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233. 바른영성훈련 성장반 역대상 -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 - 서사라 목사님

하늘이슬 2021. 2. 24. 16:14

 

233. 바른영성훈련 성장반 역대상 -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 - 서사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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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131-8

 

여러분

하나님의 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일정한 사람위에 머리 위해 임하시는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임하셔서 말씀을 주시고 그렇게 했지요.

물론 모세하고는 대면하여 얘기했습니다.

대면하여 얘기한 자지만 대개는 선지자들에게는 말씀이 임하시니라 임한다는 말을 하죠.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차이가 뭐냐면 구약에서는 바깥에서 임하셨지요.

성령님이.

신약에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도 하고 우리와 함께 회중 속에 거하시는 그래서 성도들끼리 교제할 때도 함께 하시는 그런 하나님, 함께도 하시고 안에도 계시고, 물론 은사가 임할 때는 또 방언이 임할 때는 또 이렇게 임하는 역사도 신약에서는 일어났지만 구약에서는 주로 신약에서 일어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깥에서 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왜 옮겨 오냐?

다른 데서 옮겨옵니다.

옮겨 오는 이유가 그 하나님의 궤에는 두 그룹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이렇게 궤가 있는데 이 궤를 메어서 양쪽에 메어서 꿰어서 나르는 대가 있죠.

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걸 메고 옮기는 거죠.

그런데 이 위를 덮는 그룹이 있었어요.

천사가 있었죠. 그죠.

천사가 있어가지고 천사 날개가 이쪽에 연하여 이렇게 연하여 있고 여기도 이렇게 되어 있지요. 두 천사가.

그러면 이 제사장은 여기다가 무릎을 꿇고 여기에다가 손을 얹고 이렇게 이제 회개하고 그 두 그룹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랬죠. 그죠.

그러니까 이 두 그룹 사이에 지금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지요. 그죠.

그래서 이 하나님의 궤는 이름을 하나님의 궤라고 하나님의 그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이것을 하나님의 궤라고 말을 한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죠. 그죠.

 

하나님의 궤의 의미는 그들에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궤의 의미를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시는 임재의 기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

하나님의 임재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궤를 먼저 움직였어요.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 하나님의 궤를 누가 메었냐면 제사장들이 메고 항상 진행했지요. 그죠.

요단강이 갈라질 때도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요단강 물에 첫발을 디딘 자들도 누구냐면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발을 디뎠더니 요단강물이 쫙 갈라졌습니다.

그러니까 늘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앞세웠다는 거에요.

 

여기에는 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항상 앞세웠다.

하나님을 앞세웠다는 거죠. 그죠.

 

두 번째는 여리고를 돌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을 앞세워서 뭐했어요?

여리고를 돌았어요.

그랬더니 여리고가 나중에 무너졌습니다. 그죠.

 

그 다음에 세 번째 그들은 전쟁에 나갈 때도 하나님의 궤를 항상 앞에다가 세웠어요.

여러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궤를 항상 앞에다 두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아주 이런 일들은 요단강에 들어서거나 여리고가 무너지는 사건이나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의 궤를 앞세워 나간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죠?

 

여러분 이게 뭐냐면 결국 뭐냐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이걸 인정하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할렐루야~

이것을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항상 앞에다가 그들이 모시고 다녔던 이유가 뭐냐면 우리는 할 수 없사오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 우리를 선민 삼아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백성 삼아주신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결국 그렇게 인정할 때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셨습니까? 안 해결해 주셨습니까?

다 해결해 주셨어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우리도 어떻게 해야 되냐면 항상 어떤 일에 있어서나 누구를 앞세우라는 겁니까?

하나님을 앞세워야 되요. 하나님을.

하나님을 앞세워야 된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나 나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나 사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생각이 앞서면 안되고 내가 아니라 내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울 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불가능도 가능케 하시고 또 그들은 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싸우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앞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먼저 앞세워서 나간다는 게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무얼 의미하냐? 이겁니다.

맡기는 거

이 맡기는 것은요 맡기는 겁니다.

이 맡기는 게, 맡기는 게 뭡니까?

