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집회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

하늘이슬 2021. 1. 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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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10:19:20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

 

권호덕 교수

약력:

-총신대학교 신학과(BA)

-총신대학교 신대원(M div. eq.)

-독일 뭔스터대학교 신학석사(Mag. theol.)

-뭔스터장로교회 개척및 목회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역임 (은퇴)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역임

-현재 콜부르게학파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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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과자를 먹으면 영계가 열린다 라는 박유신 목사가 쓴 글에 대한 반박:

 

박유신 목사의 비판글:

“이 두 책을 다 읽은 후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과연 서사라 목사가 체험했다는 내용들이 과연 진실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었을까라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도록, 자신의 영을 온전히 부어 만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고, 그리고 이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계시를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상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전하셨다(히 1:1-2).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 정직하고 겸손한 신앙인들을 직접 지도하고 계신다(요 14:25-26).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열어서 보여주시고, 성령님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지각할 수 있도록 우둔한 마음과 눈을 열어주신다. 그러므로 이 성령님의 내적 조명과 이 하나님의 말씀이 병행되어 신앙인은 인간이 알아야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것은 천국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써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 없다. 그것은 천국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 천국을 알리기 위해 성경 외의 또 다른 수단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하기 힘들다.”

 

박유신 목사의 말에 대한 권호덕 교수의 반박:

박유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런데 서목사가 천국과 지옥을 본 것을 마치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일방적인 비판으로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주만물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무엇이며 어떻게 타락했고 구원받고 영원복락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로드맵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을 많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매우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다만 인간의 언어가 제한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정보만 전해준다.

박유신씨는 이런 영적인 체험을 전혀 믿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져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런 염려하는 것은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속에는 이런 체험을 하고 심지어 책을 저술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신학자들 가운데도 이런 체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는 도구로 사용함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체험들이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서 목사의 경우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無誤)한 말씀으로 믿는 신학전통에 서 있다. 그녀가 천국과 지옥을 체험한 내용은 성경의 복음을 전하는 보조용으로 사용할 뿐이다. 서목사의 책을 읽고 또는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천국가기 준비한다는 보고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시대가 악하여 인간이 강퍅할 때는 하나님은 이런 처방도 사용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박유신은 서목사가 쌀과자를 먹고 영계가 열렸다는 것도 회의적으로 보이나 성경에는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떡을 먹여주시고 이들이 눈이 밝아져 주신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던 기사도 있다(눅 24장).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목사가 천사가 준 과자를 먹고 영계가 열렸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것은 서목사가 개인적인 체험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신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체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2. 서사라 목사의 계시록 이해는 상상의 산물인가? 라는 박유신 목사의 글에 대한 반박:

 

만일 박유신이 이런 영적인 체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사라 목사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그는 한편으로는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천상의 주님과 성경의 저자들을 만나 해석하기 힘든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그의 해석이 성경 전체를 꿰뚫어 거기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해석은 전천년기설적이고 문자적 7년 환난에 근거하여 해석한다. 형식적으로는 세대주의적 전천년기설에 유사하나 그 내용은 달리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은 전문가들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서 목사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면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이 책 을 저술한 것이지 자기 이성(理性)으로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서목사가 체험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하나의 조작으로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목사는 분명히 하나의 전도자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언급했다. 그런 체험을 책으로 저술했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여 간증하여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쉬운 것도 없는데 이단으로 낙인찍히며 조롱을 받을 일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와 연관하여 박유신은 서목사의 삼위일체론과 666이 베리칩이라는 주장을 비판한다.

-여기서 박유신은 서목사가 설명하는 삼위일체론을 문제 삼는다. 그는 서목사가 양태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비판한다. 그런데 서목사는 보좌에서 큰 소리를 내시는 분과 어린양을 구분한다. 서목사의 표현 중에 “그가 곧 내니라”는 것은 사역 기능 측면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승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너무나 밀착되어서 승귀 이후에는 한 분 같이 일하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께서 지금도 땅에서 일하시는데 자기와 밀착되어 계신 성령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요한복음의 설명처럼 성부와 성자가 너무나 밀착되어서 성부와 성자가 늘 함께 일하심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단지 보좌 앞 일곱 영에 대한 서목사의 해석은 신학자들의 의구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기존 신학자들은 보좌 앞 일곱 영(靈)으로 성령으로 보나 서목사는 일곱 천사로 본다.

