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영성훈련간증

[스크랩] 작은교회 목회, 나의 사랑 나의 고민

하늘이슬 2017. 3. 24. 15:49

 

 

월간목회 2011.10월호 권두 특집기사.

 

작은교회 목회, 나의 사랑 나의 고민

 

속칭 잘 나가던 대학의 교직원 생활을 접고 목회의 길에 들어선지 17년이 되었다. 포천 송우리에 있는 작은교회에서 6년을 목회했고 예수전도단 DTS 훈련을 거쳐 지금의 교회를 개척하여 6년째 이르고 있다. 지금의 교회도 개척 6년이 되어가지만 좀처럼 양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작은교회다.

 

나는 10년 이상의 직장생활로 인해 신학교 동기들보다 목사임직도 5년 이상 늦었고 목회 역시 그랬다. 늦게 시작했으나 자신은 있었다. 자신감의 근거는 세상적 경험이었다. 제대 후 서강대학교 공채 1기로 입사한 나는 기획관리실에서 6년을 근무하면서 기획업무를 담당했다. 학교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각종 규정들의 제정 및 개정의 일을 했다. 현재 학교의 상징물이 되다시피한 알바트로스 탑(학교설립30주년 기념탑)을 보면 서강대학교 30주년 행사를 맡았던 때가 떠오른다. 부서의 속성상 일을 만들고 지시하는데 익숙했던 나는 목회도 같을 것이라 생각했고 성장도 쉽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첫 목회지인 포천에서 너무도 빨리 알게 되었다. 포천은 한수이북인 관계로 발전이 늦었다. 전기도 늦게 들어왔고 학력도 대체로 낮았다. 20여명의 교인들의 연령 가운데 핵심은 3,40대로 10여명이었다. 나와 연배가 같았으나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인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는 직장 경력을 발휘하여 부지런히 계획을 짜고 교인들에게 지시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는 결코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교인들에게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는 평소에 희망하던 온누리교회 부설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에 입학을 하였다. 그곳에서 2년 6개월을 공부하면서 목회의 여러 가지 기술(설교, 전도, 양육 등)을 배웠다. 가끔 강의에 들어오는 원장이신 하용조목사님으로부터 목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 분의 목회철학 은 나의 목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중 ‘목회의 성공에는 두 가지 요소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것은 목회자의 소명과 지역의 소명이다’, ‘구멍가게(생계수단) 하듯 목회하지 마라’, ‘목회자가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보지 않은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등은 지금도 울림이 되고 있고 남은 목회에도 여전히 울림이 될 것이다.

 

나는 바이블 칼리지에서 배운 것을 도입하여 일대일 양육과 큐티, 관계전도 등을 해 보았다. 그리고 직장생활의 인맥을 되살려 지명도 있는 연예인을 초빙하여 간증집회하기, 기독 교수를 초청하여 학습법 배우기 등도 수시로 하였다. 그러나 행사 때만 반짝할 뿐 유지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목회의 방법들을 모두 사용해보았으나 성장은 되지 않았다. 목회 시작할 때의 자신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게 되었고 그 자신감은 자괴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in put’은 분명 있는데 ‘out put’이 없는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지쳐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침체와 탈진에 빠졌고 사임을 하고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 동료에게서 들은 예수전도단 DTS(예수제자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2년여를 지냈다.

 

8년 전 지금의 인천 검단으로 이사를 와서 6년 전에 개척을 하였다. 목회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으로 외형적 조건은 나름대로 갖추고 있었다.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에서 목회 철학과 기술을 배웠고, 예수전도단에서 영성훈련을 받았고, 직장에서 조직과 행정을 배웠고, 더 나아가 Dale Carnegie에서 하는 리더십훈련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목회는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제자리 걸음이다.

 

이런 작은교회의 목회를 10년 이상 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였다. 가장 큰 것은 목회의 어려움이었다. 특히 성장하지 못하는 목회의 어려움은 그야말로 곤혹 자체였다. 왜 목회의 발전이 없을까? 왜 사람들은 오지 않고, 겨우 오게 했는데 너무도 쉽게 빠져나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이 없다’고 분명히 원인이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인 나 자신의 부족함이다. 목회에 모든 결과에 대한 제일 원인자는 나 자신이다. 전도를 못하는 것도 양육을 못하는 것도 그들이 정착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목회자의 책임이다. 나는 이를 회피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또 하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세상적 조건이었다.

