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과 영성 II -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사랑이 참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감사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방향이 오직 우리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며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호흡하게 하시고, 생명주신 그 삶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영 광 나타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축복하여 주시 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정화시켜 주시고,
아버지 모든 것 버리게 하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 모두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 드렸사옵나이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나눌 것은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 특징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번 달을 마치면 기본과정 16개월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성장반 으로 넘어가죠.
성장반은 성경만 보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약 18개월을 성경만을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달이 기본과정의 마지막 달이라는 것을 아시고 오늘은 대인과 영성 생명 단계 특징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영성훈련에는 네 가지 기둥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영혼과 영성, 육체와 영성이 있고 그 다음에 물질과 영성(=대물과 영성) 그 리고 대인과 영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혼과 영성, 육체와 영성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것 이라면 이 물질과 영성, 대인과 영성은 주로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영성은 우리가 바깥으로 보면 땅이 있잖아요?
땅에는 나무가 있는데 뿌리가 얕으면 나무가 아무리 무성해도 바람이 불면 그냥 쓰러 지죠. 그런데 이 뿌리가 아주 깊고 넓게 쫙 뻗어 있으면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죠.
그래서 이 뿌리에 해당되는 것이 영혼과 영성 그리고 육체와 영성이에요. 우리가 영성훈련에서 나무에 비교를 한다면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물질과 영성 그리고 대인과 영성은 나무가 위로 자라나서 잎을 맺고 꽃이 피 듯이 바깥으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이 밑이 잘되고 위엣 것도 잘되어야죠.
그런데 밑은 잘되었는데 위엣 것은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요.
영혼과 영성, 육체와 영성은 잘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되었는데 바깥으로 보여 지는 물질과 영성, 대인과 영성이 안 되면 안 되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열매 맺는 삶이거든요.
뿌리가 튼튼해서 나무가 잘 자라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우리가 영성훈련 하는 목적인데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배우는 대인과 영성은 열매 맺는 것과 관계있어요. 여러분,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에서 대인과 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집에 기둥이 네 개가 있잖아요.
영혼과 영성, 육체와 영성, 물질과 영성, 대인과 영성 이 네 기둥이 있잖아요. 집이 지어 질려면 이 네 기둥의 높이가 똑같아야 집이 바로 지어지잖아요?
그런데 세 기둥은 잘 되는데 한 기둥이 좀 작다면 지붕을 얹어도 이상하게 되고 집이 기울어지지 않겠어요?
여러분이 기본과정에서 열심히 배우면서 내가 가장 안 되는 부분이 어느 기둥인지 알 게 되면 안 되는 그 기둥을 씨름해야 됩니다.
안 되는 기둥 예를 들면 대물과 영성이 안 된다면 이 기둥을 올리기 위해 주력해야 돼요. 그래야 집이 바로 서게 되지요.
또 나는 대인과 영성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이것을 주력해야 돼요.
결국에는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안 되는 것에 주력하면 결국은 안 되는 것이 나 중엔 가장 잘 돼요. 할렐루야!
여러분 사람마다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것을 발견하셔서 계속해서 발전시켜서 가장 잘되게 하실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상대방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해서 사는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세요? 안계세요?
계시죠. 그러면 내가 대하고 있는 이웃 안에는 주님이 계실까요? 안계실까요? 계시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외모와 행위와 말과 이런 것들을 보잖아요.
그런데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것을 보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그 사람 안에서 보는 거예요.
저도 이것이 처음에는 안 되었어요.
그 사람이 하는 짓은 개망나니 같은데 어떻게 내가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을 볼수 있는 가 하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은 누굴 사랑합니까?
나를 사랑하시잖아요. 그럼 주님은 누굴 또 사랑할까요? 그 사람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나를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주님을 받아야 되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돼요.
그 사람의 언행이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보는 거 예요.
그러면 우리 눈은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사람을 보면 외모로 보이는 것만 보이니까 그 사람을 바라 볼 때 우리의 눈을 그 사람에게서 좀 멀리해서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A라는 사람이 내 앞에 있어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전혀 주님 생각이 나지 않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을 보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A라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A를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는 거예요.
그 주님이 그 사람을 아직까지 그렇게 놔두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바 꿔 놓으실 수 있는 분일까요? 아닐까요?
바꿔 놓으실 수 있는 분이잖아요.
나에게 주신 은혜보다도 더 큰 은혜를 주셔서 바꿔놓으실 수 있는 분이에요. 그런데 안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눈은 항상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해요.
우리는 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해요. 할렐루야! 이것이 생명단계의 사람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어떻게 살아요?
그 사람의 외모,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행위와 같은 육신을 보고 사니까 육신으로 밖에 대할 수 없는 나로 살아요.