-666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 동안 많이 논의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6이 7에 비해 모자라기 때문에 사단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보다 한수 처진다는 식으로 대충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러는 단순히 목장주가 자기 소 등에 쇠로 된 인(印)을 찍는 표시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구원 사건과 연관하여 이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이치에 더 맞을 것 같다. 구원이란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육신의 정욕에 빠져 그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마귀를 위하는 쪽으로 살았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중생(重生)과 회심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ㄲ레로 향하는 사건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무죄선언을 받는 것인데 이 선고(宣告)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멸망으로 가는 것은 이 방향을 다시 마귀와 세상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그 동안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베리칩은 독재자의 마음대로 인간의 감정을 조종하여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향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즉 구원 사건의 반대현상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이 칩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 유전자와 결합한다면 적그리스도적 독재자의 조종을 받아 그의 종 또는 마귀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베리칩의 이런 기능을 설명하는 영화(킹스맨)가 나와서 이해를 돕는 것 같다. 따라서 베리칩을 666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무리가 아닌 해석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동안 신학자들이 이런 주제를 연구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기피한 점이다.

 

 

서영곤 교수

약력: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공과대학 컴퓨터공학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박사

-미 캘리포니아 센트럴대학 목회학석사(M.Div.)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Th.M.)

-예명대학원대학교 신학박사(Th.D.)

-현, 아름다운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주)국민일보 기획부장, (주)대교 교육정보연구소장 역임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장 및 교수 역임

-한양대, 백석대, 성결대 겸임교수 역임

-KCU(한국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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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 비판에 대한 변해서

 

1.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한 다섯 편의 비판 글 중에서 <네 번째 것: 성밖으로 가는 목사, 지옥으로 가는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5가지 주제로 변해(辨解, Apology)하고자 한다.

 

#1. 요한계시록 3:5에 의하면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진다.

 

#2,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목사는 이기지 못한 자로서 모두 ‘성 밖’에서 고통 받는다.

 

#3. 타락한 목사들은 ‘지옥’에 처해진다.

 

#4. 히브리서 6:4-6은 한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들에 관한 말씀이다.

 

#5. 이기지 못한 목사들이 가는 ‘성 밖’은 요한계시록 22:15의 예루살렘 ‘성(城)밖’이다.

 

 

2. 위 주제에 대한 [박유신 목사]의 비판과 [서사라 목사]측의 반박성 변해

 

[비판 #1]: 성경 계 3:5에 의하면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진다.

 

서사라 목사는 요한계시록 3:5의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잘 못된 해석으로 적용한다.

☞ 성경 오역과 임의적 해석문제: 인용된 성경 계3:5의 ‘액살레입소’(ἐξαλείψω)에 대한 바른 해석은, ‘지워진다’는 뜻이고 ‘흐려진다’는 의미는 전혀 없는 것이다(#1). ‘이기지 못하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진 자로서 ‘성 밖’에 처하게 된다는 임의적인 해석(#5)을 하고 있다.

- “흐리지 아니하고”에서 ‘흐리지다’로 번역된 원어 ‘액살레입소’(ἐξαλείψω)는 ‘닦아내다’, ‘지우다’, ‘제거하다’의 뜻으로서 ‘흐려지다’, ‘희미해지다’라는 의미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 모든 번역본 성경에서도 하나같이 ‘액살레입소’를 지우다, 제거하다, 삭제하다의 의미로 번역한다. 생명책에 있는 이름 중에 흐려지는 이름이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렇게 이름이 흐려진 사람들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것이다.

 

[비판 #1]에 대한 변해: 계 3:5의 ‘액살레입소’(ἐξαλείψω) 해석은 지우다, 제거하다는 본래의 의미가 맞는 것이다. 하지만 한글로 번역 과정에서 ‘지우다, 제거하다’를 강조하여 ‘흐려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서 실재로 여러 한역 성경에서 서사라 목사가 적용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팩트(Fact)이다. 오히려 강조법으로 번역된 것이 더 주님의 확고한 심정을 잘 느끼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영어의 {Blot ~ out}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지우다, 희미하게 만들다’ 로도 함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을 것이다.”와 “~생명책에서 결코 흐리지도 않을 것이다”는 동일한 의미(은유법: 원관념과 보조관념)로 보아야 한다. 단 어느 것이 더 주님의 심정을 잘 표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1) 계 3:5의 해석 문제: 오역이 아니라 원어(ἐξαλείψω)에 대한 ‘직역과 의역의 차이’로 보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성경(성문서)의 문학적 표현으로 보아도 좋다.

