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영성 Ⅱ 4-3- 영적인 삶을 추구하라
여러분과 제가 볼 것은 영혼과 영성 지난달에는 우리가 뭐 했냐면 예비반을 했지요. 그런데 이번 달에는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 그러니까 기본반에서 네 가지 기둥을 우리가 지난달에 설명을 했는데, 예비반은 한 달을 다루고 지난달에 끝났지요.
그 다음에 기본반은 네 가지 기둥, 네 가지 기둥은 한 가지 기둥에 따라서 네 단계가 있으니까 4x4=16 되잖아요.
16개월 동안 한달씩 네 가지 기둥을 가지고 첫째단계, 둘째단계, 셋째단계, 넷째단계 이렇게 나누니까 결국 16개월을 우리가 기본반으로 다룹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기둥이 뭐였냐면 영혼과 영성이 있었고,
육체와 영성이 있었고,
영혼과 영성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고,
육체와 영성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육체를 갖고 사는데 어떻게 하면 이 육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쓰임 받게 할 수 있을까?
의의 병기, 그걸 다루고 있는 거죠.
그 다음 세번째는 물질과 영성, 평생에 우리에게 물질이 오고 가는데 이 물질을 어떻 게 하나님 앞에 잘 써 드릴까? 하는 것이죠.
물질을 맡은 자로서 바른 청지기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다음 마지막에 대인과 영성이 있지요.
우리 평생에 우리에게는 영혼들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얻어 드릴 것인가?
그 영혼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얻어 드릴 것인가를 다 루고 있지요.
그래서 이 네 가지 기둥이 있는 거에요.
우리 신앙생활은 거의 이 네 가지 기둥안에 다 들어 있어요.
물론 더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만 누가 얘기하면 그러나 이 안에 다 들어있다 말이에요.
그래서 이 네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고 이 네 가지 기둥에는 또 뭐가 있냐 면 단계가 네 단계씩 있어요.
영혼과 영성에도 네 단계가 있고, 육체와 영성에도 네 단계가 있고 물질과 영성에도 네 단계가 있고
영혼과 영성 첫째 단계는 본능 단계죠.
이 본능단계는 육체와 영성 물질과 영성 대인과 영성 다 같은 맥락에 있어요.
두 번째 단계는 윤리단계, 본능단계는 쉽게 얘기하면 내 마음대로 사는 거에요. 예수는 믿지만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본능단계에요.
그것이 영혼과 영성에도 그렇고 육체와 영성에서도 그렇고 내 마음대로 살고 육체를 내 마음대로 쓰고 물질과 영성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대인과 영성에서도 마찬가지. 본능대로 행하는 거.
윤리라는 것은 어떤 도덕성 어떤 뭔가 개입이 되는 거죠? 그죠. 거기에 윤리단계는 뭐냐면 하나님이 개입이 되요.
영혼과 영성에서 하나님이 개입이 되고,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 느껴지고 은혜가 임 하고, 육체와 영성에서도 이제는 하나님이 개입이 되어져서 (주로 은사에 대해서 나누 는데) 은사체험 단계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면서 체험하는 단계.
그 다음에 두 번째 단계는 은사를 실용적으로... 운전 초보자하고 운전 숙련자는 틀리죠. 그죠?
그니까 그 윤리단계에서는 은사를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단계, 물질과 영성도 물질도 본능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개입되기 시작하고, 대인과 영성도 마찬가지에요. 본능단계에서는 너와 나로 끝나버리고 그러니까 맨날 싸우죠. 너와 나. 그런데 윤리단계에서부터는 너와 나 사이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셔요. 하나님이 계시다. 이것이 윤리단계에요. 하나님이 개입하는 거.
그 다음에 윤리단계 그 밑에는 진리단계가 있지요. 진리단계는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죠.
예수님이 진리이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세 번째 단계는 진리대로 살아지는 삶이에요.
말씀대로 살아진다 이거죠.
살기 위해서 내 육체를 쳐서 복종하는 단계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진리단계만 가도 아주 높은 단계에요.
그 다음에 맨 마지막 단계는 생명단계가 있지요.
생명은 예수님만 생명이시니까 예수로 사는 단계가 생명단계에요.
그것이 영혼과 영성에서 나타나고, 육체와 영성에서 나타나고, 물질과 영성에서도 생 명단계가 있고, 대인과 영성에서도 있다 말이에요.
