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과 영성2 훈련 셋째주-1
서사라목사
여러분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불평하고 원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왜 저 사람이 그렇게 안 바뀌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나 때문에 안 바뀌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지만 우리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인간관계를 원망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사실은 감사해야 한다.
왜냐 나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파트너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관계를 오늘도 펼치시고 내일도 펼치실 것이며 과거에도 펼치셨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이다.
그래서 파트너되는 분들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아가기 까지.
이것이 대인관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적인 인간관계이다.
생명적인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붙여준 파트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적인 인간관계이다. 그러면 그 사랑이 누구로부터 나가는거냐?
그 사랑이 나로부터 나가는 것은 참으로 인색하고 제한적이다.
내가 파트너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것, 그렇게 되기 까지 그들을 사랑하는데 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육체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 파트너에게 하나님을 주기 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주기까지 통과되면 어떻게 될까요?
파트너가 더 이상 파트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동여자로 변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과정이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검을 준다고 했다.
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화평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검을 먼저 주셔서 불화하게 한 다음에 우리가 정말 사람이 만들어져서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화평케 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먼저 검을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을 인간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굴복되면 우리는 정말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는 생명의 길로 승리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는 반드시 이 길을 가야된다.
하나님이 이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만드신다.
결국은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야되는 길이 정해져 있다. 안가니까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누구를 향해서 인간관계를 가져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다.
사람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된다.
첫째는 훈련이 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그 인간관계를 가져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늘 어때요?
그 사람 행동이 어떻고 저렇고, 저것은 틀렸고 이것도 틀렸고 이런 것만 생각한다.
남의 허물 남의 잘못 이런 것들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 육신이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을 거절하고 영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인간관계속에서 자꾸만 내가 육으로 생각하면 그 인간관계가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늘 너와 나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야 한다.
너와는 미물이다. 그 사이에 크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조그만 우리들이 크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인간관계를 잘 해야 한다.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이 우선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뭐가 변해지게 되냐면요? 사람보다 하나님이 먼저 보인다.
이게 훈련이다.
처음에 사람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먼저 반응을 보이게 되지만 곧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육신이 사르르르 들어가고 아, 내가 잘못 생갹했구나...
내가 이웃에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라 여기고 생각하라.
인간관계를 내 멋대로 내 육신대로 치받고 행하면 안되는 것이다.
마25:40
주님은 내 이웃에게 하는 것을 본인에게 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지극히 작은 자이다.
나에게 전부다 지극히 작은 자이다.
내 삶에 있어서 나에게 오는 모든 자가 지극히 작은자 중에 하나이다.
남편도 지극히 작은자 중에 하나이다.
나 외 모든 사람을 지극히 작은 자로 여기고 그에게 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른 인간관계이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남편이기 때문에 내 무엇이기 때문에 내가 뭘 한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결국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 남편이라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식이라서 하는 것도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이라고 생각하고 주께 하듯이 다 행해야 한다. 그래야 상급이 있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한다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먼저 이 마음속에 있는 동기와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하려고 한다면 지극히 작은자 중에 하나로 내가 주께 하듯 해야 주님이 받으시고 주님이 상을 마련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정은 마귀적이다.
자식과 부모간의 정, 부모는 정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식에 다 준다.
이런 것은 상이 없다.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맡겼다고 생각하는 자는 함부로 하지도 않다 다 주지도 않는다.
다 주면 망하거든요.
얼마는 구제하는데 얼마는 필요한데 얼마는 자녀에게 나눠준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과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은 정말 다르다.
남편을 볼 때 자식을 볼 때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먹으나 일하나 마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것이기에 상을 얻게 된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 차이가 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워 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사람이 무섭지 않다.
하나님이 하라는 것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람의 소리를 그렇게 크게 듣지 말라.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두 번째 나의 존재이유는? 그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인간관계속에 나의 존재목적이 그들을 위해서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은 섬겨야 하는 것이다.
엡5:23
여러분이 해야 할 파트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남편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내가 할 파트를 하면 되는 것이다.
안하면 고난이 온다.
고난이 오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살기 때문이다.
내가 말씀대로 살게 되기까지 고난을 보내신다.
나의 존재목적은 첫째는 주를 위해서 그 다음에는 그를 위해서, 또는 그녀를 위해서이다.
세 번째는 사람을 대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을 보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을 보도록 햐라는 것이다.
주님은 내 안에도 계시지만 그 사람 안에도 계신 것이다.
그 사람은 육신으로 해 대는데 그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분안에 있는 그분이 내안에도 있는 그분이다.(주님)
그분이 육신으로 해 대는지 영으로 반응하는지 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사랑하는 것이다.
다만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행하는 것을 보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뭘하든 그사람은 옛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그를 보며 불쌍히 여기고 나를 보며 나도 저렇지 하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행위만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주님을 봐야 한다.
그 안에 있는 주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한탄하고 계시며 그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계실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불쌍히 여겨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실까? 그러면 우리도 아픈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불쌍히 여겨지고 그렇게 보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별로 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훈련이라는 것이다.
