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째주-2)
Ⅳ. 영혼과 영성 –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
오늘 우리가 첫 시간에 볼 것은 주제 강의가 되겠습니다.
우리 성경말씀 한 구절 보겠습니다.
성경말씀 고린도후서 4장 16절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부터 5장 10절까지 보겠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5장 1절부터 10절까지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오늘 여러분과 제가 나눌 것은 뭐냐면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는 제목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여러분 겉사람은 후패하게 되어 있지요? 그죠.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날로 새롭다.
여러분 우리는 겉사람, 겉사람은 뭡니까?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점은 뭡니까?
겉사람은 보이는 나죠. 보이는 나. 겉사람이죠.
이것을 우리는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적인 사람.
그런데 속사람은 뭐냐면 그 겉사람 안에 있는 영을 우리는 속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되어져야 되냐면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어져야 진짜 날마다 발전해 있는 신앙인인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겉사람은 후패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나이가 들면서 후패하죠. 그죠.
나이가 들면서 후패합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속은 어떻게 되어야 되냐면 날로 새롭게 되어야 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래서 여러분 나이 많은 사람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겉모양은 후패해 보이지만 그 안은 천국에 가깝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많이 쌓인 사람들을 보면 겉모양은 하얀 머리로 하얗잖아요. 그래서 겉은 아주 힘이 없어 보이고 후패하여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그렇지만 속은 어떻다는 거에요? 속사람은 하나님과 여러분보다 더 가까이 지낼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이 하죠.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뭡니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육체입니다.
나의 육체가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만약 땅에 있는 장막집, 지금 있는 이 육체가 없어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게 있는 줄 아나니, 이게 뭐냐면 우리가 새롭게 부활할 그 몸이죠. 부활될 몸, 부활될 몸이죠.
그게 새로운 장막이 될 것이죠.
이 장막집,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장막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막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있는 몸은 벗고 정말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진짜 소망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이 소망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라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할렐루야.
우리 주님도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부대끼는 속에서 내가 항상 잊어버리는 게 뭐냐면 ‘나는 부활할 것이다.’하는 그 소망을 잊어버리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몸은 벗고 정말 영원히 썩지 않을 그 몸을 입고 살 것이다. 얼마나 그게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몸은 지금 입고 있는 몸은 아플 수도 있어요.
불구가 있을 수도 있어요. 눈이 멀 수도 있어요.
장기가 하나 없을 수도 있어요. 팔다리가 하나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입을 영원한 집은 천사와 같다고 그랬잖아요.
몸이 주님이 입은 몸같은 문을 그냥 통과하고 먹고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아프지 않고 영원히 슬픔이 없고 아픔이 없는 그런 몸을 입는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4절을 보면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몸은 죽을 거라는 거죠.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는 그 몸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사도바울은 삼층천을 갔다 왔어요. 그래서 부득불 내가 자랑한다 그랬어요. 삼층천에 갔다 온 것을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 그랬어요.
그가 말하기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바깥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그런 얘기를 하죠. 자가기 그 경험한 것을.
삼층천에 가서 사람들에게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고 많은 것을 봤어요.
그가 하는 얘기가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이 몸은 죽고 썩고 없어질 몸이지만 우리가 새롭게 입을 그 몸은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몸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그렇죠. 그죠. 몸에 거할 때는 주와 따로 거한다. 그분은 영이시고 우리가 몸 안에 있을 때에는 육신으로 행할 때에는 주와 따로 행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여러분 사도바울은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정말 믿는 자는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다는 거에요.
이게 진짜 믿음의 사람의 말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거에요.
나 이 몸에 있고 싶지 않다는 거에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9절에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육신의 몸에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여러분 내가 몸에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그러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많은 것에서 초월해야 됩니다.
세상 것에서 초월해야 됩니다.
많은 것에서 해방을 받아야 되요.
그래야 거하든지 떠나든지에 대해서 내가 사는 것도 주님의 뜻이요, 죽는 것도 가는 것도 주님의 뜻이다.
여러분 보세요. 죽음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떠나는 것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죽음은 뭐냐? 영원한 삶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그렇게 표현하죠.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할렐루야.
새로운 시작, 그런데 이게 무서운 것이잖아요.
내가 이 땅위에서 어떻게 행했는가에 따라서 내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은 다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영원한 삶의 시작, 이게 예수 믿지 않은 자는 다른 곳으로 가고, 예수를 믿은 자는 또 다른 곳으로 가고, 이 세상에서 영이 몸의 장막에서 떠나는 사건은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을 얘기하는데 그 시작 영원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그 시작을 생각할 때 여러분 우리는 좀 두렵고 무서움을 좀 느껴야 되요.