오늘은 뭘 다루냐면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를 다뤄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 칸이 열여섯 칸이 있잖아요.
맨 첫째 꺼, 오늘은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 정의에 대해서 우리는 봅니다. 여기는 또 뭐가 있냐면 정의가 있고,
다음 주에는 특징을 나누고
그 다음 주에는 훈련을 나눠요. 그 다음에 종합이 있어요. 이렇게 항상 그래요.
이 기본단계에서는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 오늘 다루겠습니다‘할 때
첫째 주에는 정의를 다루고, 둘째 주는 특징, 세 번째 주는 훈련 마지막 주에는 종합 이렇게 돼요. 각 단계마다 다 똑 같아요.
그러니까 16개월 동안 이 기본반을 우리가 다룹니다. 이걸 다루면서 여러분이 어떻게 바뀌냐? 많이 바뀌어요.
여러분의 자아가 많이 내려놔지고 여러분 가장 질긴 부분들이 무너지고, 이 강의를 들으면서 삶에 적용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니까 기대하시고...
오늘은 뭐냐면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 우리는 본능단계라고 하지만 영혼과 영성 자연단계 라는 말을 써요. 자연, 그냥 그대로의 모습, 자연단계라고 말을 합니다.
이 영혼과 영성 자연단계는 뭐냐면 영혼의 자기 발견단계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에 들어가는데 이게 뭐냐면 영혼의 자기 발견단계가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에서 일어난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제 경험은 예수가 믿어져도 예수가 믿어지긴 믿어지는데 교회 뜰만 밟 은 그리스도인은 아직 이 단계도 못 들어 갑니다.
제가 이런 단계가 있었거든요. 예수는 분명히 믿어지는데 천지창조도 믿어지고 하나 님이 계신 것도 믿어지는데 진짜 뜰만 밟고 다니는 거에요.
이런 경우는 아직도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도 못 들어가는 거에요.
그럼 이 본능단계는 뭐냐면 영혼의 자기 발견 단계니까 첫째는 참 내가 영인 게 깨달 아져요. 내가 영혼이다. 나는 정말 영혼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갈 것은 영혼이다. 나 의 참 영원이 살 나는 영혼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런데 교회 뜰만 밟은 사람은 그것도 아직 몰라요. 하나님이 계신 것은 깨달아져요.
그런데 내가 정말 여기에 살 동안에 육체를 갖고 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갈 것은 영혼이라는 게 깨달아지는 거에요. 자기 발견단계에서.
참 나는 영이라는 거에요. 육체가 아니고 영이다. 참 나는 영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힌트가 좀 나오는데 그러면 이 영혼과 영성에서는 참 나는 영이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본능단계가 아니라 윤리단계, 진리단계, 생명단계 가면 갈수록 내가 영인 것이 너무 확실해져서 나의 가치관이 하늘에만 있게 되겠지요. 여기 힌트가 좀 나 오죠. 참 내가 영인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 다음 두 번째는 영혼의 자기 발견 이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내 안에 두 가지 생각이 구분이 갑니다. 구분이 가기 시작해요.
이게 뭐냐면 내 안에는 항상 어떤 일에 대하여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어요. 이게 뭐냐면 하나는 영의 생각이고 하나는 뭐에요? 육신의 생각이죠.
세상으로 말미암은 또 나의 소욕으로 말미암은 육신의 생각, 이 두 생각이 나에게 있 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게 내 영혼의 자기 발견단계에요.
이게 영혼과 영성 본능단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성훈련은 처음에 한국에서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냐면 박철수목사님이 하 셨어요. 박철수목사님이 처음에는 이단으로 몰렸어요. 왜 이단으로 몰렸냐? 우리가 성령의 이중적인 충만인 외적인 충만, 내적인 충만 다뤘잖아요. 그것을 이중적인 충만 이라고 말을 갖다 붙였다고 이단으로 몰리고 그리고 우리가 구속사에 대해서 나눴는 데 주관적 구속사, 객관적 구속사로 나눴다고 이단으로 몰리고... 그런데 단지 말만 붙였을 뿐이에요.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문자를 사용해서 그런 단어를 사용했을 뿐인데 그거를 이 단으로 몰다가 지금은 다 풀렸지요. 그죠.