여러분 예를 들어서 누가 나에게 어떤 숙제를 맡겼어요.

근데 내 힘으로 안 돼. 숙제가 내가 풀고 내가 풀만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누구한테 가서 맡깁니까?

잘 푸는 사람.

잘 하는 사람에게 가서 좀 대신 좀 해주세요.

이게 맡기는 거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맡긴다는 의미를 지금 말씀드리는 건데.

내 힘으로는 풀 수가 없는 문제에요.

그러니까 누가 숙제를 해 내려고 왔는데 도저히 내가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요?

맡길 수도 있는 거에요. 잘 하는 사람한테 가서 이거 좀 풀어 주세요. 하고 맡깁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평안하게 그죠? 맡겨 놓고 평안하게 있을 수 있는 거에요.

이게 맡기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을 앞세우는 거에요.

어떤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의미를 캐치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맡긴다.

이게 하나님을 앞세우는 거지요.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이 손 위에 올려놓습니다.

손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믿어야 되요.

올려놓고 나는 모른다 이게 아닙니다.

그 마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다 아시잖아요.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계셔요.

아이구 하나님이 하실 거에요. 그리고 나는 상관 안한다는 이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한테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이 하실 것을 바라보는 거, 바라보는 거, 올려놓고 바라봐야 돼요.

하실 것을 믿고 바라봐야 돼.

이게 올려놓고 믿고 바라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바라봐야 된다는 거에요.

그냥 내팽개치는 게 아니에요.

이게 하나님을 앞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일을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중요한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여러분 금방 물어본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맡겨놓고 이게 맡긴다. 이게 맡기는 거죠.

주님을 앞세우는 것은 올려놓고 믿고 바라봐야 됩니다.

주님이 하실 것을 바라보는 겁니다.

바라본다는 건 내 안에 내 기도 속에 있는 거죠. 그죠.

내 안에 기도 속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제 이렇게 해 놓고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조금 조급한 게 오잖아요.

그럴 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습니다.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이 어떻게 아냐면요?

물으면 우리가 방언 기도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냐면 방언 기도할 때 여러분 묻지 않습니까?

방언 하면서 하나님한테 막 물으면 방언할 때 막 묻잖아요.

방언으로 묻는다.

그럼 하나님은 방언으로 대답하셔요.

방언으로 대답하신다.

내가 방언하는 속에 하나님의 대답이 들어있어요.

그것 못 느끼셔요?

그러면 내가 방언으로 묻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방언으로 대답을 하시는데 이것이 통역이 되어질 때 내가 묻는 것도 통역이 되어지고 그건 내가 자의적으로 어떤 질문을 갖고 방언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 하나님은 방언으로 대답하셔요.

그럴 때 이게 통역이 되어지면 나는 즉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요.

뜻을 알 수 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얘기를 갑자기 하냐면요?

방언 통역이 되어져야 한다는 거야.

여러분이 3년을 예를 들어서 영성훈련을 받으러 다니고 또 집에서 열심히 두세시간씩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려고 애를 썼고 물으려고 애를 썼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영성훈련 다니면서 내 방언이 통역이 안된다 그럼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있는 얘기에요.

방언이 통역이 되어져야 돼요.

그럼 통역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열심히 달라고 구해야 됩니다.

달라고 구해라.

여러분 다 줘 있는데도 여러분이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통역 내가 내 인식 속으로 알 수 있는 언어로 번역이 안되기 때문에 모르는 거에요.

 

근데 저는 어떻게 했냐?

방언을 할 때, 방언할 때 열심히 하나님 내가 하는 방언을 통역만 하게 해 주시면 제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내가 은혜받고 나서 난리를 피는데 내가 하나님의 뜻만 내가 방언하는 그 뜻만 다 알게 해 주시면 내가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주시더라구요. 안 주셔요.

1년을 안 주셔요.

그렇지만 1년 동안 열심히 기도했지요. 달라고.

근데 어느새 제 방언이 통역이 되고 있는 거야 나도 몰라.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몰라요.

어느새 내가 하고 있는 거에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도 몰라요. 언제 왔는지. .