내 삶은 어떨 것인가?
여러분 저 세상에서의 삶을 준비하지 않는다. 준비, 여러분 준비해야 되죠.
저 세상에서의 삶을 준비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는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장막집 이게 겉사람이라고 그랬잖아요. 겉사람은 이 장막집을 얘기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해도 되요.
결국 이 겉사람은 벗습니다.
벗는다는 것이 바로 죽음을 얘기하죠.
겉사람은 벗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이 겉사람을 벗는 순간부터 영원한 몸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몸을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위에서 좀 장막이 불편하고 좀 질병에 걸렸고 이런 것들이 그렇게 큰 슬픔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자는 내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노라. 할렐루야. 그렇게 살아야 되요.
저는 이런 말씀들이 참 위로가 됩니다. 너무 너무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왜 평강이 옵니까?
예수 믿는 자에게 왜 평강이 옵니까?
이런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평강이 오는 거에요. 할렐루야.
내가 이 땅위에 살 동안에는 좀 불편하고 좀 환난을 당해도 좀 고난이 있어도 저 세상에 가면 너무나 좋은 게 기다리고 있는데. 할렐루야.
그래서 주를 위한 고난이 없는 자 주를 위한 고난이 있어야 되요.
우리 베드로전서 1장 4절 가 봅니다. 다같이 시작.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러분 우리의 기업은 영원한 기업이 있는데 어디에 있냐면 하늘에 간직하고 계시다는 거에요.
그 기업이 뭐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여러분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기업, 그 기업이 하늘에 우리를 위해서 간직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될 것은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 거에요? 하늘나라에다.
우리가 받을 기업이 어디 있냐? 하늘나라에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요. 영원.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요.
그리할 때 우리는 내 속사람이 내 영이 새롭게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땅을 바라보면 힘이 쫙쫙 빠져요. 기쁨이 없어요.
여러분 그건 것 경험 못합니까?
저는 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 새로운 몸을 입고 주님과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당하는 환난은 그냥 넘어갈 수 있어요. 할렐루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어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기쁜지.
여러분도 그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겉사람이 후패하는 그 이유를 보면 무엇 때문에 겉사람이 후패합니까?
첫째는 운명이다. 운명인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면 어떻게 되요? 겉모습이 겉사람이 어떻게 되요? 늙고 병들고 쇠약하게 되고 이게 운명적인 것이라는 거죠. 겉사람이 후패하는 것은 운명적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세월을 이길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모세가 뭐라고 그랬냐면 너희가 살 날을 계수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살 날을 계수하라. 살 날을 계수하면서 살아라.
여러분 제가 가만 보니까 제가 앞으로 십년을 더 살지 이십년을 더 살지 삼십년을 더 살지 아무도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제가 앞으로 십년 살아도 땡큐. 땡큐 갓. 아멘이죠!
제가 이십년을 살아도 땡큐 갓! 삼십년을 살아도 땡큐 갓!
왜? 아까 그랬잖아요. 여기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할렐루야. 가면 어디 간다는 거에요? 주님한테.
이 세상에 있으면 고난과 환난과 또 주를 위해서 그런 일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내가 떠나든지 거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아멘.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뭘 잘 알아야 되냐면 진짜 나는 여러분 뭡니까?
진짜 나는 영입니다.
영이다. 진짜 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무엇을 위해 돌아가셨냐면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죽어서 지옥을 안 가는 것,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받은 그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셨어요.
그럼 진짜 나는 누구냐? 진짜 나는 뭐냐? 영혼이라는 거에요.
내가 입고 있는 이 몸은 장막집에 앞으로 벗을 장막집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날마다 대하지 아니하면 나는 어느새 내 육신이 난줄 알아요. 겉사람이 난 줄 알고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헛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가만히 한번 보세요.
겉사람이 난 줄 알고 살아요. 모두 다. 가만히 한번 보세요.
교회 와서 앉아있을 때에만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하지만 나머지 시간에 지금 사람들은 겉사람이 나인 줄 알고 살고 있다는 거에요. 겉사람을 위해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헛된 삶이냐 이 얘기입니다.
우리는 겉사람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속사람을 위해서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속사람이 나의 영혼이라고 그랬어요. 내 영, 내 영혼.
진짜 나는 내 속사람으로서 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잘 보세요.
이 겉사람은 세상을 좋아합니다.
마귀적이죠. 왜냐하면 늘 마귀에게 넘어가니까.
그런데 속사람은 하나님과 영원을 사모합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원을 사모합니다.