그래서 박철수목사님은 처음에 시작할 때 왜 이 영성훈련을 시작했냐면 본인의 경험 이 하나님께서 이분에게 강권적으로 뭘 경험시키냐면 (강권적인 경험인데) 영의 인격 과 육신의 인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경험시켰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어~ 두 생각이 있구나!’ 깨닫고 말잖아요.
우리가 느끼고 말잖아요. 그런데 이분은 어떻게 되었냐면 영의 인격과 육신의 인격을 완전히 분리되어져가지고 8개월 동안 이 두 인격이 대화하고 산거에요. 대화. 하나님 이 그런 경험을 시켰어요.
영은 ‘아 그래도 네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냐?’ 육신은 ‘아니야 그래도 나는 이게 좋아.’ ‘나 이러고 싶어.’
이러면서 육신의 인격과 영의 인격이 완전히 분리가 되어서 대화를 8개월 동안 했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분이 ‘아 우리 안에는 정확하게 영의 인격과 육신의 인격이 완전히 다른 인격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에요.
이것을 또 누가 말하고 있냐면 로마서에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에 대해 딱 나오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분이 영성훈련을 시작한 거에요.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사는 것은 다 사망이다.
여러분 육신의 생각을 쫒아서 사는 것은 다 사망인데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갈 동안에 이게 분리되어서 대화를 하면서 그 영의 인격과 육신의 인격 하나님이 강 권적으로 경험시키면서 얼마나 영의 인격, 영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지를 깨달았겠냐 말입니다. 그분이.
그런데 이 육신의 인격,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게 다 사망인데 그럼 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살았다면 나의 산 모든 삶은 뭐에요? 사망의 삶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영성훈련 받으면서 육신이냐 영이냐 이것을 수없이 들어요. 나중에는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딱 나오면 가슴이 벌렁벌렁해요. 떨리기까지 들어 요. 많이 듣는 얘기에요.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육신을 쫒아서 사는 삶은) 다 사망이라고 그랬어요.
예를 하나 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낳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이삭 이죠. 그죠?
그러면 그는 영의 생각을 쫒아서 낳은 거에요? 그렇지요.
그럼 육신의 생각을 쫒아서 낳은 아들은 누구에요? 이스마엘이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그랬잖아요.
이게 하늘나라에서도 사망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사망의 결과를 갖고 오더라 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지금 어디냐면? 이란, 이라크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그 후손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잖아요. 지금까지도 그렇죠. 사망의 결과를 갖고 온 거잖아요. 육신의 생각은.
그러니까 여러분이 누구랑 싸웠다. 그거 왜 싸웁니까?
육신의 생각대로 행하니까 싸우죠. 그러면 그 사람하고 관계가 어떻게 돼요? 사망의 결과를 갖고 오는 거죠.
내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싸웠는데 그게 하늘나라에서도 내가 사망의 시간으로 기 록되지만 내가 이 세상에 살 때에도 어떻게 된다는 거에요?
그 인간관계가 사망의 결과를 갖고 오더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영을 쫒아서 사는 거하고 육신을 쫒아서 사는 거는 완전히 다른 내 인 생이 다른, 내 인생이 다 살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 내 인생이 정말 다른 그런 인생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40년간 신앙생활을 한 분도 장로님이라도 이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자 기가 지금까지 살았던 게 뭐라고요?
육신을 쫒아서 사니까 와서 대성통곡한다잖아요.
왜? 40년 동안 사망의 삶을 살았거든요. 자기의 생각을 쫒아서.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영의 생각을 쫒아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돼요.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여러분의 소망이 저 하늘나라에 있다면 육신의 생각을 배제하 고 영의 생각을 쫒아서 살아야 만이 저 하늘나라에서 저에게나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 는 줄로 믿습니다.
두 인격이 있는 거에요. 육신의 인격이 있고 영의 인격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게 영의 인격이고 내 육체대로 살고 싶은 게 육신의 인격 이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육신의 인격을 쳐서 어디에다 복종시켜야 하는 거에요? 영의 생각, 영의 인격에다가 복종시켜야 되는 거에요.
그렇게 복종시키는 것이 아까 얘기한 육체와 영성 의의 병기 그것과 연결이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삶 동안에 내가 육신을 쫒아 서 사는 삶과 영을 쫒아서 사는 삶의 그 결과는 너무 틀리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산 자, 살아있다 라고 얘기하는 자, 산 자, 하나님 앞에 죽은 자가 있구요. 하나님 앞에 산 자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산 자는 누구냐?