어느새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방언도 가끔씩 알게 하시고 제가 하는 방언이 막 통역이 되고 있고 하나님 내리는 방언도 통역이 되고 있고 어느새 제가 하고 있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왜 그 때 통역 안주셨냐?

통역이 돼도 근데 사모하라는 거죠.

열심히 구했기 때문에 주신 것 같습니다.

그때 통역 안 주신 이유가 내가 그 뜻을 알아도 그걸 행할 만한 능력이 없었어요.

무슨 얘기인지 알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해서 다 행합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때 제가 하나님을 사모해서 정말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정말 내가 그분의 뜻만 알면 내가 행하겠습니다 했지만 알려줘도 할만한 능력이 안되어 있는 저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예 안 알켜주시는 거에요.

안 알켜 주시고 더 기도만 시키시더라고요. 기도만. 기도훈련만.

때가 되니까 알게 해 주시는데 참 기가 막히더라구요.

방언 통역이 되면 너무 기가막혀요.

어떻게 자기 방역 통역하는 사람?

---본인이 알 것 같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요.

더 많이 사모하시고 더 정확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올 때에는 통역이 되거나 내 머릿속에서 알아질 때는 정확하게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방언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오잖아요.

그게 예언하듯이 정확하게 떨어져요. 말로 와요. 내 안에서 말로 와요.

그러니까 여러분 물론 하나님은 많이는 말씀 안 하세요.

우리가 막 하면 한마디 하시고 막 하면 한마디 하시고 하시는데 그게 참 기가막혀요.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방언 통역이 되는 사람은 방언으로 물으면 하나님은 또 방언으로 대답하셔요.

그게 통역이 되어지면 아~ 그때 대답을 딱 딱 얻어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서 사모하라.

방언 통역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열심히 사모하고 추구해야 된다.

제가 통역이 안 될 때 제가 한 게 있습니다.

뭐냐면 뭐했냐?

하나님은 영적인 것은 역적인 것은 대가를 치러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냥 주시는 게 아냐. 대가를 치러야 된다.

대가는 어떤 대가였냐?

하루에 두 세시간씩 항상 방언기도 했다.

 

19분쯤

여러분 저는 지금 하루에 두 세시간씩 기도한 게 10년이 넘었어요.

여러분이 3년을 안한다 3년도 안한다.

거기에서 뭘 하나님이 그 영적인 것을 열어주시고 또 이런 방언 통역 되어지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들을 여러분들이 알게 해 주시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영성훈련 받고 있는 사람들이 방언 통역이 안된다 그러면 처음에는 누가 실망하냐?

하나님이 실망합니다. 두 번째는 제가 실망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구냐? 본인들이 제일 안타깝겠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3년 동안 구 세시간씩 기도 안하면 주님이 내일 오신다 해도 오늘 해야 되는 거에요.

아니 가만히 생각하니까 주님이 내일 오신다면 오늘 더 기도해야 될 것 같애.

왜냐? 기도할 때 하나님 만나야 되니까.

내가 딴 짓하고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낼 주님이 오신다면 막 준비하고 돌아다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어야 될 것 같애.

더 많이 하나님께 시간 드리고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3년 동안 두세시간 기도 안한다?

그럼 뭘 얻겠습니까?

영적인 대가를 안 치르는데...

여러분 영성이 하루 아침에 입혀지는 게 아니에요.

다 합해져서.

강의도 듣고 내 삶에 적용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묻기도 하고 순종도 하고 다 합해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어느 하나만 잘 해 갖고 되는게 아니에요.

아멘입니까?

그래서 제가 한 건 뭐냐?

열심히 기도하고 아침 저녁으로 영성훈련 쫓아 다닌 것 밖에 없어요. 그것 밖에 제가 한 게 없어요.

물론 교회에서 사역도 했습니다.

전도사로서 사역을 했지만 그러나 내 맘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도와 묻는 것과 영성훈련 아침 저녁으로 쫓아다닌 것. 물론 애들 사역하고 어른들 사역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마음은 죄송합니다. 영성훈련에 더 가 있었어요.

제가 그렇게 시간을 보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3년 동안 할 때는 열심히 배에서 끓어오르는 방언기도를 해야 되요.