 

첫 목회에서 실패원인은 삶의 배경이 매우 다른 목회자와 교인들의 소통의 문제 그리고 교회 건물이었다. 내가 받은 목회의 비전은 그 지역과 사람들의 필요와 달랐다. 교회는 곧 무너질 것 같이 낡은 상가 건물의 2층에 있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 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건물이 있는 곳을 선호했다. 그들 나름대로 보상심리가 작동했으리라. 지금의 교회는 도로변에서 200미터 떨어진 논 옆에 있다. 마당이 넓고 나무와 꽃이 넘치는 곳으로 전원 수준은 아니어도 정원정도는 되는 아름다운 환경조건을 가지고 있다. 비어있던 2층 단독주택을 임대하여 약간 수리하였고 마당과 조경도 손질을 하였다. 덕분에 방문하는 사람마다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가끔 방문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꺼려했다. 이유는 도로에서 교회 오는 길이 농수로로 인도가 없다는 거였다. 낮에도 사람의 왕래가 드물고 밤이 되면 보안등만 서너개 켜지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자동차와 농기구가 주로 다니는 길을 보행한다는 것 특히 어두운 밤에는 안전에 위험이 많다는 거였다. 어렵사리 등록을 했던 교인들도 얼마가지 않아 떠났다. 나는 교회가 작기에 성장을 해야 하며 그럴려면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헌금을 많이 해야한다는 설교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짐을 진 것처럼 여겨 떠났다. 그런 그들의 깊은 이유는 사람이 적다는 거였다. 사람이 적은 것은 개척교회의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다. 나는 교회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수 없이 눈사람 이야기를 했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눈을 뭉쳐 굴리면서 눈뭉치를 크게 해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크기가 주먹 만 하기에 굴려도 눈이 잘 붙지 않는다. 눈사람 만드는데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애써서 굴리면 커진다. 커지면 더 많은 눈이 붙어 처음보다 훨씬 수월하다. 지금은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작은 눈을 뭉치는 단계이니 2년 정도만 같이 있어 달라.- 그러나 사람들은 인내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연 환경이 좋다해도 지리적으로 접근이 힘들면 그들은 떠났다. 그리고 접근하기 좋고 현대식 건물을 가진 교회로 갔다. 괴롭고 힘들어서 선배들에게 물어봤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지금의 자리가 개척멤버가 있었다면 괜찮은 곳이지만 개척 멤버가 거의 없는 이른바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라면 아주 좋지 않은 곳이니 얼른 나오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전도해도 열매가 없고 와도 정착되지 않는 것. 작은 목회를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다. 사람들은 대개 작은목회의 대표적 어려움을 재정이라고 말한다.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를 시작한 후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아내에게 준 적이 손가락으로 뽑을 정도이다. 이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은 분명 있다. 직장 월급 문화가 덜 떨어졌던 목회 초기에는 마음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재정은 싸움인 것을 예수전도단 DTS 훈련을 통해 체득하였다. 로렌 커닝햄목사님, 오대원선교사님을 비롯한 예수전도단 일꾼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재정은 필요하지만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구멍가게 하듯 목회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필요한 의식주를 채워주셨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듯이 의복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고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공급되었다. 물론 바닥이 날 때도 있었다. 그 땐 어려움이 있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고 그 환경에 불평하지 않고 감사했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것은 정말 감내하기가 힘든 부분이다. 더구나 열과 성을 다하여 섬겼던 교인이 교회를 떠날 때 그 아픔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절규했다.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하실 겁니까? 제발 사람 좀 붙여주세요.’