영을 쫒아서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산 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죽은 자는 누구냐? 육신을 쫒아서 사는 자에요.
그래서 계시록에 사데교회를 보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너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게 누구한테 얘기하시냐면 사데교회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 씀하시는 거에요. 예수 믿는 자들에게.
너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는데 실상은 죽은 자라는 거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거에요.
그럼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는 누구냐?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영에게 육신을 쳐 서 복종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산 자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17절 한번 찾아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 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잠깐만요. 여기에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이 것은 뭐냐면,
이제는 우리 인간들은 영이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에요.
보이는 육체는 허상이라는 거에요. 그건 헛물키는 거에요. 보이는 육체는 허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도 영이고 저 사람도 영이고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체대로 알지 않겠다 는 거에요.
왜? 진짜 그 사람은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밑에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그 사람이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 이는 형체로 왔잖아요. 육체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영이라는 거에요.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나도 내가 ‘영’인걸 알겠지만 다른 사람도 다 영이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나중에 대인과 영성에서 나누지만 어떤 지체가 어떤 형제가 정말 이상한 짓을 한다. 육체로 보면 그냥 걷어차고 싶고 진짜로 내버리고 싶고 내쫓 고 싶고 그런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이 육체라고 생각하면 쫓아버리고 싶죠. 그 사람 이 뭐라고요? ‘영’이라는 거에요. 그 ‘영’을 보고 이야기 한 거에요. 사람을 겉모양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눈이 바꿔져야 돼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어야 돼요.
그 사람의 하는 짓을 보면 사랑할 수 없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전혀 사랑이 안 되 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그 사람의 ‘영’을 보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을 ‘영’으로 생각하면 사랑할 수 있어요.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어요. 할 렐루야.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겠노라. 아멘.
그 다음에 “그리스도도 우리가 육체대로 알았는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같이 알지 아
니하노라.” 이게 영에 대한 눈이 뜨인 거죠. 그 다음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 다같이 시작!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에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 있었어요.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 있으니까 우리는 누구의 종이었나면 사단의 종이었죠. 사단이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자 들이었어요. 그러나 우리의 영이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눈이 뜨이 고 하나님이 누군지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되는 우리가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거에요. 아멘입니까? 아멘.
사단의 종에서 누구의 종으로 바뀌었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이전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것으로 살아야 된다 말입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된 그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 세상에는 육체가 있는 가운데는 나에게는 두 사람이 공존하고 있어요. 뭐라고요? 나의 옛사람과 나의 속사람, 나의 새사람이 공존해서 살고 있어요. 우리 육체가 있는 한.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그랬어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안에는 두 사람이 존재하는 거야.
두 인격이 존재하는 거에요.
우리 로마서 8장 7절에서 8절 한번 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늘 이 두 생각, 두 인격, 두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쫓아서 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냐면 새사 람을 쫓아서 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7절에서 8절 다같이 시작!
1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 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2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다음에 12절에서 14절 다같이 시작!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8.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9.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랬는데 우리가 육신에게 져 서 육신대로 살면 옛사람을 택해서 살면 뭐라고 그랬어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에요.
그냥 여러분이 성경 한구절 있으니까 무시하고 지나가는 그런 소리가 아니에요.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여러분 계시록에는 이기는 자들에 대하여 나오죠. 그죠. 이기는 자의 반열.
이 육신을 쫓아서 사는 자의 모습은 반드시 죽습니다. 사망의 결과를 갖고 와요. 여기서 도 저 하늘나라에서도. 그러나 이기는 자의 반열은 이기는 자는 누구냐?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에요.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사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것을 우리는 이기는 생명, 이기는 자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래서 14절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정말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에 요.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을 ‘정말 너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그런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우리 에베소서 2장 3절 한번 가봅니다.
1절부터 3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3절 다같이 시작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누가 살렸습니까? 예수님이요. 그죠. 그 다음에 2절 시작.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를 따랐으니
이게 누구입니까? 사탄이죠.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불순종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안 믿는 자들. 그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죠. 그죠. 그 다음에 3절 시작.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도 다같이 똑같았다는 거에요.
어떻게 했다는 거에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내가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하나님은 게으르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내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놀고 싶으면 놀고 노름하고 싶으면 노름하러 가고, 그게 육체의 욕심이잖아요. 그렇게 하고 살았다 이거에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내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거에요. 다른 이들과 같이 우리는 그렇게 하고 살았다 이거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예수 안 믿는 자들과 똑같이 진노의 자녀처럼 산 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 한 행동 보면 어때요? 하나님 진노하시겠지요! 저도 그래요.
