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 목사님 설교

이기는 생명 대인과 영성2(3-2) 서사라목사

하늘이슬 2016. 8. 16. 16:29

이기는 생명 대인과 영성2(3-2)

생명은 이긴다는 것이다.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승리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원수는 누구일까?

나의 가장 큰 원수는 누구인가? 나이다.

내가 진리를 행하지 못하게 가장 원수짓 하는 게 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연히 사단 탓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사단을 쫓고 있다.

나를 괴롭히는 더러운 영들아 떠나가라물론 이것이 때로는 필요하죠.

정작 문제는 누구냐?

내 안에 있는 찌꺼기를 처리하면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

여러분 쓰레기통에 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 쓰레기통 안에 음식 찌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찌꺼기들이 없으면 안 온다.

마찬가지로 욕심 탐욕 탐심 그리고 감정 혈기 나의 못된 자아, 이런것들이 없으면 악한 영들을 오라고 해도 안돈다.

먹을 게 없으니까.

내 안에 나를 처리하면 오라고 해도 안 온다.

대게 어떤 일이 잘못 돌아 갔을 때 10/9는 내가 원인이고 10/1만 사단이다.

이정도 밖에 그 영향력이다.

나 때문에 그게 일어나는 것이지 사단이 나를 꼬셔서 그랬다 사단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내 안에 그게 없으면 사단도 내게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행하면서 사는데 가장 원수되는 것은 누구냐?

나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나하고의 싸움이 언제 가장 힘드냐? 윤리단계이다.

윤리단계에서는 영을 쫓고자 하는 생각과 영을 쫒고자 하는 생각이 비슷비슷하다.

영의 힘과 육신의 힘이 거의 50%씩 되는게 윤리단게이다.

나하고의 싸움이 극심하다.

근데 윤리단계에서 여의 힘이 51%가 되고 육신의 생각이 49%가 되는 때가 언제냐?

이때는 여러분이 영성훈련 받은지 1년쯤 되는 때이다.

이 때에 여러분의 영의 힘이 1% 육신의 힘을 넘어서는 때가 1년이 되는 때이다.

이때를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때라고 한다.

가장 견고한 성이 여리고성이다.

하나님께서 다리시는 심령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가장 큰 여리고성, 여러분의 가장 질긴 부분, 이게 무너지기 까지는 1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때가 딱 무너지고 나면 영의 힘이 51%로 육신의 힘이 49%가 된다.

여러분의 여의 힘과 육신의 힘이 몇%로 와 계시는가?

처음에 영성훈련에 왔을 때가 개인차가 좀 있지만 20-30%, 그다음에 육신으로 사는 힘이 70-80%이다.

무슨 얘기인가?
워치만니는 상중하로 책을 썼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가 영의 힘이 52%가 되는 선간부터이다.

이때부터 영에 속한 사람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러분이 1년 정도 되면 영희 힘이 딱 반정도 되요. 50% 이게 윤리단계인데 영이 50%.

더 성장하면 3년 정도 마치게 되면 영의 사는 삶이 60-70%, 그다음 육으로 사는 삶이 30-40%로 바꿔지는 것이다.

이것은 뭘 말하는가?

만약 10가지 사건이 생겼어요.

10가지 사건 중에서 7번은 승리하고 3번은 넘어진다는 것이다. 육신으로 치고 받는다.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약한 사람이 있지요.

그런 곳에 넘어진다. 계속. 성장해도

10가지 사건 중에서 7번 승리하고 3번 승리하는 거에요.

그런데 처음 왔을 때에는 승리하는 것은 2-3번 정도밖에 안되고 넘어지는 것은 7-8번 되던 삶이 이제는 이렇게 포션이 바뀐다는 의미이다.

여러분이 왜 이렇게 바꿔져야 하냐?

여러분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인생의 길이 속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영으로 산 삶이 얼마냐? 육신으로 산 삶이 얼마냐?가 결절이 되어지죠.

이렇게 바꿔져서 남은 인생을 사는 거하고 이대로 그냥 사는 거 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섰을때에.

영으로 살아드린 삶만이 하나님이 카운트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육신으로 사는 삶은요? 다 사망의 삶이다.

하나님은 카운트를 안 하셔요.

죽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사데교회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셔요?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정작은 죽은 자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게 뭔가요? 죄의 삯은 사망지요. 이게 육신으로 산 삶이죠.

