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
사람들이 앞만 보며 부지런히 나를 앞질러갔습니다
나는 산도 보고, 물도 보고, 눈도 보고, 빗줄기가 강물을 딛고 건너는 것도 보고
꽃 피고 지는 것도 보며 깐닥깐닥 걷기로 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
겨울은 봄바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요
봄은 세상에서 매미 소리가 제일 무섭대요
여름은 귀뚜라미 소리가 제일 무섭고요
가을 햇살은 눈송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대요
** 지구의 일 **
해가 뜨고
달이 뜨고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잎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 불고
살구가 노랗게 익어 가만히 두면
저절로 땅에 떨어져서 흙에 묻혀 썩고
그러면 거기 어린 살구나무가 또 태어나지
그 살구나무가 해와 바람과 물과 세상의 도움으로 자라서
또 살구가 열린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신기하니?
또, 작은 새들이 마른 풀잎을 물어다가
가랑잎 뒤에 작고 예쁜 집을 짓고
알을 낳아 놓았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이니?
다 지구의 일이야
그런 것들 다 지구의 일이고
지구의 일이 우리들의 일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 지구의 일을 방해하면 안 돼
** 지구의 일 **
저기 저 가만가만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풀잎 한줄기가 그냥 흔들리는지 아냐
나도 풀잎처럼 아픔없이 휘고 싶다
온갖 것들 다 게워내고
햇살이 비치는 맑은 피로
나도 저렇게 부드럽고 연하게 가만가만
흔들리고 싶다
가만히 땅위에 누워서 텅빈 하늘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고 싶다
저기 저 흔들거리는 상수리 나뭇잎 하나
땅 위에 바로 선 풀잎 한줄기가 그냥 흔들리는지 아냐
지구의 일이다
** 편지 **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말과
당신의 글이
다
내 마음과
내 말과
나의 글입니다
** 그 꽃 못 보오 **
안 가고 보지 않아도
뒤안의 목단꽃은
내 발 아래 똑똑 떨어지는데
해 지고 산 그늘 내리면
차마 뒤안에 나는 못 가오
행여, 행여나
나 볼 때 꽃잎이라도
내 발 아래 뚝뚝 떨어진다면
참말로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꽃 본다요
두 눈 뜨고 그 꽃 못 보오
그 꼴 나는 못 보오
** 워매, 속 탄 것 **
워매, 날씨 환장허게 좋아부네
날이 날마다 이렇게 날이 좋아불면
저기 저 남산에 봄바람 살 불어불도
저기 저 남산에 꽃 펴불겄는디
저기 저 남산에 꽃 펴불면은
바작바작 타는 봄잔디 같은 내 가슴
봄불 확 불어 활활 타겄는디
워매, 속 탄 것
워매워매 속 뜨건 것
저기 저 남산에
봄바람 불동말동허고
요내 가슴에는
불이 일듯말듯허니
워매, 속 탄 것
워매워매 속 뜨건 것
** 나도 꽃 **
수천 수만 송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생각에 생각을 보태며
나도 한송이 들국으로
그대 곁에
가만가만 핍니다
** 인생 **
사람이, 사는 것이
별것인가요?
다 눈물의 굽이에서 울고 싶고
기쁨에 순간에 속절없이
뜀박질하고 싶은 것이지요
사랑이, 인생이 별것인가요?
** 짧은 해 **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갈대가 하얗게 피고
바람 부는 강변에 서면
해는 짧고
당신이 그립습니다
** 그 나무 **
꽃이 진다
새가 운다
너를 향한 이 그리움은 어디서 왔는지
너를 향한 이 그리움은 어디로 갈는지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사랑에는 길이 없다
나는 너에게 눈멀고
꽃이 지는
나무 아래에서 하루해가 저물었다
** 산도 물도 **
당신 앞에 서면
산도 물도 꽃도
지워집니다
** 마을회관 **
이월매조다
팔월공산이다
똥 안 먹고
뭐한다냐
하루종일
80원 잃었다
** 하동 배꽃 **
긴가민가 아른아른 아른거리고
간 지 온 지 한들한들 웃기만 하네
흩날리는 한 점 꽃잎 잡아
강물 위에 어른어른 띄워놓고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발 헛디디며 나는 왔네
** 스님이 **
길가에 두꺼비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두꺼비가 살며시
눈을 떴다가 도로 감아버립니다
저놈, 무슨 큰 걱정이 있나?
** 아이가 **
길가에 두꺼비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두꺼비가 끔뻑끔뻑
눈을 떴다 감았다 합니다
야, 너 나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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