 

사람이 없다보니 교회가 해야 할 기능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전도나 기도 같은 교회내의 일은 그렇다치더라도 주님이 원하셨던 사회적 섬김같은 지역사회에서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다. 교회의 존재이유가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밝혀 빛 가운데 들어오게 하는 일인데 이 일을 못한다는 것은 교회의 기본적 정체성에 큰 문제였다. 이것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는 컸고 내 몸과 마음을 위축시켰다. ‘나는 어떻게 해도 안 돼’라는 거짓메세지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자존감은 떨어졌고 스스로 무력해졌다. 나는 분명 구멍가게 하듯 목회하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해 목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목회 실패 콤플렉스가 되게 했다. 그래서 나름 목회에 발전이 있는 친구들이나 사람을 보면 긍정과 존경보다는 부정적 마음이 먼저 들었다. 특히 친구들의 목회 발전소식을 들을때면 원치않게 비교하게 되고 내 자신의 현실 때문에 축하의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음 밭 정서가 메말라 버린 것 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작은교회는 단점들만 많고 장점들이 없을까?

많은 사람들은 작은교회의 대표적 장점으로 가정적분위기를 말한다. 목회자와 교인들, 교인들과 교인들의 관계가 가족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공유함으로 서로의 환경을 잘 알아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동고동락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 맞는 말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그랬다. 그럼에도 현대의 문화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 작은교회에 교인들이 정착하지 않는 이유는 현대인들은 자기의 생활이 타인으로부터 침해당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를 원하는데 작은교회는 젓가락하나까지 공유하려고 하니 싫은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적당히 숨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대형교회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가정적 분위기가 장점이라는 말은 맞는 말임과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담임 목회자와 교인의 친밀함은 큰 교회보다 훨씬 크다. 몇 해 전 일이다. 대형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어느 집사님이 개인의 문제를 상담하러 왔다. 대화가 끝난 후 헤어질 때 기도를 해주었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도 그는 한 동안 눈을 감고 있었고 가슴은 뛰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생전에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 비록 출석교회 담임목사님은 아니지만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아 가슴이 뛰고 감동이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가 출석하는 대형교회에도 담임목사 뿐 아니라 부목사도 많고 부목사에게 기도도 많이 받았지만 감동이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 교회가 500명만 넘어가면 담임목사에게 직접 기도 받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나 작은교회는 언제 어디서든지 담임목사와 교제할 수 있고 이는 개인신앙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러면서도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중시여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도 채워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한 대안으로 교회중심 신앙생활에서 삶 중심의 신앙생활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삶 중심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모여 하는 신앙생활 패턴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모임을 줄이고 가정, 직장, 학교 등 개인들이 소속된 공동체중심으로 생활하게 한다면 교회에서 자주 모이는것에 대한 부담감도, 이로 인한 개인생활의 침해 등도 사라질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전문가들의 실천적 연구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작은교회의 진정한 강점은 주님이 원하셨던 교회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는 건강한 비전을 가진다. 사람의 조직이나 방법보다는 주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본질인 말씀선포, 양육, 사회적 섬김에 더 충실할 수 있다. 그러다 교인이 많아지면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조직이 개입하고 그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인간적 갈등이 일어난다. 마음과 생각은 초심을 유지하고 싶지만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이에 비해 작은교회는 본질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유리하다. 그렇기에 작은교회를 살려야 한다. 교회 규모로 보는 한국교회의 구조는 지극히 비정상이다. 전체 90%이상이 교인 100명 미만이라고 하고 10%만이 교인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삼각형구조도 아닌 머리와 끝만 있는 직사각형위에 그 보다 10분의 1 밖에 안되는 작은 직사각형이 있는 아주 희한한 구조이다. 흔히 건강한 구조를 말할 때 항아리 형을 말한다. 아래 위가 엷고 중간층이 두터운 형태이다. 국가나 사회도 중산층이 두터울수록 선진국, 성숙한 사회라고 한다. 교회도 건강한 작은교회가 많이 생겨야 하고 이런 교회들이 한국교회에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 몇몇 대형교회들 중심 일변도인 한국교회는 이로 인한 많은 부작용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작은교회들이 많아지고 서로 연합한다면 그 부작용들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오히려 작은교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시중에 회자되는 말 가운데 한국교회는 1년에 2천교회가 설립되고 3천교회가 폐쇄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적 통계에서 나온 말인지 몰라도 작은교회의 위기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작은교회를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말대로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희망하는 교회들밖에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작은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최근에 이 말은 한국교회의 거부할 수 없는 화두가 되고 있다. 