하나님으로 사는 삶은 영으로 산 삶은 다 생명의 시간으로 다 기록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건지를 알아야 한다.

영성훈련이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이다.

(영성이 입혀지게 하옵소서.)

(사모하는 자에게 영성이 입혀진다.)

진정성, 한결같음, 진실함,여러분이 삶에서 진실함이 빠지면 안된다.

누구 승리하는 줄 아는가? 변함이 없는 사람, 한결같은 사람이 뭔가를 이룬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성을 입는데 있어서는 한결같아야 한다.

한결같이 내가 추구해야 입혀지는 것이다.

제가 영성훈련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왜냐하면 거기에는 나를 주지 않고 주님을 주기위한 그런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승리는 누가 하냐? 한결같은 사람, 진실성 있는 사람, 정말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고 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승리한다.

하나님은 결코 적당히 넘어가는 분이 아니다.

내가 적당히 살고 싶으면 하나님도 그래 나도 너한테 적당히 할께이러신다.

7:12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대접 못하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잘 대접 안하신다.

끝까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입혀주시고 주시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 적당 생각하지 말라, 영성은 적당 적당해서 입혀지는 것도 아니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이 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다.

 

여러분 이기는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여김의 훈련을 해야 한다.

6:11-13 보도록 합니다.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째 여김의 훈련을 해야 하는데 뭘 여겨야 하냐면 내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것이다.

왜 여기라는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안 믿어지니까.

내가 맨날 죄를 짓고 사는데 내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산 자로 여길 수가 있는가? 안 믿어지니까 여김의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5:24

그걸 안 믿어지니까 나는 죽었다고 여기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얘기인가?

여러분 가정에서나 어디서나 저 사람은 참 보배야! 그런데 처음에는 그 사람이 보배로 안 보이는데 그 사람을 보배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참 보배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닌데 죽은 자로 여기고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못 살았는데 산 자로 계속 여기다 보면 이것이 나중에 믿음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믿어드리는 것이다.

이기는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두 번째는 믿어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오면서부터 믿어드리는데 내가 믿기 때문에 순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차례대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안 믿어지니까 여기는 훈련을 하고, 그 다음 믿음이 찾아오고 거기에 대한 믿음이 와서 내 몸이 순종하는 이런 차례를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기는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여김의 훈련을 하기 전에 무엇이 여러분에게 필요하냐면?

 절망이 필요하다. 절망!

이 절망은 누구에 대한 절망이냐? 나에 대한 절망이다.

여러분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썩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죠. 그리고 나는 참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내가 안 된 사람임을 발견하고 나서 나에게 대하여 절대 절망하지 않는 자는 이기는 생명으로 못 넘어갑니다. 절망해야 되요.

나는 안 되는 자구나

나로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구나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고는 절대 절망이 오지 않습니다.

싸워야 절망이 온다.

내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절망이 오지도 않죠.

대강 대강 넘어가는 거죠.

적당히 편하게 살고, 적당히 죄짓고 살고 적당히 육신으로 살고 그렇죠.

그러나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본 자라야 절망을 하게 되어 있고 절망을 하는 자라야 내 힘으로 하는 것을 내려놓게 되어 있다.


절망 끝에는 내 힘으로 하려는 것을 내려놓는 거에요.

그럴 때에 이제는 나에게 뭐가 들어오는가? 여김이 들어오는 것이다.

아하~ 내 힘으로 나는 안 되니까 아, 나는 죽은 자구나, 여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실제가 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내 안에서 실제가 되기 시작해요.

그 전까지는 내 힘으로 하려고 하는 힘 때문에 하나님이 너는 죽었다이 말이 들어오지도 않아요. ? 내 힘으로 사랑하려 하고 내 힘으로 주의 일을 하려하고 내 힘으로 뭔가를 하려하기 때문에 그때는 전혀 주님이 힘을 쓸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타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절망까지 가서 내 힘이 완전히 다 빠져 버려야 내가 완전히 포기되어져 버려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절망을 많이 해야 되요.

누구에 대한 절망이냐? 나에 대한 절망이죠.

우리 육체에게는 절대로 선한 것이 나갈 수가 없지요.

하나님만 선하신 분이에요.