그래야 이 은사가 막 임합니다.

은사가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믿음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능력행함의 은사, 신유의 은사,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임해요.

근데 임하려면 배에서 끓어오르듯이 배에서 올라온 음성으로 방언기도를 해야 돼요.

저같은 경우는 지금은 지금 그렇게 시킬때만 하고 안 그럴때는 그렇게 크게 안해요.

10년이 지난 사람 이것도 다 단계가 있어요.

제가 그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다 일일이 얘기할 수 없고 지금 여러분은 큰 소리로 해야 돼요. 큰 소리로.

 

그래서 지금 보면 저는요, 제가 뭘 얘기하냐면 이때는 통역이 안될 때는 몰랐어요.

그러니까 뭘 얘기하려고하냐면 다 합해져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거에요.

모를 때는 하나님의 뜻도 행할 수 없는 자였고, 하나님이 가르쳐줘도 할 수 없는 자였어요.

그런데 어느 때가 되니까 다 열려버려요.

때가 되니까.

때가 되니까 다 열어주세요.

그때까지 뭐 했냐?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쫓아 다녔고 딱 되니까 쫘악 그냥 보이고 좌악 들리고 막 다 열어 주셔요.

그런 때가 와요.

그런데 그 때까지 열심히 추구하고 사모해야 돼요.

그런데 그런 영적인 대가를 안 치르고 뭔가를 얻겠다?

얻어지지가 않습니다.

3년 동안 영성훈련 마친자 중에 하나님이 얻었다고 하는 자들이 몇 명 안돼요.

하나님이 얻었다고 하는 자들.

다 마쳤죠. 다 수료했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니에요.

그런 자는 뭐 했냐? 하라는 대로 안 했어요.

기도 많이 안했어요.

기도한다고 자랑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정말 추구하지 않고 앉아있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으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실망하지 않도록.

 

자 여러분

엘리사 알죠.

끝까지 쫓아 붙었다. 왜냐?

하나님인 걸 알았으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쫓아 붙었던 자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를 쫓아간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쫓아 붙은 거에요.

룻은요?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가 좋아서 따라 붙은 게 아니에요.

나오미의 하나님을 쫓아간 거에요.

할렐루야~~

그랬더니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걸 얻어냈습니다.

아멘입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다 싶으면 끝까지 쫓아야 돼요. 끝까지.

 

예화~~

 

 

여러분 오늘 읽은 거 보면 관계의 영성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관계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그러면 지금 이 얘기는 뭐냐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얘기에요.

여러분 다윗은 처음에 헤브론에서만 왕이었어요. 헤브론에서 얼만큼 왕이었냐면 7년 반, 그리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나중에 7년 반 후에 됐죠.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죠.

토탈 40년간을 왕이 되었었어요.

우리가 이걸 보면 우리의 마음도 심령 성전이라고 하지만 잘 보세요.

우리의 마음에 일부분만 왕이 하나님의 왕이 될 수가 있고 그렇죠?

나는 내 마음속에 다를 하나님한테 준 게 아니고 일부분만이 그 면에서 있어서만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고 있는 일부분 헤브론의 왕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헤브론의 왕을 7년반을 있다가

그 다음에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33년간에 그 기간이 있었다는 거에요.

그럼 우리가 심령성전을 보면 우리도 처음에는 하나님한테 조금만 내어드리는 거에요.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록.

쪼금 어떤 부분만 하나님의 것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그렇게 나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처음에는 헤브론에서 7년 반을 왕이었고, 그다음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 일이 궤를 옮겨온 일입니다.

처음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통일 왕국의 왕이 되고 나서 첫째 한 일이 뭐냐?

오늘 읽은 역대상 13장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의 때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결국 뭐냐면 사울왕이 망한 이유가 뭐라는 거에요?

묻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묻지 않아서 망했다.

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묻지 않았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성경은 온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자만이 승리했습니다. 그죠!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 관계의 영성이라고 했죠.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만이 승리했어요.

근데 관계영성에서 봐야 될 게 뭐냐면 첫째는 신분적으로 봐야 됩니다.

신분이 뭐냐?