예수 믿기 전에 한 행동들 보면 그래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도 도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에요. 이게 문제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이렇게 육체의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진노하는 삶이라는 거에 요. 하나님이. 아멘.
육체대로 사는 것,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사는 것, 하나님이 진노하는 삶이라는 거 에요. 진노하신다. 그 진노가 어디에 임하냐? 우리의 삶에 임합니다.
여러분이 못 깨달아서 그렇지. 삶에 임해요.
그게 징계로 오는데 우리가 못 깨달아서 문제에요.
깨닫지 못하는 자는 뭐라고 그랬어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깨달아야 돼요. 그런데 3절은 너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그런데 너희는 바꿔졌다는 거 아니에요?
엡 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 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니까 우리의 신분은 이제 하늘에 앉힌 신분이 되었다는 거에요. 누구의 옆에요? 예수님 옆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희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땅에 있는 너희 지체를 죽이라. 이렇게 얘기하죠.
뭘 생각하라고요? 위엣 것을 생각하라.
위에는 뭐라고 합니까? 그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신분이 바꿔졌다는 거에요. 신분이 완전히.
신분이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새롭게 살리셔서 어디다 앉혀놨냐면 하늘에다가 앉혀놨 대요. 하늘에 앉혀놓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처럼 살아서 되겠느냐 하는 이 말 씀이에요. 이미 하늘에 앉힌 자들이 되었는데 아직도 왜 그 모습이냐 이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로마서 8잘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이 있었지요. 그죠?
그럼 어떻게 하냐? 육신을 죽이면서 육신을 영에게 복종시키면서 살아라. 그래야 너희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산 자의 모습으로 산다는 거에요.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그 시간, 생명의 삶을 살게 된 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
여러분, 어떤 장로님 영성훈련에 왔어요. 30-40년간 신앙생활 하셨잖아요.
이분은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영의 인격과 육신의 인격, 사망의 삶과 생명의 삶 의 얘기를 들으면서 자기는 이때까지 살아온 게 사망의 삶을 살았다는 걸 알았어요. 이때까지 자기가 한 게 다 자기를 위해서 살았어요.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게 하나도 없어요.
헌금을 해도 인정받기 위해서, 봉사를 해도 장로님이란 이름 듣기 위해서, 장로로 추 대받기 위해서, 이게 다 사망의 삶이에요.
우리는 스스로 속일 수 없잖아요.
하나님은 “스스로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잖아요. 나를 위해서 살았는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 았는지 그것은 누가 아세요? 하나님이요.
때로는 나도 속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 같은데 내 속에는 나의 욕심이 더 많은 걸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나중에.
처음에는 그걸 몰라요. 구분을 못해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지, 이게 처음에는 숨어있어서 잘 모르 다가 이제는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면 온전히 구분이 갑니다.
‘아 결국 나는 나를 위해 살았구나!’ 이게 다 사망의 삶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해도 상관이 없어요. 여러분.
“나는 모태신앙부터 60년 신앙생활 한 사람인데 어떻게 너가 내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느냐?” 그런 말 하는 분들이 있어요.
60년간 나 신앙생활 했다 이거야.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자기 고집으로 신앙생활 했고, 자기 잘난 맛으로 신앙생활 했고, 또 교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신앙생활 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이야 참... 그러니까 빨 리 깨달아야 돼요. 빨리.
빨리 깨달아서 (내가 신앙 년수가 3년 밖에 안된다 할지라도 빨리 깨달아서) 빨리 생 명의 삶을 사는 자가 되어져야만 승리하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영으로 복종해서 산다는 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사도바 울도 이런 고민을 했어요. 로마서 7장 한번 가보겠습니다.
이게 쉬운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3년을 하는 거에요. 3년 만에 해 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 반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 훈련을 시켰는데 우리는 3년만 해 보자는 것이죠.
로마서 7장 15절 말씀 봅니다. 다같이 시작!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러분 이거 경험하셨죠?
나는 정말 이렇게 하고 싶은데 정작 내가 하는 그 상황에 부딪혀서 나에게 나오는 행 동을 보니까 안하고 싶은 그것을 하고 있더라 이거에요.
그래요? 안 그래요?
대개 보면 부부 싸움할 때 ‘내가 이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왜? 그 사람이 상처받으니까.