 

2)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생명책에 이름이 ‘흐려진 자’는 그 이름이 ‘지워진 자’가 아니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있는 자’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흐려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직유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성경에서 ‘이기는 자와 이기지 못하는 자’의 개념은 둘 다 신자(믿는 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불신자는 이기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과는 원천적으로 상관이 없는 자이다. 태생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사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4) 서사라 목사가 그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서 주장하는 신자(믿는 자) 중 [이기지 못하는 자]에 대한 두 부류의 종말 심판적 운명은 [인본주의 신앙, 가식적 회개-생명책에 흐려진 이름-성 밖]와 [회개 없는 영구적인 타락자(히 6:4-6)-생명책에 지워진 이름-지옥]의 구분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서사라 목사는 믿는 자로서 일시적 타락 이후 회개로서 부분적으로 회복하거나 타락 후 배도와 배교로 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이기지 못하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거나 완전히 지워질 수도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라 목사의 성경 해석관(생명책에 기록~흐려짐~지워짐의 표현)은 오히려 [이신칭의]의 구원관에 더 충실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원에 이르도록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더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비판 #2]: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목사는 이기지 못한 자로서 모두 ‘성밖’에서 고통 받는다.

 

[비판 #2]에 대한 변해: 서사라 목사는 천상(낙원)의 성 밖 쇠창살 안에 있는 한 목사를 목도하고서, 그가 본 목사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자는 이기지 못한 자로서, 모두 ‘성 밖’에서 고통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성 밖’에 처하는 자들은 목사뿐만 아니라, 1) 주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모든 자들”과 2)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방식대로 삶을 사는 크리스쳔들 그리고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청지기가 되지 못하면 모두가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인 서사라 목사의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은혜/믿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삶(율법/행함)을 살지 못하는 형식적인 크리스쳔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조: [성경해석의 새 지평」, 서영곤 논문(68-69쪽), 하늘빛출판사, 2020]

 

[비판 #3]: 타락한 목사들은 ‘지옥’에 처해진다.

[비판 #3]에 대한 변해: 비판 #3은 [비판 #2, #4, #5]와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것으로 별도의 변해를 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2, #4, #5 참조).

[비판 #4]: 히브리서 6:4-6은 ‘한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들에 관한 말씀’이다.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에 대하여 박유신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히6:4-6]은 ‘구원의 취소’, ‘구원의 취하’, ‘구원의 박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서사라 목사는 이러한 의미를 가진 히브리서 6:4-6을 임의대로 해석해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그 행위에 따라 그 구원을 거두어 가시는 분으로 확정한다. 그리고 이를 타락한 목사에 대하여도 대입한다. 목사의 ‘타락’과 히브리서 6:6의 ‘타락’은 배경과 의미에 있어서 명백히 구분된다.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는 문장 또한 ‘박탈된 구원’과 무관하다. 서사라 목사는 이 본문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지옥 체험기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탈한 체험기이기 때문이다.

 

[비판 #4]에 대한 변해: 서사라 목사는 ‘이기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예를 들면서 계21:8과 계22:15을 예시 말씀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즉 이기지 못하는 자의 두 부류가 다 예수를 믿는 자들인데, 하나는 불 못과 또 다른 하나는 성(城)밖으로 나뉘어 처하여 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계시록 21장 8절(불 못) 경우의 이기지 못하는 자는, 죄를 지어도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성령이 떠난 경우이다(즉 화인을 맞아 타락-배교-배도한 자, 히6:4-6 참조). 그러나 같은 죄의 항목이라 하더라도 계시록 22장 15절(성 밖)으로 간 경우에는 아직 성령이 떠나지 아니한 즉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결과 한 쪽은 하나님이 완전히 버린/유기된 것이고 다른 쪽은 성령이 아직 내주하는 경우라는 의미인 것이다.

정리하면, 계시록 21장 8절 = 불신자 + 이기지 못하는 자들 중에 양심이 화인 맞을 정도로 재 타락하여 불신자와 같은 상태로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 구원을 잃어버린 자들이고[불 못], 그러나 계시록 22장 14-15절 = 이기지 못하는 자들이 가는 [성(城)밖]인데, 이들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들이다. 즉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므로 [성(城)밖]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 부류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박유신 목사]가 단정한, [히6:4-6]은 ‘구원의 취소’, ‘구원의 취하’, ‘구원의 박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히6:7-8을 깊이 묵상 해 보면 누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는 자인지 그리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아닌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히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말씀은 앞의 [히6:4-6]을 주석하는 말씀이다.

 

[비판 #5]: 이기지 못한 목사들이 가는 ‘성 밖’은 요한계시록 22:15의 예루살렘 ‘성(城)밖’이다.

