하시는 바를 말씀해주셨고, 아담은 창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시대가 지난 후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런 일을 감당했고, 이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9. 중보의 바른 이해
첫 사람 아담은 중보자로서의 사명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보내셔서 그가 망쳐놓은 일을 회복시키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를 때, 이 말은 곧 그 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다시 보여주시기 위해셔 오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8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는 다른 한 가지 사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중보가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금 나타내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로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아무개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곳에 있습니다. 자신의 공로와 의를 힘 입어서 온 것이 아니라 제가 그를 위해서 죽음으로 인한 공로와 의를 힘 입어서 아버지 앞에 나왔는데 그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16:26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입니다.


10.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분배하던 제자들을 기억하십니까? 이처럼 우리의 일은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를 여섯 개로 만들 수도 없고, 물고기의 크기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분께서 하신 것을 나눌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안 계신 곳에 보내심을 받아 그 분을 드러내는 중보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물고기와 떡으로 기적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분배하는 일을 하게 하셨으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그 일을 감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중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우리의 음성과 손과 발과 육체가 되어서 그 분이 행하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믿어드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할 때, 나의 권위와 능력은 완전히 무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11. 예수님을 드러내십시오
우리가 중보자로서 해야 하는 일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분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합당한 믿음으로 그 분께서 이미 하신 일들을 드러냄으로써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믿음의 분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지만,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초점이 예수님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 분의 대표자일 뿐이고, 단지 그 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귀신 들려 해를 끼치는 소녀를 치유하는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치유해 놓으신 그 소녀를 사람들 앞에 소개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중보 기도는 이미 성취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현실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이미 해놓은 일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 분의 일을 세상에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무슨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되어진 일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유케 하신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12. 만남
만남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즐거운 만남이 있는가 하면 불쾌한 만남이 있습니다. 행복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비참한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에는 대개 결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사랑하고, 결혼을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야구공과 앞니가 만나면 앞니 두 개를 잃는 결과를 낳습니다.

중보는 만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말씀 드리는 바처럼 중보는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이며, 그 행위는 바로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우리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긍휼(자비, 친절, 사랑, 용서)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진리(완전,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화평(안전, 온전함, 안식)만을 대표하시는 분이 아니라, 화평이 존재할 수 있는 의(거룩, 순결)가 되는 분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단번에 이루시고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주신 중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아직 십자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바로 그 만남의 주역들로 삼으셨습니다.


13. 중보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누군가 아픔으로 인해서 고생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다 마치지 않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만남이 바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은 치유를 낳습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자들의 착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바른 중보를 통해서 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만 이루어진다면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는 역사들은 지금도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들은 우리가 만남을 통해서 얻는 승리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떠나 사단과의 만남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암울한 만남 사이에 들어가서(intercession) 그 만남을 깰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중보입니다.

앞에서 만남 중에는 불쾌한 만남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닌 모든 만남은 바로 불쾌한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끊고 하나님과의 행복한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 온전한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지금부터 기도의 모임(만남)을 시작하십시오.


14. 중보자가 해야 할 일
중보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사람들의 짐을 함께 져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짐을 멀리 옮겨주어야 합니다. 우리로 인해서 누군가 넘어지지 않는다면 아주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비워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재키 로빈슨은 흑인 최초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였습니다. 그는 경기 내내 야유를 들었습니다. 경기 도중 작은 실책 때문에 더욱 심한 야유를 듣게 되었는데 리스라는 선수가 자신의 팔로 재키 로빈슨의 어깨를 감자 관중들의 야유가 멈추었습니다. 나중에 재키 로빈슨은 자신의 생애를 구한 팔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한 아이가 너무 심한 거짓말을 한 까닭에 삼일 동안 다락방에 갇히는 벌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벌이라고 생각하게 된 아버지는 자신의 이불과 베개를 들고 다락방에 올라가서 삼일 동안 함께 생활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불과 베개를 들고 오신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 같습니다.

두 일화에서 배운 교훈처럼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2에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의 짐을 함께 질 뿐 아니라, 그 짐을 멀리 옮겨주는 크리스천들로서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15. 우리들의 몫 (1)
골로새서 1:24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몫"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위해서 영원한 제물이 되셨지만 (히 10:12), 가시고 없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그것을 드러내는 일을 절대 필요로 합니다.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중보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중보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의 짐을 져야 합니다 (롬 15:1; 갈 6:2).