그런데 싸우면요 안 하겠다고 하는 그 말을 꼭 하고 말아. 형제간에도 마찬가지야.
이 말을 하면 정말 상처받을 거 같아서 마음속에 정말 아~ 이 말만은 내가 안 해야 되겠다는 게 있죠. 그죠.
그런데 싸울 때 꼭 그 말이 나와요? 안 나와요? 약속한 것처럼 나와 버려. 그냥. 안 하겠다는 게 나와 버려요.
이게 뭐냐면 지금 말하는 나의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노니 사도바울도 그 얘기를 하 는 거야. 내가 행하는 것을 나도 모르겠다 이거죠.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하니 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우리 육체가 그렇게 간사하고 그만큼 죄에...
다윗은 뭐라고 그랬어요? 죄가 문 앞에 엎드린다 그랬잖아요.
그만큼 넘어지기 쉬운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18절 19절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 다
거기 보면 우리 육신에서는 선한 게 아무것도 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게 육신이거든요.
내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안돼요.
그거 나중에 또 설명하는데 그러니까 뭐라고 하냐면 내 육신에서는 선한 것이 아무것 도 안 나오는 거에요.
인간의 육신에게서는 아무것도 선한 게 나올 수가 없어요. 그냥 척하는 거에요. 하는 체 하는 거고.
여러분 우리 인간이 하는 거 하고 하나님이 하는 거 하고 그 차이를 아세요? 제가 이 파크뷰에 맥아더파크에 분수대가 있어요.
제가 그 분수대를 보면서 거기 성경 읽으러 거기 많이 가요.
거기 주차해 놓고 거기서 성경을 한 시간이나 두 시간씩 읽고 저는 자연을 보면서 자 연을 좋아해요.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어느 날 이게 깨달아지는데 그 물이 올라오는데 아주 아름답잖아요. 그죠. 막 물이 솟아 올라오니 보기도 좋고 그런 데 깨달지는 게 뭐냐면 인간의 하는 노력이 저 정도밖에 안되는구나! 아무리해도 거 기밖에 못 올라가는 거구나. 그래서 물이 또 떨어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면 어때요? 비를 내리면 어때요? 비를 내리려면 구름을 모아서 왕창 내려버리잖아요. 우리 인간이 하려고 하는 거는 해봤자 분수대 올라오는 거 그 정도, 하나님이 하시면 그냥 다 하시는 거야. 크게. 하늘에서 비를 그냥 내려버려. 우리 인간이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분수대 높이만큼 밖에 안돼.
그런데 내 안에 하나님을 품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나 대신 하나님이 그를 사랑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구름을 모아서 비를 내리듯이 사랑의 그 넓이와 척도와 높이 가 너무 다르잖아요.
내가 할 때와 하나님이 할 때 그만큼 차이가 나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사실은 거의 없어요.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분수대 높이만큼, 하나님이 하면 저 높은 하늘에서 모든 구름을 모아서 쫘악 내려버려요.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우리 육신에게서 나가는 것은 대개 보면 선이라기보다는 악한 게 많아요.
그나마 우리가 예수 믿어서 간혹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나갈 뿐이지, 대부분 우리가 뭐로 살고 있어요? 나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하루속히 이 모습에서 벗어나라는 얘 기에요.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거에요. 너 안에 내가 있다는 거에요. 그죠. 내가 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새 것이 되었지 않냐? 나로 살라는 거죠. 우리 육체에 서는 아무 선한 게 나갈 수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로마서 7장 19절 다시 한번 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우리 인간이 이래요.
내가 그렇게 내 안에 막 싸워도 내가 막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도 정작 내가 하 고 있는 걸 보면 죄에 내가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고민을 했냐면 로마서 7장 24절 다같이 한번 봅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2절 23절 읽어봅니다. 다같이 시작.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 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래놓고 나는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그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내 안에 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끌고 내려오는 것을 본다는
거죠. 그러면서 24절 절망하는 거죠.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 하나님은 대개는 원수를 앞에다 갖다 놓습니다.