새 예루살렘 성은 천국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그리스도의 신부’와 ‘어린 양의 아내’를 가리킨다(계 21:9-10). 요한계시록 22:2에서도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로 묘사한다. 신랑은 어린 양 예수이다.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 교회공동체이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실체는 어린양의 신부 곧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이미 서사라 목사의 ‘성 밖’ 스토리도 팩트가 아님이 증명된다. 예수를 믿어도 이기지 못한 자들이 간다는 ‘성 밖’이란 없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다양한 교회의 모습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다양한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최종적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응축한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면모는 요한계시록 21:9-22:5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서사라 목사는 요한계시록 21, 22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구조와 특징을 천국의 실제 모습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천국 밖의 지역을 ‘성 밖’으로 지칭하며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진 자,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한 자, 예수는 믿으나 이기지 못하는 자 등등이 죽은 후 가는 곳이라고 한다. 상식을 벗어난 해석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성 안과) ‘성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성경과 계시록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판 #5]에 대한 변해]: 전형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잘못목된 비판의 글이다. 박유신 목사는 무천년기주의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이며 서사라 목사는 [전천년기주의]에 입각하여 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인 것이다. 자신이 어떤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가 남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신학에서 본질이 아님 관점의 차이는 상호 인정하면서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무천년기적 관점]에 속하는 자들은 미래적 천국이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실재하는 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박유신 목사]와 같이, 신랑과 신부(예수님과 교회)로 해석하는 것이다.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자들과 무슨 소통이 되겠는가?

 

하지만 비판자들은 서사라 목사의 간증서적을 올바로 정독하지 못하여 [서사라 목사]의 위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해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해당 간증서적을 잘 생각하며 정독해 줄 것을 권면하는 바이다. 따라서 본 비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기술할만한 지면도 부족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비판적 질문에 대한 해명보다 우선 선행되어야 할 ‘비판자의 오해 또는 성경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비판한 질문은, 전형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잘못된 비판의 글이다. 비판자는 [무천년기주의적 관점]에서 종말론과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이며, [서사라 목사]는 [전천년기주의]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자로서 근본적으로 각자기 쓰고 있는 안경이 다르다. 자신이 어떤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가 남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신학에서 본질적 주제가 아닌 관점의 차이는 상호 인정하면서 양립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무천년기적 관점]에 속하는 자들은 미래적 천국이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실재하는 천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비판자와 같이, 신랑과 신부(예수님과 교회)로 치부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자가 말한 것 같이 성경과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 상징적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성 안’과 ‘성 밖’이란 개념은 “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즉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과 어떻게 대화가 되겠는가? 처음부터 대답할 가치가 전혀 없는 어리석은 질문, 곧 우문(愚問)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박유신 목사가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하여 비판한 다섯 편의 글 중에서 <첫 번째 것: 높은 인기와 깊은 의혹의 상호모순성을 가진 천국지옥 체험기>에 있는 “지옥에서 루시퍼를 만났다“는 간증은 [비성경적, 잘못된 주장] 이라는 비판을 다음과 같이 변해(辨解, Apology)하고자 한다.

 

(1) [비판 내용]: “서사라 목사는 [그의 간증서적을 통해] 지옥에서 천사장 출신 루시퍼를 만나 대화했다고 밝히며, 그 루시퍼의 기원, 그의 타락 과정, 그의 실체를 이사야 14:13-15, 에스겔 28:13-17, 요한계시록 12:3-4이 밝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루시퍼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서사라 목사가 지옥에서 만나 대화까지 나누었다는 루시퍼는 누구인가? 이러한 성경의 틀을 벗어난 체험이 있을 수 있는가?“

 

(2) “사탄을 루시퍼로 이해하며 간증한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변해]:

본 질문에 대하여는 긴 해명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원어 단어의 해석상 문맥적 고려를 일반적 성경 해석에 적용할 경우에 복잡한 논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탄을 ‘루시퍼(Lucifer)’로 지칭 또는 명명하는 것이 명분이 있느냐?”하는 것과 성경 말씀과 역사 속에서 암시하는 것을 연역적로 해석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을 훼손하는 것이 되는지를 해명하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말한 대로 고유명사 ‘루시퍼(Lucifer)’의 실체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사라 목사는 이사야 14:12에 등장하는 “계명성”의 영어 번역 과정에서 나온 ‘루시퍼’가 사탄의 정체로 이해한 것이다. 위 성경의 ‘계명성’이란 의미는 ‘바벨론 왕’을 비유하기 위해 도입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사탄/마귀를 암시하는 ‘루시퍼’라는 이름의 출처는 다 아는바와 같이, KJV와 NKJV 성경이 새벽별(금성)의 의미를 가진 ‘계명성’으로 영어 번역한데서부터, 루시퍼(Lucifer)로 명명하게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란 말은 ‘대적자, 불법자’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세 개의 자음 ‘신’(שׂ)과 ‘테트’(ט)와 ‘눈’(ן)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즉 히브리어인 사탄(ןטש, Satan)=헬라어(디아볼로스, Diabolos)=라틴어(루카페스, Lucifer)=영어(루시퍼, Lucifer)로 번역되면서 히브리어 ‘사탄(ןטש)’이 영어권의 의미로 ‘루시퍼(Lucifer)’로 불리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탄(ןטש)이 히브리어라는 것과 히브리어인 사탄을 문맥적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타락한 천사’로만 보는 것은 다소 비성경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이는 구약 성경에서의 단어는 일차적으로 그 시대의 상황적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서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분명하게 사탄/마귀의 존재를 인정하고 명시하고는 있지만 그 기원을 말해 주지 않기에, 오늘날 신약 시대적 상황에서는 성경에서 그 출처를 통전적 해석의 관점, 즉 성경 전체 역사 속에서 유추하여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서사라 목사는 사탄/마귀의 정체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에 기반 한 [타락한 천사설]에 근거하여 ‘사탄/마귀의 정체를 타락한 천사장‘으로, 그 부하들을 ‘타락한 1/3의 천사들의 무리‘로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다. 이는 기존 신학에 반(反)하거나 구속사의 본질적 교리를 훼손시키는 점이 결코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비판자들이 지적한 성경 구절(에스겔 28:13-17, 이사야 14:12-15, 요한계시록 12:3-4)을 [타락한 천사설]에 기반하여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 신학자들과 교단에서는 일반적인 사실(Fact)임을 상기하길 바란다.