우리에게는 다섯가지 신분이 있다고 그랬습니다.그렇죠!

그리스도인의 다섯가지 신분, 그게 뭐였죠?

자녀, 왕으로서의 신분, 제사장으로서, 그 다음에 성전으로서, 또 신부로서, 이런 다섯가지 신분이 있다고 그랬어요.

 

이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자녀라면 하나님은 뭡니까? 그렇죠 부모죠.

내가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야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왕이면 나믄 뭐에요? 종이 되는 종의 개념. 종의 개념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으로 신분이 있고 그렇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중보기도하고

또 성전으로서의 신분이 있죠.

성전을 더럽히지 마라

성전안에 다른 것 세워 놓으면 안되죠.

우리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죠. 거룩한 성전이죠.

그 안에 다른 신을 세워놓고 섬기거나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죠.

그 다음에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로서의 신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왕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한테 버림을 받은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어요. 신분적으로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다. 다윗은.

참 비교하기가 쉽죠. 그죠. 참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종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냐면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길 원했어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원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길 싫어하는 자는 결국은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버림을 받고 망하더라는 거에요.

저는 요즘 뭘 읽고 있냐면 에스겔서를 읽고 있는데 에스겔서를 통해서 남유다가 망했는데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애굽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에게는 에스겔에게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에게는 내가 칼과 기근을 보내서 다 죽이겠다 얘기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을 버려두고 내가 애굽에 가면 잘 살겠지.

거기에는 물질도 풍요하고 물도 많고 나일강이 얼마나 풍요합니까? 애굽은.

그러면 내가 하나님 밑에 있으면 굶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으니까 내가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에 가서 살아야지 하고 가잖아요.

거기에는 물건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물도 풍부하고 거기로 내려갑니다.

그 내려가는 잘 될 거 같죠?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 그러냐면 내가 그들에게 내가 칼과 기근이 뒤따라 가게 해서 내가 그들을 다 죽이겠다 얘기합니다.

이 얘기가 무슨 애기냐면요

우리에게 해당되는 얘기에요.

내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이 보이고 잠깐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 같이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고 망하게 하겠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을때 예를 들어서 내가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지낼때 설사 내가 궁핍하고 좀 보잘 것 없고 아무래도 저기가 더 나은 것 같은데 하면서 그렇게 가는 게 아니라 궁핍해도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것을 버리지 말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걸 놓치지 말라는 거에요. 아멘입니까?

그래서 이 신분을 이 신분을 바르게 갖고 있는 자, 그런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주님이 오실때 누가 혼인잔치에 들어가냐?

누가 들어간다고 그랬습니까? 준비된 자.

어떻게?

주님이 다시 오실때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자들을 보니까 어떤 자가 들어가냐면 준비하고 있는 자, 그리고 세마포로 단장하고 있는자, 세마포 옷을 입고 단장하고 기름 준비 많이 해서 불 밝혀 들고 이런 자만이 들어간다고 했어요.

예복 입지 않는 자는 오히려 쫓아 내버렸지요.

저 바깥 어두운 곳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에 예복 안 입은 자들을 당 장 내 쫓으라 그랬어요.

예복 입고 있어야 된다. 예복. 예복.

이게 바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이런 세마포 입고 준비하고 있는 자가 누구냐?

성령을 쫓아서 사는 자, 성령의 뜻대로 행하는 자, 이게 세마포 입고 있는 자입니다. 그쵸!

성령의 뜻대로 사는자 성령으로 행하는 자.

다시 표현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혼인잔치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자인 거죠.

이게 바른 신분의 관계, 신부로서 단장을 어떻게 하냐?

성령으로 행하는 자가 신부로서 단장을 하고 있는자에요.

그러면 기름 준비 많이 하려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어요?

성령을 얘기한다고 그랬지요. 성령,

성령과 친하고 성령과 많이 친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으로 행하는 자가 될때 기름 준비 많이 하는 자라는 거에요.

그런 자가 될때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한다는 거죠.

내가 바른 신분으로 살지 아니하면 바른 관계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들이 일어난다 얘기죠. 그죠?