하나님만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선한 것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육체로 하려고 하는 힘이 빠지지 않고는 하나님이 결코 시작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나 저나 많은 절망을 거쳐서 오직 주님으로만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기는 생명에서 처음에는 죄와 피흘리기 까지 싸워야 되구요,

절망이 오고,

나로서는 안되는 것을 알고서는

여기는 훈련으로 들어가고

믿음이 오고

순종하는 그런 차례를 갖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어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처셔 복종시키는 의미가 있다. 나는 죽었다는 거죠.

두 번째는 내가 죽은 것을 예수와 함께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은 것을 기억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어떻하든지 간에 어떤 사건이나 문제속에서 나는 날마다 죽는 훈련을 아니하면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쳐서 복종시키는 삶은 진리의 삶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라도 복종하는 삶이죠.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삶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그럼 생명의 삶과 진리의 삶은 뭐가 틀리는가?

진리의 삶은 억지로라도 복종시키고 생명의 삶은 그냥 흐르는 삶인 것이다.

그냥 편안하게 흘러나가는 거에요.

생명의 삶이 그냥 삶이 되어버린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윤리단계와 진리단계하고는 나와의 싸움이 있다.

내가 가장 큰 원수라고 했죠.

윤리단계는 극심하고 진리단계는 그래도 좀 줄어 듭니다.

나를 포기하는 게 많이 일어났거든요.

나를 많이 내려놨거든요. 억지로라도 복종시키니까.

나를 많이 내려놨기 때문에 나와의 싸움이 좀 덜한 거에요.


그러나 생명단계에서는 나와의 싸움이 없어요. 아예.

왜냐 내가 주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살기 때문에 나와의 싸움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생명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높은 단계의 삶인지를 알아야 된다.

우리는 그 삶을 향해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와의 싸움이 없는 삶인 것이다.

그냥 내 안에서 주님이 평범하게 삶을 사는 삶인 것이다.

저도 이 삶을 향해서 너무 나아가고 싶고 정말 너무 그렇게 되고 싶다.

우리는 다 같이 가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훈련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왜이 삶을 향해 나가야 하는가?

우리가 왜 이 힘든 삶으로 나가야 하는가?

나는 그냥 육신으로 살고 싶다. 나는 생긴대로 살고 싶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삶으로 나아가야 되느냐 이거죠?

왜 그렇게 되냐며는 이기는 자 이기는 삶에 대해 계시록 2장에 나오죠.

어떤 분은 계시록 23장을 외우라고 하는 분도 있는데요.

2-3장은 마지막 일곱 교회에 대하여 나오는데 우리 주님이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리라 나오잖아요.

그러면 내가 이기는 자가 되면 소망이 있잖아요. 이걸 외우면 아 내가 이기는 자가 되면 나에게 이런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겠구나 하고 소망으로 막 솟아오르는 것이다.

계시록 2-3장을 외우라는 것은 참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참 좋은 아이디어 인 것 같아요.

그럼 이기지 못하는 자는요? 이기지 못하는 자는 바깥에 어두운 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로 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육신으로 살지 말아야 되요.

그래서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하는 거에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훈련이 안되나?

첫째 이유가 환경을 환경으로만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호나경에서 많이 말씀하고 계시지요.

하나님은 환경을 딱 마련해 주신다.

환경은 100%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그랬지요.

왜 저 여자가 여기로 시집을 왔나?

이건 100%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왜 저 아들이 내 아들이 되었나?

그것도 100%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여러분에게 아무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만 들리는 게 아니다.

이 환경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바꿀 수가 없다.

그냥 환경으로 하나님은 때려버린다.

근데 그게 하나님의 천둥과 같은 말씀으로 변하지 않는 말씀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환경을 환경으로만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못 받으니까 훈련이 안되는 것이다.

환경은 누가 조성하신다?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조성하시면서 환경은 환경으로만 대하니까 훈련이 안되는데 그럼 어떻게 받아야 훈련이 되겠습니까? 말한다면 환경을 하나님의 손길로 받으라는 것이다.

환경을 하나님의 손길로 받으라.”

하나님은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붕어빵어떻게 만들어내요?

붕어빵 어떻게 만들어내죠?

붕어빵 만들어내는 틀에다가 밀가루 넣고 앙꼬 넣고 밀가루 더 붓지요!

그러고 나서 요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서 붕어빵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환경이라는 붕어빵을 만들어내는 틀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찍어내고 싶은 거에요.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다. 빚어내고 싶은 것이다.

우리를 만들어내고 싶은 그 틀이 무엇인가? 환경을 조성하신다는 것이다.