예수님은 길르앗의 향료이십니다 (렘 8:22). 그러나 그 치료약을 사람들에게 발라주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샘이십니다 (렘 2:13). 그러나 그 생명수를 떠서 나눠주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 분의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지만 (시 23:4), 그 막대기를 내미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합당한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일꾼은 무엇인가 베푸는 사람입니다. 바로 새 언약의 축복과 양식을 베푸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역사들을 친히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삶에 알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16. 우리들의 몫 (2)
여호수아는 예수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름이 주는 연계성처럼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전형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여리고에 입성했고, 예수님께서 원수를 무찌르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동맹인 기브온 족속을 괴롭히던 다섯 족속을 완전히 무찌르기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다섯 족속을 무찌르고 전통에 따라서 그들의 왕들의 머리를 짓밟는 순간에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군사 몇 명을 불러서 그 일을 대신 하게 했습니다. 그 영광을 군인들에게 양보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일종의 예언자적 메시지로서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실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19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원수를 무찌르시고 승리를 얻으신 후에 그 원수의 머리를 밟음으로써 승리를 확인하는 그 영광 자체를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해 놓으신 모든 일을 우리가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는 특권이고, 보다 차원이 높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인 것입니다.


17.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
어떤 아이가 매번 같은 잘못을 반복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잘못을 반복했습니다. 그 날도 여늬 때처럼 같은 잘못을 반복한 채 무거운 발걸름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벌로 빵 한 조각만 주셨습니다. 남들은 맛 있는 고기를 저녁으로 먹고 있었는데 자신의 접시에는 빵 하나만 달랑 올려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이 흐르려고 할 즈음에 아버지께서 자신의 접시에 있는 고기와 다른 음식을 덜어주셨습니다.

어른이 된 어느 날,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 해주신 일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희생과 사랑과 이해를 요구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런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이는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대표하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 분을 대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분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18. 기도는 방어막입니다
중보라는 말에는 "경계"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방어"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써 중보기도는 곧 방어망을 구축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여러 모로 믿는 사람들을 공략합니다.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당하도록 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호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를 통해서 보호막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께서 아침 기도를 드리던 중에 더욱 많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다른 날에 비해서 한 시간이나 더 기도를 드렸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기도의 필요성 때문에 그 날 아침에는 세 시간의 기도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잔디를 깎으시다가 방울뱀에게 물리신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성령님께서 강권하시는 바람에 다른 날보다 두 시간이나 더 기도하시게 되었고, 그 기도가 목사님의 다리에 방어막을 형성했기 때문에 방울뱀이 다리를 물지 못하고 두 번이나 다리를 스쳤던 것입니다. 삶 가운데 기도의 필요성이 느껴질 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계속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19. 지속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한 번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는 지속성이 필요한 데 이것은 곧 우리가 전능자의 보호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고 매일 읽는 것처럼 기도 역시 매일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속성은 기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2차 대전 당시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매일 다른 병사들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했습니다. 하루는 적기가 갑판에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폭발하지 않고 고무공처럼 튀겨 나가서 바다에 빠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계속해서 전쟁 때마다 그들이 탄 배가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기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간증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서 매일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보호막을 형성하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기도를 드릴 수도 있으나 삶 속에서 특별한 경우에 특별하게 기도를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일반적인 상황을 위한 것이든, 특별한 상황을 위한 것이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서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20.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실 때 (1)
어떤 분이 기도를 드리시다가 환상 가운데서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방울뱀 한 마리가 아버지의 다리를 휘감고 있는 환상이었는데 아주 절박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약 15분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방울뱀에 대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 가족이 회오리 바람 안에 갇혔습니다.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지는 상황 가운데서 그 가족은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마치 하나님의 팔이 그들을 꼭 안고 있는 것처럼 안전함을 주셨습니다.

무엇인가 불길한 사실을 느낀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반대 방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아들이 약 15미터 공중으로 치솟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어머니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사고 지점으로 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아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특별한 순간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환상을 이용하시기도 하고 느낌을 이용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때는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고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시려고 우리에게 특별한 기도를 요구하시는 순간인 까닭입니다.