4. [박유신 목사]의 비판에 대한 ‘자격, 신분 및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

1) 비판의 자격: [박유신 목사]는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어떤 의도로> 저자(서사라 목사)의 동의도 없이 자의적인 해석과 일방적인 비판과 폄하(貶下)의 글로 인터넷 미디어를 통하여 유포하고 있는가? 아울러 이러한 비판 및 비방은 실증법상으로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에 엄중하게 묻는 바이다.

 

2) 신학적 정체성: [박유신 목사]는 기독교포털뉴스의 ‘이단문제 전문연구위원’이라는 타이틀로서 서사라 목사의 간증수기에 대하여 비방적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판 내용이나 방법적인 면에서 소위 이단문제 전문위원이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정도의 [신학적 왜곡과 검증의 준거]가 모호하고 성경 해석의 기준 또한 자신의 편협 되고 한정된 지평을 보이고 있다. 하여 [박유신 목사]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질의를 가하니 성실히 답변 해 주길 바란다.

(1) [박유신 목사]가 이해하는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2) [박유신 목사]는 성경에 계시된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실존 또는 그 실재를 믿는가?

(3) [박유신 목사]는 성경이 계시하는 천국의 현재적 낙원, 미래의 천년왕국 그리고 역사적 종말의 영원천국(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실재를 인정하는가?

(4)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학설 또는 교리로서, [박유신 목사] 자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전천년기설? 후천년기설? 아니면 무천년기설인가?

(5) [박유신 목사]는 위의 3관점 중 어떤 것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가?

(6) [박유신 목사]는 이단문제 전문연구원으로서 그 판별 기준의 핵심과 원칙은 무엇인가?

(7) 성경 해석이나 신학사상이 상호 대립될 경우 이를 조정하거나 양립을 허용 또는 가능하게 하는 [박유신 목사]의 최소한의 가치중립적 기준이나 준거는 무엇인가?

 

5. [기독교포털뉴스]와 [박유신 목사]에게 드리는 제언과 결론

 

1) ‘신학사상이나 성경해석에 관한 올바른 비판적 질문과 그 대답’은 어떠해야 하는가?

개혁신학원리에 입각한 질의응답이 되어야 한다. 개혁신학의 제 1원리는 하나님의 존재 인식과 인정이다. 이는 인간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때라도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인식 즉 존전의식(尊前意識)으로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관된 담론에 대한 질의응답은 경솔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담론에 대한 반론 또는 비판적 질문을 가진 자는 최소한 해당 이슈(Issue)나 주제에 대하여 충분한 정보나 배후 지식을 습득한 후에 첫째로, “나의 질문 또는 비판이 진실에 입각한 것인가?”를 주님께 한번 묻고, 두 번째로, “이 질문이 꼭 나는 물론 여러 수신자(Audience)들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것인가?”를 다시 묻고, 마지막으로 “나의 질문이 상대방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행하여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질문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면 또는 비대면 방식으로 정중하게 변해(辨解)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인 절차도 정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차별적 사이버 공간의 오픈된 미디어 상에서 상대방을 비판, 비난, 폄하하는 행위는 비신사적이며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귀하고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모든 부정 또는 비판적 질문을 대하는 대답 또한 정중하고 신실하며 친절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변해자(辨解者)의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은 매우 신사적인 것으로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쟁점 주제들에 대하여 매우 세밀하고 깊은 학자적 식견으로 지적하였고 또 그것들에 대하여 대화의 장을 만들기를 본인 스스로 요청 해 주었기 때문이다.