세상을 사랑치 않습니다.
참 다르죠. 그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나 땅에다가 소망을 두고 살게 되면 안되는 거죠.그죠. 이 세상이나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가 아니라 영원속에서 하늘나라에 대한 그것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가 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10절 다같이 시작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우리는 믿음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거 있죠.
믿음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 믿음을 자꾸 드려야 되요.
말씀을 들을 때는 믿음이 있는 거 같은데 세상에 가서 하루만 살다 오면 살다보면 믿음이 하나도 없는 거 같은 그런 거 경험 못해보셨습니까?
저는 늘 경험합니다.
하루만 내가 말씀 안 대하고 하루 이틀만 내가 말씀을 전하지 않고 보지도 않으면 저도 똑 같아요. 저도 믿음이 많이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 믿음 지키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대하라. 할렐루야. 듣고 기도하고 내가 자꾸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려고 그래야 되요. 여러분 이 사도바울은 이 믿음에 있어서 얼마나 확실했는지 모릅니다. 왜냐 낙원에 까지 이끌려 가서 가히 사람들에게 듣지 못할 말까지 다 듣고 왔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그 믿음이 확실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복음 전할 때도 매 맞고도 전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자지도 못하고 바다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거짓말하는 형제의 위험과 모든 위험을 다 무릎쓰고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요.
여러분 내 믿음이 내가 믿음이 자꾸 생기려고 그래요. 믿음이 확실한 자가 승리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는 거 같으면 빨리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왜? 믿음은 실제니까. 하나님은 실제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니까.
그분은 정말 여기도 계시고 내 삶에 철저하게 관여하고 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내 삶에 일일이 다 간섭하시고 그분은 실제라는 거에요.
그분은 실제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감고 사는 고양이 ‘아웅’하는 사람같이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순간순간 잊어버리고 어느새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나의 모습, 여러분 그런 모습 자신은 보지 못합니까?
저는 제가 저를 한 번씩 발견할 때 서럽고 슬프고 내가 또 왜 이러나? 저도 그런 생각 드는 때가 있거든요.
정말 가끔씩, 근데 참 비참해요.
비참해지더라구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믿음이라는 게 정말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하나님
바깥에서의 삶, 내가 어느새 보면 하나님 바깥에 가서 살고 있어요. 빨리 하나님 안으로 다시 돌려놔야 되요. 할렐루야. 정말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성경에 있는 말씀들이 한마디 한마디를 보면 하나님의 존재가 실제고 믿음의 말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꾸 읽어야 되요.
우리도 그 믿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아멘입니까? 아멘.
여러분 저만 약한 존재입니까?
저만 이렇게 자꾸만 믿음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그렇게 하는 저만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으면 나의 믿음은 어느새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게 뭡니까? 겉사람으로 사는 거죠. 내가 겉사람으로 선택해서 사는 것이죠.
진짜 나는 속사람인데.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늘 조심해야 될 것은 자꾸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가 영이라는 걸 생각하고 그리고 영원을 바라보고 살고 그래야 정말 그 믿음이 정말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져요.
그 믿음도 계속해서 쌓여져서 정말 믿음을 보여줘야 될 때 그 믿음이 나오는 거에요. 하루아침에 믿음이 생겨나서 예를 들어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물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으면 괜찮은데 없는 상황속에서 그렇게 갑자기 믿음이 보여지냐? 그렇지 않습니다.
늘 믿음을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겉사람이 후패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겉사람이 후패하는 이유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는 이것은 생명의 문이라고 그랬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해서 들어가는 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는 자는 겉사람이 후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겉이 반짝반짝 해요.
여러분 우리가 영성, 영성 하는데 영성이 뭐냐?
그리스도는 번쩍번쩍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낮은 데로 임하셨어요.
아니 이 세상에 구원주가 임하는데 방이 없어서 구유에다 애를 낳았는데 왕이 태어났는데 말구유에다가 뉘었어요.
구유가 얼마나 딱딱한지 아십니까? 나무야 나무.
여러분 무슨 침대를 깔아놓고 푹신한 곳인 줄 아세요?
요즘은 애들 태어나기 전에 다 마련하잖아요. 애기 침대도 마련해 놓고 푹신한 데가 아니라 아주 딱딱한 그 애가 처음에 세상에 나왔는데 아주 딱딱한 나무 거기에 누워진 거에요.
그게 주님이 택하신 침대입니다.
그리구요, 그분은 번쩍번쩍 빛나는 금마차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분이 아니라 아주 낮고 낮은 나귀새끼, 나귀새끼가 주님, 성인을 지탱하기 힘들었을 거잖아요. 고개 푹 숙여갖고 걷는 것도 뒤뚱뒤뚱 했을 거 같아요.