21.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실 때 (2)
어떤 목사님께서 꿈을 통해서 자신의 딸에 대한 죽음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죽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단이 그 딸 앞에 죽음의 올무를 쳐 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일을 하시면서도, 걷거나 운전을 하시면서도 기도를 통해서 따님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막을 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기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제 딸을 당신께로 데려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사단의 올무로부터 제 딸을 구원하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막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제 딸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다른 이의 짐을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아, 내가 너의 계획을 묶고 이 상황에서 네가 쥐고 있는 모든 권세를 깨뜨리노라." 이것은 원수와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노라." 이것은 예수님의 승리를 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여의 기도 후에 그 따님은 승진과 함께 신체검사를 요구하는 생명보험증서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따님의 신체에 칼륨이 없어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따님은 치료를 통해서 건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적인 기도를 시키기도 하시지만, 이렇게 시간을 두고 기도를 시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께 기도를 통해서 따님의 보호막을 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22. 우리의 역할
과테말라로 선교 여행을 떠난 한 선교팀이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스케쥴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비행기 스케쥴이 잘못 되어서 원하는 시간에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팀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에 비행사와의 오랜 실갱이 끝에 겨우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그날 밤, 엄청난 지진이 과테말라 시를 덮쳐서 불과 34초만에 3만명이라는 인명을 앗아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선교팀은 모든 일과를 마친 후 지진이 발생한 그 지역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비행사가 소개해준 호텔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호텔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선교팀이 비행사와 실갱이를 하던 즈음에 모교의 한 여자분이 약 세 시간 동안 선교팀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여자분에서 중보 기도를 하라고 강권하시는 바람에 조금도 쉬지 않고 세 시간 동안 중보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여자분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삶 속에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런 기도의 소원을 두시고 힘 있는 기도를 드리게 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지존자의 보호막을 형성해주십니다. 중보기도가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23. 우연과 섭리
중보는 "우연히 마주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28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형 모르게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새벽 미명에 집을 떠났을 것이고 밤을 맞이해서 쉬려고 했으니까 꽤 피곤했을 것입니다.

너무 어둡고 피곤한 까닭에 좋은 장소를 찾아 헤맬 시간조차 없었을 것인데 잠을 청하려고 우연히 정한 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실 곳이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우연히 선택한 장소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야곱을 만나주실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가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야곱이 벧엘에 한 밤을 묵게 된 것이 그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중보는 우리의 지혜나 결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로마서 8:28의 말씀을 조금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보는 우연히 마주친 듯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우연을 올바른 때와 장소로 사용하십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에서 묵게 하신 것처럼,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것처럼, 하늘 문이 열린 것을 보게 하신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중보의 시간을 통해서 야곱이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24.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십시오
우리가 삶 가운데서 기적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기적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을 짓기 때문에 늘 우리 삶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상황들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셔드리기만 하면 많은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기적에 대한 기대조차 없이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 현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속에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분께서 행하실 기적을 기대하지 못하고, 이런 일들을 가능케 할 바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성령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여쭈십시오. 그 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 지를 알게 하실 것이며 때에 따라 성경 구절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25. 중보의 힘
어떤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고 계시던 중에 "설교를 멈추고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 음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강단 위를 걸으며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자신의 설교를 들으시던 교우들께 양해를 구한 후의 일입니다. 교우들은 궁금해 하며 목사님의 기도 모습을 조용히 보았습니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0분이 지났을 즈음 한 여자분이 목사님 앞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 분의 따님은 선교사님이셨는데 선교지로부터 따님께서 3일 안에 죽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으셨답니다. 병원으로 후송되려면 적어도 2, 3주 걸리는 곳에 계셨습니다.

그 따님께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그 마을의 방언으로 "당신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딸이 치유받았습니다"라는 말을 가르쳐주셨는데 목사님께서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 분의 따님은 완전히 치유받으셨는데 이것이 바로 중보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키셨다면 왜 20분이나 기다리셔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비가 힘 없이 날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그 목적지에 늘 도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기도는 우리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 날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20분의 설교보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26. 다리를 흔드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말에는 "함께 대적하여 붙잡는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무능함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정확히 인도하셔서 그 기도가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실 뿐 아니라, 그의 힘을 우리에게 공급하셔서 그 상황을 붙잡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성령님을 의존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우리를 통해서 기도하시도록 허락하면, 그 분은 우리와 함께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함께 대적하여 붙잡다"라는 말에는 우리를 대신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쥐 한 마리가 코끼리와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다리 중간에서 무게 때문에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다리를 다 건넌 후에 쥐가 코끼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리를 흔들리게 했지, 그렇지?" 우리가 성령님께 다리를 함께 건너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를 틀림없이 다리를 흔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심에 있어서 어떤 조건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 새 언약의 축복을 시행하도록 부르심과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쥐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성령님과 함께 다리를 흔들게 될 것입니다.