작은교회를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큰 교회들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그 동안 큰 교회들이 작은교회를 도운 방법들은 대개는 재정지원, 프로그램 지원이었다. 물론 드물게 건물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재정지원은 일반적 방법이고 프로그램 지원은 큰 교회의 좋은 프로그램을 숙달된 교인이 작은교회에 가서 가르쳐주는 것이다. 최근에 왕성하게 일어나는 작은교회 살리기 운동의 핵심은 작은교회 목회자들에게 전도의 열정을 심어주고 전도용품을 주어 전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낙심한 목회자에게 좋은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모두가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목회자 개개인의 성향과 기질, 목회적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정지원, 프로그램지원, 강력한 동기부여 등 좋은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은교회를 살리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면 이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국민일보 2009년 4월 8일자 33면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감리교회의 모태격인 정동제일감리교회는 교회의 전도대장 부부를 성남에 있는 작은교회로 파송을 했다. 당시 작은교회는 출석성도가 7명이이었다. 그러나 파송이 된 한 달 뒤에 20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단순히 숫자적 증가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작은교회의 교인들의 숫자가 단순히 늘어난 것이 아니라 성장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낙심으로 가득한 작은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 동안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작은 교인들이 파송받은 일꾼들을 통하여 ‘우리도 하면 된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전도대장 부부는 작은교회의 출석성도가 100명이 될 때까지 작은교회에 출석하면서 전도를 비롯한 프로그램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전했다. 파송한 정동제일교회 담임인 송기성목사는 “작은교회를 살리려는 우리 교회의 노력이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돼 침체된 한국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고 취재한 유영대기자는 기사의 제목을 ‘작은교회를 살리는 새 길 제시’ 라고 하였다. 큰 교회에서 훈련된 사람을 일정 기간 또는 일정 규모에 도달할 때까지 보내는 것이다. 작은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전도, 양육, 주일학교 교사, 찬양 은사자 등을 보내는 이 운동은 작은교회를 살리는 데 새로운 길임이 분명하다. 이 운동은 파송하는 교회에도 많은 유익함을 줄 수 있다. 큰 교회는 일 할 사람이 많다. 공동체에 있어서 흔히 8:2라는 법칙이 있다.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규모에 관계없이 전체의 20%라는 것이다. 이 말은 불만스럽지만 공감을 준다. 큰 교회에서 애써서 훈련된 사람을 파송하면 막말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가져가는 모양이 아니냐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근시안적 생각이다. 훈련된 사람을 파송하면 금방은 눈에 안 보여 아쉽지만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 즉 80%라는 거대한 잠재 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넓은 눈으로 보면 일꾼을 한 명 더 키울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교회가 거룩한 공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 교회에서 기른 일꾼 내 교회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뛰어 넘을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도 안디옥교회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것을 보면 이 운동은 성경적 근거도 가지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주보에 ‘선교사파송’ 부분을 기록한다. 파송지가 국내라는 것 외에 원리와 방법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부교역자가 개척을 할 때 재정 뿐만 아니라 교인을 보내는 교회들이 늘고 있고 비단 부교역자 개척보낼때만 아니라 지역에 있는 작은교회들을 위해 교인들을 파송하고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더 나아가 작은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대형교회의 꿈, 무한성장하는 꿈을 버리고 건강한 작은교회를 만드는데 비전을 가져야 한다. 대형교회는 누구나 이룰 수 없다. 조용기목사를 비롯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어야만 가능하다. 목회 시작시점부터 건강한 작은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목회적 달란트를 개발하여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발전을 주실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건강한 작은교회를 정체성으로 가지면 교회가 발전하여 일정 규모에 이르면 멀지 않은 거리에 분립한다. 분립한 교회는 어렵지 않게 자립하고 또 발전하고 분립한다. 이런 일들이 연속 일어나면 지역 복음화에도 지대한 공을 세울 수 있다.

 

이렇게 큰 교회는 교인들을 파송하고 작은교회는 그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기반을 닦고 자립을 쉽게 하고 그리하여 발전을 하면 또 작게 분립하는 이런 맥락을 유지하면 큰 교회와 작은교회의 상생은 물론 작은교회들이 한국교회의 구조를 건강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출처 : 건강한 작은교회의 꿈
글쓴이 : 푸른솔 유인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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