그가 아직 변하지 않는 이유가 누구 때문이라구요? 나 때문이다.
상대방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아직도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안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 환경에 대하여 묵상을 해본다.
묵상하면 나의 부족한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아! 하나님은 이것을 다루시려고 이 인간관계와 환경을 허락하셨구나 깨닫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걸 메꾸려고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것이 왔구나!
나의 안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위장된 평화에 속지마라.
깊은 의미가 있다.
내가 육신적으로 잘 되고 또 재물도 별로 부족한게 없고 건강하고 교회직분 받아서 잘 다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되고 있느냐?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적인 편안함이 내가 잘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위장된 평화라는 거죠.
하나님은 오히려 고난가운데 우리를 빚으시길 원하시고 오히려 내 육신이 괴롭고 좀 안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내 영이 진주같이 영롱하게 빛이나게 되기 위해서 깍이고 닦아지는 것이 잘 되고 있는 건에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아무 걱정없고 내가 기쁘고 남편이 나에게 잘해주고 그러면 내가 잘되고 있는 거다?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고난 속에 있는 자가 더 잘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고난이 유익이 되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내가 바르게 행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우리가 사실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편안함, 육신적인 행복, 그런것들이 내가 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잘되고 있는 것은 정말 내가 고난의 풀무속에 있을 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다가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부요하고 .
주님은 말씀하시길 내가보니까 부요한게 아니라 눈이 멀었고 가련고 헐벗었고..
그러니까 주님이 보는 것은 그 영혼이 파리해 지고 전혀 힘을 못스고 시들시들해지고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육신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추구하고 달려갈 길이 뭐냐며? 주님의 길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길은 쉽지가 않았다.
늘 낮은 길이였고 대접 못 받았고 그러면서 그 안에 하나님 때문에 기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생명을 걸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했던 것을 보면 그는 결코 육신적으로 행복했고 따뜻했고 부요했고 그런 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장차 그분이 받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도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의 고난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된다.
고난을 주신 하나님이 지금 나를 풀무불에 넣고 있다면 그 정도의 사랑이 지금 나를 얼만큼 사랑하고 있다구요? 엄청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난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꾸로 잘 생각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나는 주님이 주신 힘으로 능력으로 해 낼 수 있습니다.
그 힘이 뭐에요? 죽는 힘이다.
죽으라는 것이다.
죽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내가 없어지라는 것이다.
* 소유의식을 버리라.
인간관계속에서 진짜 유의해야 할 것은 소유의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소유의식은 내 남편, 내 새끼,
남편이 내꺼다 내 새끼도 내꺼다 이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내꺼라고 생각하면 내가 하라는 대로 안하면 안된다.
내가 하라는 대로 안하면 맨날 싸운다.
이게 육신이고 사망의 삶이다.
누구껍니까? 하나님꺼다.
내 새끼도 내께 아니다.
내 남편도 내께 아니다.
주장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자식이 내 한 몸으로 느껴집니까?
남편이 한 몸으로 느껴집니까?
성경의 진리는 남편과 한 몸이다.
자녀는 따로 떨어진 것이다.
자녀는 딴 몸이다.
남편은 버려도 되고, 자녀는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남편이 한 몸이고 자식은 딴 몸이다.
정은 마귀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경우가 많다.
자식보다 남편을 몸으로 생각하길 원합니다.
그렇게 안사니까 고난이 온다.
남편이 한 몸이면 남편과 이혼할 수 있겠는가?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되길 원한다.
삶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케 해야 한다.
이삭은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고난이 없었다.
하나님은 부부관계 속에서 한 몸이지만 남편도 맡겼다.
내가 바라는 남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남편이 원하는 아내로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가 해야 될 도리는 남편이 바라는 아내가 되는 것이다.
다 마찬가지이다.
내가 바라는 남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라.
남편이 바라는 아내가 되어보자 그것이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것이 딴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대로 해 주는 것이다.
내가 순종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평강이 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나를 걸러내고 성령을 통과시켜야 한다.
약1:19-20
여러분,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자들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여러분, 화를 왜 냅니까?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 맘대로 안 되니까 주장을 버리지 못하니까 내가 고집피우니까 내 맘대로 안되니까.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대요. 그럼 화를 내야 되겠는가 안내야 되겠는가?
안내야 된다. 내 맘대로 안 되었다고 해도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상16:7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하나님은 내면을 본다는 것이다.
바깥에 들어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을 바꿔야 한다.
안에서부터 사랑이 나와야 한다. 안에서부터 내가 내려놔져야 한다.
안에서부터 그를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맘을 내려놔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랑하는 행위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다.
내 안이다.
하나님이 뭘 보신다고요?
하나님은 내 안을 살피신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분 그것이 안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앉아야 한다. 그것이 될 때까지.
“하나님 내가 왜 그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까? 아직도 나는 내가 너무 강하고 내 안에 하나님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될 때까지 안이 바꿔질 때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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