27. 하나님께서 문제를 만나주실 때
더치 목사님께서 성령님과 함께 다리를 흔드셨던 일을 소개합니다: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난소에 계란 만한 낭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의사 선생님과의 의논 뒤에 두 달 동안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동안 인내의 치유에 대해서 배우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사모님께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대부분의 기도의 응답은 즉각적인 기적이 아니라 믿음과 인내의 선한 싸움으로써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매일 한 시간씩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매일 같은 기도를 한 달 이상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손에 낭종을 들고 그 안에 있는 생명력을 짜내버리는 장면을 환상 가운데 보시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의 신체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물었을 때 사모님께서는 통증이 가라앉고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낭종의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환상을 반복해서 보실 때마다 사모님의 병환이 점점 호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세 번째 환상 후에는 기도를 멈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서 "함께 대적하여 붙잡는" 사건을 친히 행하신 까닭이었고, 하나님과 사모님의 문제가 "만나"는 역사를 친히 체험하신 까닭입니다.


28.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가지고 있는 효력을 우리가 발생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적절한지, 무엇이 합당한지 모른다고 해서 위축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 맡기면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돕고 계신 성령님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십시오.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는 우리는 다리를 흔들 수 있습니다. 수 많은 만남들을 주선할 수 있습니다. 수 많은 벧엘의 사건들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혼자서 고민에 빠져 있지 마시고, 성령님의 힘과 지혜를 이용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을 통해서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느끼기 전까지는 그늘 밑에 있는 크리스천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움직이셨을 때, 그들은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혹시 아직도 이것을 하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크리스천으로 살아오셨다고 하더라도 중보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셨으면 절대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고 없는 하늘 아래에서 이제는 우리들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29. 해산의 수고
성경에는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시편 2:8에는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만 국한된 것임을 잘 압니다. 추수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간구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꾼을 위한 기도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가 없이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기도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이며,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서 영혼 구원이라는 아름다운 일들을 친히 이루십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해산의 수고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라는 말이 아주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이런 일이 실제로 나 자신에게 일어나면 이 말에 대한 모든 이해는 그 경험 하나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한 소년이 구원 받지 못하신 숙모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소년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 주간이 마쳐지기 전에 그 숙모님께서는 그 소년이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고 싶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갑자기 북받치는 감동으로 거의 한 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면, 그것을 해산의 수고라고 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 없이 태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30. 해산과 중보
아내의 해산을 세 번이나 도왔던 저로서는 해산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가 필요한지 잘 압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해산의 수고에 비교해 볼 때, 해산의 중보 기도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위해서 힘이 들고 아픈 것처럼 중보 기도에 그런 수고가 필요합니다.

해산의 수고는 모든 여성이 다 가질 수 있는 특권이지만, 모든 여성이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 역시 모든 크리스천들이 다 가지고 있는 특권이지만, 모두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영혼을 위한 중보 기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이유들을 하나로 묶어 보면 너무 힘이 드는 일인 것에 반해서 응답이 자주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영혼을 위한 중보 기도에 비교해 보았지만, 실제로 중보 기도가 해산보다 더 힘든 것은 중보 기도에는 아무런 증거나 표시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는 뭇 여성들이 해산의 긴 수고와 큰 아픔을 마다 않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처럼 한 영혼의 영원한 삶을 위한 일이므로 영혼을 위한 중보를 간절히 소망하는 크리스천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부터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언제 응답될 지 모르는 해산의 수고를 시작하시기를 바라니다.


31. 기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우리는 대개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예배당 안에서 손을 모으고 무릎을 끓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가 길을 걷거나 설겆이를 할 때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중보 역시 형식이나 장소를 떠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며, 영적 해산 역시 이런 모습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도에 대한 오해일 수 있는데 이런 오해는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심하게 울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런 눈물 없이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기도가 훨씬 더 경건하고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실수가 일어나는 것은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조차도 육신적으로 보이는 것에 의해서 판단하려는 경향"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우리가 육신적으로 보이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중보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것입니다.