환경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환경에서 환경 탓을 하고 사람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변명하고 누구 탓하고 다 자기 탓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훈련이 안 된다는 것이다.

환경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더라는 것이다.

환경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두 번째는 우리 자아와 관련이 있는데 자기 사랑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이 안되더라는 것이다.

나를 너무 사랑하면 항상 내 이익과 나의 유익과 나의 편안함을 따지기 때문에 훈련을 훈련으로 받을 수가 없다.

다 나 중심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요.

여러분 주를 위해 산다고 하는 자는 주를 위해 목숨 내놔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 자기 사랑을 버릴 수 있어야 해요.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 할 수 있어야 해요. 가정이 교회거든요.

가정에서부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주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영성 훈련 받는 사람은 자꾸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내가 내 사랑 해 봤자 상이 없고 헛되고, 죽고 썩고 없어질 것이고 상 못 받고 면류관 없고.. 그 짓을 왜 우리가 끝까지 해야 됩니까? 버려야지요.

버려야 한다.

우리가 훈련이 안 되는 이유가 세 번째는 나의 가장 큰 원수가 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나를 선택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훈련되어질 수 있다.

나는 나를 선택해서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비반에서 주관적인 구속사와 객관적인 구속사를 얘기했어요.

객관적인 구속사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관적인 구속사는 내가 하나님나라에 참여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내가 빚어지는 이야기라고 했다.

내가 객관적인 구속사에 참여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빚어지는 구속사, 혹인 이야기이다.

이렇게 구분이 되고 있다.


그렇듯이

 

사단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객관적 구속사인 하나님 나라에 참여되지 못하도록 온갖 짓을 다 하고 있고

그다음에 사단이 하는 것은 한 개인에 있어서 한 개인이 승화되지 못하게끔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살지 못하게끔 유혹하고 있고,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따라 가게 만들고 있고, 하나님과 멀어지게끔 그러니까 사단이 하는 일도 두가지에 다 참여되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사단을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피하리라

마귀를 대적하라 이것은 주로 객관적인 구속사에 대한 얘기이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되는 것을 방해될 때에는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라도 무조건 대적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로.

무조건 대적해야 한다.


그런데 주관적인 구속사에서 내가 성화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구속사에서 사단이 공작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역할이 많지 않다.

그러니까 객관적 구속사에서는 사단 탓하지 말고 나를 고치라는 것이다.


객관적 구속사에서 방해하는 사단은 무조건 대적, 완전히 까부시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그러나 주관적 구속사에서 만들어지는 구속사에서 사단 탓만 하고 있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건 나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 많아요.

이걸 잘 분간을 하셔서 내가 고쳐져야 할 부분에서 사단 탓만 하고 있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경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

먼저 나를 고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고치고 그 다음에 사단을 쫒아야 합니다.


내가 고쳐지면 사단도 그냥 물러가요. 사단도 안와요. 물러가요.

십분의 구(10/9)는 나 책임이에요.

나머지 좀 남아있는 이 사단을 쫓아서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여러분이 사단 탓만 하지 말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갈 수 있도록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가 나오고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가 나옵니다.

다 살고 나서는 모래위에 집 지은 자는 다 더내려가고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는 그대로 있는

이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의 모습은 육신대로 사는 삶이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는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밑바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속에 내 심령속에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있고 내 육신을 기초로 하여 집을 짓는 자가 있다는 것에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하나님 우리의 삶에서 거짓된 삶을 물리치시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시며 아버지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겨진 존재로서 모든 것이 처리되고 깨끗함을 입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시간 깨닫게 해 주신 이 말씀, 허락하신 이 말씀 내가 지금까지 흘러 보냈던 그 말씀, 그리고 흘려 버렸던 그 말씀 붙들기 원합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시고 내가 변화받기를 원하오니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를 붙들어주시옵소서.

주여! 의인은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되지 않는 그 점에 있어서 여덟 번째 일어나서 갈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시고 결국에는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발견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늘 살 수 있도록 우리 주님 붙들어주시옵소서.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기도문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결단한 그 마음들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 결단한 마음들을 결코 여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아니하게 하시고 근심하게 아니하게 하시고 정말 믿음의 초보를 버리고 영을 좇아 사는 행위를 보여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개는 다시 토한 것을 먹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다시는 내가 토한 것을 다시 짚어 먹지 않도록 우리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 결단과 그 마음이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실 것을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