 

2)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때 가장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비판하는 본인이 지니고 있는 그 비판의 기준이나 평가의 잣대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판단 기준은 그 사람이 연마하고 닦은 학문적인 시스템(System)이다. 따라서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사상의 시스템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한다. 그 비판 시스템의 고기 잡는 그물코가 너무 촘촘하거나 크게 될 때 그 비판은 [객관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많은 비판들이 부메랑이 되어 비판자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3) 신학은 왜 태생적 오류(誤謬)를 범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감화·감동적 조명 없이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이기적 교만이 앞서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세계관과 가치관에 부합한 하나님의 신학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깊은 영성과 묵상은 물론, 특별한 은사를 통한 주님의 계시에도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지상사역 당시에 왜 말씀의 선포와 함께 기적과 이사를 행하셨는가?

왜 오늘날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유체이탈이나 입신이나 영육 분리와 같은 신비스런 초월적 방법으로 천국과 지옥 또는 삼층천을 왕래하거나 천상을 보게 해주시는 것인가? 그들이 특별한 인간이라서? 예뻐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이시려 그러하시는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마치 참 신과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이적과 기적이 없어도 충분히 메시야 사역을 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구원사역과 천국복음 전파를 효과적으로 완성하시려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지혜의 선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하나님 나라(하나님이 계신 곳)의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선지자적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 땅의 하나님 백성들은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들이 전하고 증거하는 것들 중에는 우리의 신앙을 깨우게 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것들도 많이 있으며, 상상력을 확장시키거나 천상의 비전을 더욱 분명하게 해 주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급속히 인본주의 신앙으로 퇴색되어 가는 이 세대의 영성을 새롭게 해주는 귀한 영적자산(靈的資産)이 되는 것이다. 왜 평신도들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고 싶어 하는데, 일부의 교계 지도자나 신학자들은 그것을 비난하고 폄하하기에 앞장서는가? 개인적 선입관으로 판단하지 말자! 그들은 틀리고 내가 맞다하고 쉽게 말하지 말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저들과 다른 것이며, 내 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실수와 허물 많은 인간이 아닌가! 성경을 보기만 듣기만 해도 그리 좋은데, 천국을 보거나 체험해볼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더 큰 은혜가 되겠는가 말이다. 대신, 그 소식들이 비성경적이거나 또는 현존 신학사상이나 교리 간에 불일치한 것으로 보인다면 정당한 신학적 방법을 통해 오류를 검증하여 밝혀준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은 무오하지만, 인간의 신학함은 출발점에서부터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서요한 교수

약력:

-총신대 신학과, 합동신학원 졸업

-영국 애버딘 대학교 신학석사 (Th.M., 역사신학)

-영국 남 웨일스 글라모르간대학교 (Ph.D., 역사신학)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Post-Doctoral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교수 역임 (역사신학)

-언약사상사 (Ph.D.),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제 21회 기독교 출판 문화상 신학부분 최우수상), 종교개혁사,

개혁신학의 전통, 청교도유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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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소한 거짓말 한 자와 선의의 거짓말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한 답변:

 

말씀에 의하면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다. 여기에는 죄의 크고 작음, 즉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모든 허물과 죄를 가리킨다. 따라서 범죄한 사람은 그 손을 짜르고 찍어내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 5:22-2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여기 두 가지 욕 중에 “라가”는 “텅빈, 무가치한, 우둔한, 멍청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욕 “미련한 놈”은 ‘라카’와 히브리어의 ‘모레’를 연상시킨다. 이 말은 도덕적인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이다. ‘라가’는 ‘어리석은 놈’으로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저급하다는 말이며, ‘미련한 놈’(모레)은 ‘추악한 녀석’이라는 말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상태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욕은 상대방에게 극심한 상처를 끼친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버리신 바대로 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불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계 21:8,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지니라 이는 둘째 사망이라”.

 

한편 자신의 돈을 떼먹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이들은 사람을 미워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은 살인죄로 간주하셨다. 다시 말하면 원한으로, 용서하지 못한 것은 곧 십계명의 6계명,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성인신,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부활승천과 재림, 소위 구속사의 정점에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페가 자리하는 바, 형제에 대한 사랑의 용서가 제일 중요함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이런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결국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살인자가 되어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다.

