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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짐승의 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

하늘이슬 2017. 8. 20. 13:48

짐승의 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는 베리칩의 등장을 짐승의 표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 아주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최근 예장합동에서 베리칩을 '짐승의 표'로 간주하고 그것을 받는 자는 구원에서 끊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광신이데올로기를 추종하거나 억지스러운 해석을 하는 극단적 종말론 주의자들로 인식하고 배격하기로 결의 했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국교회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로 교단이 그런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그 주된 핵심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를 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의 표를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원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고 시대마다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에 동조하는 배도적인 행위라고 규정하여 베리칩을 '짐승의 표'로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 없고 허왕된 주장이라고 밝혔다.

 

과연 그런 주장이 옳을까? 요한계시록이 일반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본문을 상징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있고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짐승의 표'라는 부분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짐승'이라는 것이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짐승의 표' 전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는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때 전후 문맥과 그 해석이 자연스럽다. 그것이 상식적인 해석이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계시록 13장의 '짐승의 표'를 상징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에게 문자적인 해석의 당위성을 밝히고 싶다.  

 

만일 '짐승의 표'가 상징이라면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하고"(계 13:16)에서 "받게 하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수여자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서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배도의 의지라면 왜 굳이 받게해야 하는가? 그리고 또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계 14:9)라고 기록하고 있다.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인데 "받으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상징적인 것이라면 수용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받으면"이 왜 필요한가?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단에게 자신의 의지를 드리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굳이 표를 받아야 한다고 서술해야 할 이유가 어디있다고 보는지 묻고싶다. '짐승의 표'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면 수여자나 수용자의 의지를 나타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 뿐인가? 성경은 분명히 표를 받지 않는 자들에게 "매매를 못하게 하니"(계 13:17)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징으로 이해해서 '짐승의 표'를 마귀에게 자신의 의지를 드린 영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것으로 가시적인 물건을 매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원어는 '아고라사이' 와 '폴레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물질적 상거래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이 단어들이 영적인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없다. 용어 자체의 의미 그대로 물건을 매매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본문은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녀 '오른손'은 행위를 의미하고 '이마'는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인격을 의미하는 '이마'라는 부분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굳이 "in their right hand"라고 하여 '오른손'이라고 특정한 신체 부위를 언급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마'하나로 충분한 것을 굳이 '오른손'이라고  하는 특정한 부분을 첨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짐승의 표'가 상징이라면 왜 계시록 13장 18절에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라고 기록하였는지 묻고 싶다. 상징적인 의미라면 굳이 "calculate"라는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숫자를 세어보라는 것이지 상징적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천년 교회사 가운데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때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와 모든 조건을 일치시켰던 것이 있는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위의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 베리칩에 대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21세기 과학 문명의 산물"이라거나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는 터무니 없는 허왕된 주장"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때 성경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 베리칩을 한 번쯤은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지금이 진짜 마지막 시대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베리칩 하나만 등장했다면 그것을 가리켜 '짐승의 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징후와 아주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베리칩'을 '짐승의 표'가 될 것이라고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마지막 시대의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진중하자. 형제가 형제를 정죄하지 말고 다른 해석에 대해 존중하며 지켜보자 베리칩이 '짐승의 표'인지 아닌지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충인교회 이정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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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칩과 666’에 관련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 정리의 건”

 

베리칩을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의 표”로 간주하고, 그것을 받는 자는 구원에서 끊어진다는 주장은 해당본문에 대한 오해와 광신이데올로기, 그리고 주관적인 상상력에 지배를 받은 억지스러운 해석의 결과이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을 살펴보면 짐승의 표와 베리칩 사이의 몇 가지 피상적인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짐승의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 것(계 3:16)과 베리칩을 오른쪽 어깨관절이나 손등에 이식한다는 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만 매매활동을 보장하는 것과 베리칩이 결재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짐승의 표 666을 게마트리아를 통해 숫자풀이 하면 컴퓨터를 가리킨다는 점 등이 소위 베리칩 선지자들이 내세우는 주요한 유사성이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은 해당 성경 본문의 정당한 해석에 따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허황된 주장이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적실성을 갖는다는 계시의 보편적 성격에 입각해서 짐승의 표를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배교와 같은 종교적인 이슈가 개입하는 계시록의 상징적인 언어를 해석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짐승의 표를 21세기의 과학문명의 산물인 베리칩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짐승의 표는 요한의 계시록의 수신자인 1세기 교회의 신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였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고대의 참 신자들이 박해를 받던 역사적 상황에서 짐승의 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 한다.

 

역사적인 콘텍스트 안에서 본다면 짐승의 표는 분명히 절대적인 권력자였던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과 숭배를 뜻하는 외적인 표였다. 실제로 표라는 말은 당시 로마황제의 이름을 명시한 공식문서에 찍는 인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짐승의 표란 하나님의 지위와 영광을 찬탈하고자 하는 사악한 시도에 동조하는 행위를 드러내는 외적인 증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짐승의 표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의 외적인 표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으로 각각의 시대마다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나 배교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단지 과거 기독교 박해시대에 등장했던 독재적 인물과 연계하여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시대의 기술문명의 이기(利器)와 동일시하는 것은 더 더욱 터무니없는 시도이다. 그것은 지상교회가 영광에 들어가기 전까지 직면하게 될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의 위협이나 배교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출현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믿음에서 멀어지도록 유혹하고 우상숭배로 이끌어 들이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신학적인 의미와 동떨어진 어떤 새로운 기술 자체를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와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짐승의 표를 가시적이고 물질적 원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믿음에는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원리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믿음은 오직 성령의 부르심과 중생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양심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원리와 동일시 될 수 없다.

 

베리칩을 비롯해서 바코드, 컴퓨터, 혹은 신용카드 등은 모두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기술문명에 속한 그것들 자체는 선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도 아니며 믿음의 도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현대적 기술문명의 혜택을 입는 것을 배교 내지는 배교로 이어지는 전단계로 단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을 성경에 더하는 것이다.

 

교회는 베리칩과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과거에도 그랬듯이 ‘짐승’으로 일컫는 정치적 군사적 독재자가 또 다시 일어나게 되면 세상은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짐승에 복종하는 자들과 그것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참된 신자들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 때 하나님 외에 다른 지상의 권력자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들을 숭배한다면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는 자들이다. 짐승의 표의 본질은 배교적 복종이다.

 

그러므로 본 교단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베리칩을 동일한 것으로 연관 짓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666과 베리칩을 연관 지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배격하기로 한다.

 

 

출처 : 성경의 예언
글쓴이 : 빛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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