중보 기도에 앞서 기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합니다. (1) 기도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2) 어떤 현상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대로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32. 반드시 응답됩니다
요나단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아이였지만, 17세가 되면서 사단의 교묘한 궤계로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약과 심한 당뇨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그 아이는 몰래 병원을 뛰쳐 나가 다시 마약에 빠지기 일수였습니다. 그 때 중보 기도에 대해서 배우면서 그것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이 가는 곳마다 함께 가셔서 그 아이 안에 생명을 출산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요나단을 위한 합심 기도는 어떤 때는 4시간에서 6시간 동안 지속되기도 했는데 저희는 이 기도와 함께 요나단을 위한 영적 전쟁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요나단의 친구들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4년 여의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정돈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그의 여자 친구도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집회를 통해서 요나단과 그의 여자 친구가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도는 틀림없이 산고의 기도였습니다. 한 영혼의 중생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산고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빠른 시일 내에 응답되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33. 해산하는 수고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비가 내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삼 년 반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환에게 비의 흔적이 있는지를 일곱 번이나 물으며 계속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엘리야의 간절함과 그의 기도 자세는 바로 여인이 출산할 때 갖는 간절함과 자세입니다. 야고보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간절한 기도"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약 5:16). 시편 126:5~6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로 이해 됩니다.

이사야 66:7~8에는 "구로한다"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여인이 출산하는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죽음이 소개되어져 있는데 그의 죽음을 보시고 슬프게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기록된 겟세마네의 기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로마서 8:26~27에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해산하는 수고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19에는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 해산하는 수고는 우리 성도들이 중보를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몫입니다.


34. 성령님의 중재가 필요한 까닭
엘리야는 인간으로서 비를 출산하거나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는 그가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중생시키거나 성숙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19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의 중보가 그들의 중생과 성숙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수고를 통해서 영적인 아들과 딸을 생산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66:7~8에 의하면 우리의 해산의 수고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출산을 가져오는 중보기도 가운데 성령님께서 출산을 행하실 수 있도록 전적으로 맡겨 드리면 모든 일들은 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실제로 이런 일들을 행하시므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출산해내는 기도가 존재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2에 기록된 성령님께서 운행하신다는 사실은 바로 성령님께서 공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무엇인가를 덮는 모습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인가를 출산해내시는 모습입니다.

시편 90:2은 창조시에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이 바로 출산이라고 소개하는데 성령님께서는 과연 모든 것이 생겨나게도, 잉태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출산을 위해서 기도를 드릴 때는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와 중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안에 성령님께서 실제로 중재하고 계십니까?


35. 성령님이여, 머물러 임하소서!
창세기에서 땅과 하늘을 낳으셨을 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자녀들을 낳는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속박을 깨뜨리며, 비밀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자신에게 이끌어 오셔서 그들 안에 새로운 창조의 사건을 일으키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남동생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12년 동안 기도하던 여자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출산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배웠고, 그것을 자신의 중보기도 속에 적용시키면서 약 두 주 후에 남동생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른 기도 탓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황무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천지창조 이전처럼 땅이 공허하고 아무런 생산의 능력이 없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 위에 머물러 임하시자 곧 그들의 삶 가운데 생명과 능력이 역사하시게 되어서 두 사람이 자녀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 기도를 드리실 때는 성령님께서 그 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출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영혼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중보 기도 가운데 성령님께서 그 영혼 위에 머물러 계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곧 그 분의 출산을 장려하는 기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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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약에 중독되었을 뿐 아니라, 무질서한 식습관과 무분별한 가족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당연히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캐롤이라는 한 여자분께서 두 사람을 임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캐롤은 두 분을 위해서 몇 달 동안 기도했습니다.

몇 달 후에 캐롤은 강한 출산의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캐롤의 영적 산고를 통해서 성장과 성숙의 시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산고의 중보기도는 "무엇인가를 생산, 창조, 또는 출산하기 위해 성령의 창조적인 능력이나 에너지를 어떤 상황 속에 쏟아붓는 중보 기도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치유의 역사를 행한 것(행 5:15)이나 엘리야를 통해서 비가 내렸던 것(왕상 18:45)들은 모두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