그런 모습 속에서 주님이 택하신 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번쩍번쩍한 길이 아니었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는 겉사람이 후패하여 보입니다.
여러분 생명적인 삶이 뭐냐면 생명적인 삶은 누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생명으로 사는 삶이 뭐냐?
이 삶은 모국어를 얘기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 모국어를 얘기할 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한국어를 얘기할 때 문법을 생각하고 무슨 문장 차례를 생각하고 단어를 생각합니까? 그냥 말하잖아요.
한국말 할 때 여러분 뭐 생각할 것 있어요? 그냥 내뱉잖아요. 그죠.
그래요? 안 그래요?
모국어를 얘기할 때 생각해요? 안 해요?
영 얘기할 때는 좀 생각하죠.
그런데 생명적인 삶이라는 것은 뭐냐면 고민이 없어요.
고민이 없다. 내 안에 다툼이 없는 삶입니다.
어떤 때 다툼이 없냐?
생명적인 삶은 그냥 흐르는 거에요. 모국어를 얘기하는 것처럼 그냥 편해요.
뭐냐면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내가 아껴서 안 쓸 수 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삶이 되어버린 거에요.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내가 안 쓰고 다른 사람 주는 거에요.
그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내 안에 다툼도 하나도 없어요.
그냥 그렇게 당연히 사는 것처럼 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생명적인 삶은 누군가 얘기했어요. 모국어를 얘기하는 것과 같다.
내 안에 그것에 대한 다툼이 있다면 아직 나는 생명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 거 같아요.
겸손이라는 것도 내가 겸손해져야지 이게 아니라 생명적으로 겸손해진 자는 그냥 겸손이 베어져서 모국어를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거에요.
너무 기가 막힌 얘기지요.
그래서 생명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별로 간증이 없어요.
그냥 살 뿐이야.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모국어를 얘기하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살고 있어요. 아멘.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생명적인 삶이 어떤 부분에서는 잘 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직도 안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영역을 자꾸 넓혀가야 되요.
아멘입니까? 아멘.
이 면은 잘 되는데 저 면은 아직 안될 수 있어요.
생명적인 삶이 요 면은 잘 되는데 저 면은 안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천국은 정말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영역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넓혀가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적인 삶을 살기로 한 자는 어떠한가?
겉사람이 후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후패하게 됩니다.
겉사람이 반짝거리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마태복음 7장 13절가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러분 우리의 삶속에서 주를 위한 고난을 택하는 자, 주를 위한 고난이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한 고난을 택하는 자는 좁은 길을 택해서 가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의 삶속에서 생명적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걸 버리고 주의 길을 선택해서 간다. 이것도 생명적인 길입니다. 그게 아무런 다툼이 없이 고민이 없이 주를 향해서 가는 거에요.
모든 것을 받쳐서 이게 생명적인 삶이에요. 그 면에 있어서.
그게 주를 위한 고난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 저 하늘나라에서 다가오는 여기서 당하는 경한 환난에 비하여 저 하늘나라에서 마련된 것은 중한 것인데 그 영광이 여기서 당하는 환난과 비교할 바가 안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 때에 생명의 문으로 좁은 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고난을 사랑하고, 고난을 사랑해야 되요.
많은 설교가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많은 설교가 이 세상에서의 평안 행복 잘 되는 것, 이런 것에 아직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정말 생명의 길은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냐?
좁은 문 좁은 길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뜻이 내가 고난받는 것이면 고난 받는 것이에요.
주를 위한 고난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추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이것을 얘기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됩니다.
보이는 것들은 잠깐 우리에게 기쁨을 줄지 몰라도 잠깐 나에게 만족은 줄지 몰라도 진짜 나의 기쁨은 진짜 나의 만족은 보이지 않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입니까? 아멘.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그분이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 그 말씀들이 진짜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정말 보이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늘 소망하며 따라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한 군데만 찾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 25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나 더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18절 한번 보도록 합니다. 다같이 시작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겉사람을 중요시하고 겉사람을 위해서 사는 그 삶은 다 낭비되는 정말 솔로몬이 얘기하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아버지 하나님 그것에 대하여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는 겉사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속사람을 위해서 달려가는 우리 모두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속사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너무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미 속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겉사람을 벗게 되는 경우에 우리는 속사람은 새로운 정말 영원히 썩지 않을 새로운 몸을 입을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갖고 다시 힘있게 다시 주님 때문에 넉넉히 이기며 세상을 이기며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하옵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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