대개는 부부일 수가 있고 그게, 아니면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같은 교회 다 니는 어느 누구집사...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걸 보면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는 거에 요. 그런데 나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 어요. 그런데 사랑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려고 그래도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미운 짓만 하네. 미운 짓만. 그럼 사랑하려고 하다가도 그날은 좀 와서 예쁜 짓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내가 결단하고 갔는데 내 앞에서 또 미운 짓 하면 어때요? 사랑이 나갈 수가 없는 거에요. 사랑이 안 돼요.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망할 수 있어야 돼요.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절망까지 가야 되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은 자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그 사람이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사랑해야 된다 는 걸 알고 있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데 안 되잖아요.
아무리 내가 잘 해줘도 안 되는 거고 그 사람 뭐해서 뭘 갖다 줘도 안 되고 뭘 사줘 도 안 되고 계속 미운 짓만 하고 있고 그럴 때,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냐? 하나님한 테 가야죠. ‘하나님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서 애통을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그래, 이제부터 내가 하마” 이렇게 나오시는 거에요.
내가 그를 생각할 때는 밉고 서운하고 서글프고 막 그랬는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이 진짜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작점입니다. 일하시는 시작점이 그가 불쌍히 여겨집니다.
그 전에는 내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미움이 솟아나고 도저히 할 수가 없었는데 그 게 나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일하기 시작할 때는 그가 정말 불쌍히 여겨집니다. 그럼 그 때부터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를 사랑하는 거에요.
그럼 쉬워요. 왜?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또 섬길 수 있고, 다시 또 인사할 수 있 고 밝은 모습으로, 받든 안 받든 상관없는 거야.
이게 뭐냐면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사도바울도 그렇게 절망했잖아요. 절망하고 나서 발견한 게 뭐냐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발견했어요.
그 밑에 로마서 8장 1절 2절을 읽어 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내가 육체대로 행할 때는 내가 그를 사랑하려고 할 때는 절대 안됐어요. 될 수가 없 었어요. 오히려 내가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와 사망의 법으로 가는 거에요.
내가 죄를 짓게 되는 거야. 죄를 지으면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죄와 사망의 법을 따 르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하려는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하 려고 하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게 되더라는 거에요.
성령의 법, 성령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게 법이잖아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열매 성령이 원하시는 거 하니까 생명의 삶이 나타나잖아요. 열매가 생명의 열매가 맺어지잖아요.
그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려고 하는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사랑하려고 할 때 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은 거에요. 할렐루야!
내가 내 안에 있는 속사람으로 사는 법을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결국은 이 영성 훈련을 하면서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추구를 하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추구를 해도 안 될 때, 안 되는 것을 발견을 해서 이게 절망으로 가잖아요.
절망으로 가서 그때 가서 나는 주님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 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넘어가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져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넘 어가서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삶을 살 뿐만이 아니라 상대 방에게도 생명의 열매가 맺어져서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기적이 일어나요.
여러분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병고침 받고 무슨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고 이런 것을 여러분이 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나갈 때 원수가 친구가 되는 것도 기적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 기적들이 사실은 우리 삶에 날마다 일어나야 돼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나 저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서 생명의 성령 의 법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추구하는 줄을 놓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지금 영성훈련 10년을 하고 있어요.
뭐하기 위해서 하냐? 지금 말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쫓아 살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법아래 놓여있는 내가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살기 위해서
여러분이 영성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과정 속에서 많은 강의와 여기서 하라는 훈련해야 되고 물어보는 훈 련해야 되고 방언기도 열심히 해야 되고 하면서 여러분의 자아가 또 파쇄되면서 여러 분 결국 뭐냐면 제 자아가 너무 강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넘어가고 싶어도 내 자 아 때문에 못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여러분 열심히 하시면서 아까 얘기한 거 명심하시면서 내 힘으로 할 때는 분 수대 높이 만큼밖에 못 올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하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하면 저 높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 온 세상을 적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나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내안에 계신 주님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주여 한번 부르고 기도하는데 하나님, 나에게는 이런 원수가 붙어 있습니다. 원 수 없는 사람 사실 별로 없어요. 그 원수를 주여 내 힘으로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주 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 생각하면서 나도 주님으로부터 그 큰 은혜를 받았는데 빚진 자로서 나도 그 사랑을 그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풀면서 그를 용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할렐루야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예수 믿고 우리 안에 두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때는 안 되지만 주님이 주신 힘으로 할 때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사 랑할 때는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고 이 세상도 다 품을 수 있는 주님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더 넓은 마음, 더 큰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내 안에 주님을 사용할 수 있 도록 주님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고 주님의 눈으로 자매를 바라보고 주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승리하게 하여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사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서 사는 자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우리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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