 

2. 높은 인기와 깊은 의혹의 모순성을 가진 서목사의 천국지옥 간증기에 대하여? 라는 글에 대한 반박:

 

이것은 박유신 목사가 제기하는 바이지만 사실은 그도 서목사의 학문성을 인정하는 바이다. 동시에 어떻게 그런 분이 천국과 지옥의 체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i) 성경의 사람들, 대표적으로 모세와 다니엘, 신약에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당시 최고의 학문을 섭렵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그들의 모든 자질, 예를 들면, 성품과 학문, 사회적 지위 등을 활용하였다. (ii) 주변에 소위 천국지옥체험자들이 많지만 그들 중에 서목사는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과학자요 소명받은 목사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이 시대의 선각자로서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서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런 면에서 서목사의 사역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목사는 무엇보다도 영혼구원에 집중하고, 교회의 모든 재정을 복음전도와 영혼구원을 위하여 무료 책자 발매와 막대한 선교비 사용, 지금도 교회가 없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복음의 불모지에 교회를 건축하며, 소위 자비량 선교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3. 결론

 

그러므로 소위 비판자들은 서목사의 남다른 사역과 소명에 대하여, 기도하며 돕지는 못할 지라도, 최근에 몇몇 이단 감별사들이 단지 신학적 논리와 지식에 기초하여 분별없이 예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극히 삼가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이들은 교회를 지키고 보존한다는 명분아래 오히려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며 교회를 파괴하는 신학적 혹은 성경적 지식없이 날뛰는 풋내기 지식인들로, 단언컨대 소위 신종 분파주의자들로, 공히 신학사상을 검증 받아야 할 대상들로 보여진다.

 

 

 

조상열 교수

약력:

-평택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Golden-Cornwell Theological Seminary

(M.Div., Th.M)

-영국 University of Edinburgh (Ph.D.)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구약학 부교수 역임

-건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임강사 역임

-가인의 표 (The Mark of Cain) 저술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 저술

-Lesser Dieties in the Ugaritic Texts and

the Hebrew Bible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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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를 지옥에서 보았다는 개인 체험 간증의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기대한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은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의 답은 먼저 유대교 전승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제2 성전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이나 1세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아담의 원죄론을 다루고 있으며 아담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4 Ezra 7:118; 2 Esd 3:21-22; Sir 25:24-26; Wis 2:24; 4:30; 7:118; 4 Ezra 3:20-22; and 2 Bar 48:42-43; 54:19). 유대교 전승을 계승하여 발전한 신약 역시 둘째 아담(그리스도)에 반하여 첫째 아담을 실패자로 규정하고 있다(고전 15:21-22). 유대교 전승과 신약성경이 아담만 실패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원죄론에서 하와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나 배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담은 첫 인류이자 첫 부부의 대표자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원죄 이후에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라는 상상도 유대교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아담이 병들어 치료 목적으로 기름을 가져오기 위해 셋과 하와가 다시 낙원으로 진입한다는 이야기(Life of Adam and Eve)와 그들이 낙원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후회하였다는 해설이 외경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화적 기술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신약 전승도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의 첫 인물로 아벨을 제시하고 있다(히 11:4). 제사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아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믿음과 회개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 평가되고 있으나 가인의 살인사건 이전이든 이후이든 아담과 하와가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단서는 찾기 어렵다. 신약 전승은 아벨의 제사만을 언급하고(마 23:35; 히 11:4) 아담이나 하와의 제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실패자로 아담을 소개하고 있다(롬 5:14; 고전 15:22; 딤전 2:14). 아담의 실패는 하와의 실패로 이어진다.

 

사실 창세기에 아벨의 제사 장면이나 가인의 제사 장면 어디에도 아담과 하와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없다(창 4:3-4). 아담도 땀을 흘려 밭을 갈아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징계를 당하여(창 3:17-19) 농부로서 가인과 함께 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창 3:23), 그가 제사를 드렸다면 그 역시 가인처럼 곡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제사에 대한 평가가 없다는 사실은 아담과 가인이 함께 그들의 소산으로 곡물 제사를 드렸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다. 제사 문제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적극적인 관여자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이 제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참여하지 않아 제사 자리에 아예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사 불참은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이후의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아벨의 죽음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제사를 속행하며 살았다면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과 결론을 빼먹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술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반면 그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아벨의 선택은 신약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예표로 연결되고 있다. 당시에는 제사만이 인류의 회개를 표현할 방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부재하다는 것은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구원의 길로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2.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 예언을 믿어서 구원받지 않았을까?