 

그래서 이 신분의 문제 관계 영성에 있어서

관계 영성은 첫째는 신분을 다룬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분이 나의 왕이 된다면 나는 종으로서의 신분을 살아야  되고,

그가 나의 신랑이 되신다면 나는 신부로서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신부로서 준비는 성령으로 행하는 자라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두번째 관계는 관계 영성에서 두번째는 우리가 뭘 다루냐면요

 

사귐을 다룹니다. 사귐

그러니까는 하나님과 나, 신분에 문제가 있지만 또 사귐의 문제도 있다는 것이죠.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사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부가 같이 사는데 어 사귐이 없다, 인격적인 사귐이 없다, 그래서 헤어지잖아요. 사귐이 없기 때문에 헤러지는 경우가 많죠. 성격차이다 이래가지고.

사귐이 없기 때문에 헤어집니다.

이 사귐이라고 하는 거는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를 너무 사랑했어요.

너무 헌신적이고 너무 잘 했어요.

어떤 총각이 처녀를 사랑해서 이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총각은 남이 보기에 너무 잘 하는 거에요. 저렇게 헌신적일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처녀는 고민을 하는 거에요.

아니 저렇게 좋은 총각인데 고민을 왜 하냐? 물어봤대요.

그랬더니 처녀가 하는 얘기가 요 총각은 참 헌신적이긴 한데 내가 원하는 건 안 갖다주고 자기가 원하는 걸 갖다 준대요.

이거는 사귀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과연 이 처녀는 고민하는 이유가 내가 결혼해서 행복할 것인가? 지 멋대로 하는데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이 봐도 정말 좋은 총각인데 너무 헌신적인데 자기 뜻대로만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행복하지가 않아요. 이 처녀가.

 

여러분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죠.

상호적이라는 거에요. 상호적.

그래서 여러분 사귄다는 건 뭐냐면 부부간에 사귐이 없다, 사귐이 없다. 기능적인것만 있다, 기능적인 거 아시죠?

돈 벌어다 주고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그만인 거에요.

기능적인 거.

근데 사귄다는 거는 다른 의미죠. 다른 의비죠 그죠?

자녀와 부모간의 관계도 사귐이 없다, 그러면 이런 애들은 어떻게 되냐? 나중에는 잘못된 길로 가더라구요.

탈선하고 집 나가고 방황하고.

물론 그런 시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귐이 없을 때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더라 이거에요.

그럼 사귐...

그러니까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사귐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사귐.

 

사귐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여러분 사귐이라는게 이게 좀 잘 맞는 비유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는데 여러분 사귐이라고 하는 거는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겁니다.

의견을 묻는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묻는 것이다.

여러분 부부간에 사귐이 있는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요.

여보 어떻게 하는 게 좋지?” 내 맘대로 안 하는 거에요.

내가 설사 뭘 하고 싶어도 묻는 거에요. 상대방의 의견을요.

그러면 늘 같이 갈 수 있잖아요.

이게 사귐 있는 부부거든요.

내 의견이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 그래서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묻는 것, 이게 참 중요한 것 같애요.

부부간에 그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물으라는 것이지요.

여보 오늘 저녁에 뭐 먹고 싶어?”

그것도 참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그냥 해 놓고 먹어라 ㅎㅎ

이런 거 보다

여보, 자기야 오늘 뭐 먹고 싶지?”

묻는 다는 것은 참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거 같아요.

저녁 먹는 거 아무것도 아니죠.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가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생각해 주고 내 맘대로 안 하는거 그게 참 서로에게 예를 갖추게 하고 사귐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묻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도 똑같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도 똑같은 왜냐하면 그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내가 내 맘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그분과 내가 사귐이 있는 관계를 갖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늘 이렇게 묻고 지낸 다윗은 하나님한테 선택을 받았고, 묻지 않았던 사울은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사귐에 있어서 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과 사겨야 된다는 거죠.

사울왕도 하나님을 찾았어요. 그죠. 찾았다.

그리고 물으려고 했어요.

물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던 거에요.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그 얘기는 그도 하나님을 찾았고 물으라고 그랬어요.

물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는 누굴 찾아갑니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죠.

그렇지만 사울왕도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물었어요.

하나님이 대답을 안하니까 신내린 자라도 찾아간 거에요. 답답하니까.

그럼 왜 사울왕에게는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셨냐 이거에요.

왜 하나님이 대답을 안하셨냐면 사울왕은 늘 그 안에 세상을 품고 있었어요.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을 쫓아다니면서 죽이려고 그랬지요.

이런 자에게는 늘 그랬으니까.

그런 자에게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이 물어도 대답을 안 하신다.

중요한 얘기이지요. 그죠.

내 맘 안에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품고있다...

사울왕이 그렇게 살았잖아요.

십수년을 자기의 그 왕위를 안 뺏기려고 다윗을 하나님이 기름부어서 그 다음에 왕으로 세우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물어도 하나님은 대답을 안하시더라 이것입니다.

묻는데 왜 대답을 안하시냐? 이거에요.

사울왕도 하나님을 안 믿은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늘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사울왕) 응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 그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없었던 이유가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초월한 것 같은데...맞나요?

그러니까 여러분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아직도 내 맘안에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힘들다는 얘기에요.

하나님께서 아예 말씀을 안 하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버려야 되겠죠! 그죠.

바른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이나 저나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품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그거 가만 보면 이거 한번 생각해 보죠.

지금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얼만큼 하나님과 사귐이 일어나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다 버렸을까?

왜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가? 나는 듣는데...

왜 그렇다는 거에요?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사귀냐?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너무 많은 거에요.

주님이 오시기 전에 그들을 신부로 단장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참 많은데도 사람들은 이곳에 안온다. 왜 안 옵니까? 버려야 되니까. 못 버리거든요.

그리고 못 버리는 사람은 여기서 하는 얘기가 들어오질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 욕심때문에. 들어오질 않아요.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남편을 참 사랑해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 남편이 영성훈련에 안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가장 큰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세상과 세상에 것들에 대한 미련이 있다.

영성훈련에서 하는 것들이 안 들어오는 거에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들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근데 어떻게 무슨 얘기인지 알지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령의 감동함을 입는다.

이런 것들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이 되어진 자들에게 일어나더라는 거에요.

영적으로 성장을 먼저 해야 됩니다.

버릴 건 버리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해야 되요.

내가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품고 있는 한은 하나님이 날 만나주지 않습니다.

 

우리 그릇 얘기 하잖아요.

여러분 그릇이 있어요.

컵에 담는 것이 한정이 있어요.

거기다가 다른 걸 채워놓으면 하나님이 들어오실 구석은 조금밖에 없어요.

채우는 이것을 버리라는 거에요.

다른 것들을 버리면 하나님이 더 많이 채우고 들어 오신다.

안 버리니까 하나님이 들어올 구석이 없는 거에요.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의 모습이 그렇지요.

안 그런 분들도 있지요. 제가 보면 거의 다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다 그래요. 몰라.

무슨 소리하는지도 잘 몰라.

그 이유가 뭐냐?

아직도 내 안에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들리지도 않아.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아유 정말~~

그리고 나 다 알아~~그러고.

본인은 실제적으로 안 비워져 있는데 그런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과 진짜 사귐이 있는 자들이 많으냐?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드물더라는 것입니다.

근데 진짜 이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내 안부터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과 나와 사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의 영성에서는 첫번째 신분의 문제가 있다고 그랬지요.

신분의 문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게 뭐냐면 그분이 어떤 분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 그런걸 얘기하죠?

그분이 왕이 되신다면 나는 종의 그런 관계

이런 상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죠!

 

그런데 이 사귐의 문제는 상호적이어야 돼요.

하나님만 날 사랑해서도 되는 게 아니고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잘 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아무 반응이 없다. 이건 사귐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사귐이라는 것은 상호적이다. 소통, 소통이 일어나야 된다. 상호적이다.

 

그래서 관계의 영성은 신분과 사귐을 보면서 하나는 상대적이고 하나는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부간에 같이 길을 가려고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야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묻고, 기다려 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고, 기다려주면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 영을 열어서
또 버리게 하셔서 같이 한 마음으로 길을 가게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