 

두 번째 질문은 전치사 에트(꜄eṯ)에 대한 오역을 바로 잡으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가 임신하여 가인을(꜄eṯ¯qayin) 낳았고

그가 이르되 내가 남자(꜄îš)를, 주를(꜄eṯ yhwh) 창조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MT와 사역)

 

1절의 ‘여호와로 말미암아’(꜄eṯ¯yhwh)에서 에트(꜄eṯ)는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혹은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을 ‘여호와와 함께’(with yhwh) 혹은 ‘여호와/주(yhwh)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치사 에트(꜄eṯ)가 ‘~의 도움으로’(~을 통해, ~으로 말미암아)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또한 ‘~와 함께’로 번역해도 이는 하와가 여호와와 함께(with), 부모로서 가인을 낳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이상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에트(꜄eṯ)를 with(함께)로 해석한 경우인데, 전치사 에트(꜄eṯ)의 이러한 적용 용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목할 것은 전치사 에트(꜄eṯ)가 가인의 이름 앞에서 목적격 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문맥 내에서 에트(꜄eṯ)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에트(꜄eṯ)를 뒤따르는 단어가 다른 뜻으로 오용되지 않고 목적격의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창세기 기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트(꜄eṯ)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용법 모두 목적격 조사로 보아, 이는 하와가 가인을(꜄eṯ1) 낳고, 여호와(주)를(꜄eṯ2) 낳았다는 기술이며 이는 전체적으로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평행법적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장은 가인‘을’(꜄eṯ) 낳고 주‘를’(꜄eṯ) 낳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며 남자(꜄îš)와 여호와의 전후 문법적 관계 역시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고 있는 평행어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궁켈(H. Gunkel)은 가인과 yhwh를 동일시하고 있고 이러한 문법적 분석을 바탕으로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 등이 각자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보이스는 yhwh를 ‘구원자’(the deliverer)로 번역하면서 ‘내가 남자를, 실로 구원자를 낳았다 하니라’로 의역한다. 보이스는 첫 아들에 대한 하와의 찬양에는 구원자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창 3:15)에 대한 하와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정황은 이러한 하와의 독백에 다른 이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와의 독백에서 가인(qayin)의 이름과 (남자를, 주를) ‘내가 낳았다’(qānîṯî)는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들다, 창조하다’의 어감을 가진 카나(qānāh) 동사는 하와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카나(qānāh) 동사와 카니티(qānîṯî/*qnh) 동사는 두운체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둘은 의미론적으로도 연결된다. 즉, 본문 기자는 의도적으로 ‘창조하다’의 의미를 가진 용어를 연이어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 어근의 배열은 가인(qayin)의 이름이 ‘만드는 자’ 혹은 ‘창조자’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리하면, 창세기 4장 1절의 구문론적 평행 구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는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는 모두 하와의 첫 아들을 칭하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를 모두 동사(wattēleḏ 낳았다, qānîṯî 창조하였다)의 직접 목적어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하와가 ‘내가 가인(qayin=창조자)을 낳았고, 남자(꜄îš)를, (즉) 주(yhwh)를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와가 원죄에 대한 처벌 이후에도 여전히 신성에 대한 아쉬움과 열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와의 이러한 표현은 하와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남자(꜄îš), 즉 구원자로 인식하고 극대화된 기대를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리고 그가 내가 아들을 낳았다 하니라’(wattō꜄mer qānîṯî bēn)로 표현하지만, 하와는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며 가인에 대한 그의 기대를 뿜어내고 있다. 하와가 언급한 ‘남자’(꜄îš)는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창세기 3:16절에서 하와가 자신의 남자(꜄îš)를 갈망하고 그가 하와를 통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하와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쉬(꜄îš)와 후(hû꜄)를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 하와가 갈망할 남자(꜄îš)는 그의 옆에 있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 15절에서 언급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이 여자의 후손, 즉 남자(꜄îš)는 산고의 고통처럼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소산임을 말하고 있다.

 

하와는 여자의 후손인 이 남자(꜄îš)를 왕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신적인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는 그 남자(꜄îš)가 자신이 임신하여 낳은 가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와가 가인을 낳고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거나 그의 남자(꜄îš)에게 ‘창조자’를 뜻하는 가인(qayin)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그에 합당한 ‘주’(yhwh)라는 칭호(yhwh)를 준 것이다. 그래서 하와에게 가인은 신적인 존재이자 왕권을 가진 자였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구원자’로 기대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그의 이름(qayin/ 창조자)과 칭호(yhwh/ 주)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를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 믿거나 기대했을 수 있다. 이것이 원죄 이후에 하와가 범한 두 번째 죄이다. 그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구원자 상을 자신의 아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하와는 가인에 대해 높은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가인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하와의 의식이 가인이 성장하면서 교만해져 아벨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인성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3. 가죽옷과 여자의 후손 예언도 받았으니 아담과 하와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예언도 해주고(창 3:15)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지만(창 3:21),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도 그 사건을 통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인도 하나님께 살인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표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지만 구약뿐 아니라 신약 전승에서도 그가 구원받은 자들의 조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히 11:4; 요일 3:12). 따라서 가죽옷과 표는 하나님이 앞으로 죄인들에게 행하실 구원 방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보호의 도구가 일시적으로 그들을 위험이나 부끄러움에서 가려줄 수는 있어도 그들의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기에 보호의 도구를 받았다고 아담과 하와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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