‘영으로 받으라’, ‘우리가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받으라’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사람을 육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도 이제 육신대로 알지 아니하노니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아니하노라”
모든 사람을 육신으로 보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영으로 보는 훈련을 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기다림과 참음
과 사랑, 화평, 희락, 온유, 절제와 같은 이런 것을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행위를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에요. 그 사람 안에 계시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주님을 바라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할 렐루야!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 할 수 있어요. 이것이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훈련하지 않는 자는 이런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우리 육체가 있는 동안은 육신이 먼저 나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거절하고 생명의 삶을 살려고 하니 모든 사람을 영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실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해요. 그래서 이사람 저사람 붙이시는 거예요. 나 를, 여러분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그냥 육신으로 받으니까 어떻게 돼요? 인생이 허비되는 거예요.
성경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하잖아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의도 를 알지 못하고 육신으로 살고 우리에게 오는 이웃들을 육신으로 받으니까 구원을 이 루어 나가지 못하고 인생이 허비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 읽어보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줄로 믿습 니다. 그런데 이것이 첫째 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거예요.
두 번째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어요.
이와 같다는 말은 첫째 되는 계명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국 이 말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네 이웃을 네 몸 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두 계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했어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이 잘 안되지만, 정말 여러분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알아요.
잘 안되지만 그럴지라도 상대방을 주님으로 보는 훈련을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도 구원받은 영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마태복음 25장40절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으로 보신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왜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는지, 어떤 경우에 참 안되는가를 살펴봤어요. 제 자신도 보고요.
그것도 교회 밖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 여러분,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던가요?
이때 가장 생명의 삶을 못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라 는 빛을 비추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이 세상은 얼마나 험악하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속이고 많은 경우에 이런 부당한 일 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너희의 착 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라고 하시죠.
우리가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어도 착한 행실로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 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부당한 일을 당했어도 주님을 위해서 내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되니까 참고 견뎌내 고 오히려 그 상황을 감사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나가야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가 언제냐 하면 부당한 일을 당할 때예요.
예를 들어 재정적인 손해를 끼치고, 여러분의 시간을 많이 빼앗고, 많은 공을 들였는 데도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고, 여러분의 하나 밖에 없는 주차장을 누가 계속 쓴 다면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생명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에도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나야 되는데 만일에 내가 드러났다고 한다면 화가 올라오고 화를 통제하지 못하고 쏟았다
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이 사건을 일으키셨을까요?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화를 내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까지 자라기를 원하시는가 하면,
만일에 여러분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재정적인 화를 당하고 이웃집이 계속 여러 분의 주차장을 쓰고, 정작 내차는 주차할 곳이 없고 이럴 때 여러분이 문제삼지 않고 넘어가고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있다면 많이 통과한 사람이에요.
왜 이런 부당한 일이 내 삶에 일어나게 하실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넓히시려고요. 할렐루야!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사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 똑같은 유형 의 문제들을 일으키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통과하라고요.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영성훈련을 몇 년 동안 왜 받느냐 하면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 받 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런 생명의 삶을 추구하는 열정이 없다면 안 되죠.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는 목적이 뭐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죠. 사도 바울도 뭐라고 했어요?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라고 말했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원하시는 것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길 원하시 고 우리의 삶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서 사건을 일으키고 계시고요. 할렐루야!
예레미야 48장11절을 보겠습니다.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 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 하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문제가 없고 사건이 없는 사람들은 이 모압과 같은 존재예요. 하나님이 전혀 관심이 없는 자예요.
하나님이 정말 관심 두고 사랑하는 자는 그 인생에 많은 문제와 사건을 일으키세요. 왜냐하면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드러내실려구요.
여러분, 꾸중물통을 한 3일간 가만 둬 봐요.
윗물은 깨끗한데 밑은 막대기 같은 것으로 휘 저어 봐요. 얼마나 더러운 냄새와 더러운 찌꺼기가 올라오는지요.
여러분의 인생에 왜 하나님이 문제와 사건을 허락하시느냐 하면 우리 안에 냄새나는 찌꺼기를 다 처리 하실려고 그러시죠.
그래서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다고 하잖아요. 이스라엘은 얼마나 포로된 적이 많았습니까?
식민지가 되고, 바벨론 포로가 되고, 나라가 망하고.... 왜 그래야만 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요.
여러분, 예를 들어 내 인생에 사건이 터졌고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 생긴 것임을 알고 거기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의 사람들로 변화 받고자 하는 열정과 추구가 여러분과 저에게 항상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생명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말 내가 그리스도와 같은 자 즉 그리 스도가 내게서 나가고 내가 없어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살겠다는 그런 결단과 의지가 없이는 결코 여러분의 옛 자아의 모습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살겠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수 있겠어요?
나의 모습을 벗고자 하는 자만이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 가셔서 살줄로 믿습니다.
생명단계의 두 번째 특징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여러분, 이 열매는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자인데요.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길을 가고 있거든요. 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기 위해서요.
하나님이 나타나는 자는 그 하나님을 다른 사람이 받아요. 우리는 이것을 ‘생명의 전이’ 라고 해요.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간다는 뜻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 나를 주는 자가 있고 예수를 주는 자가 있어요. 여러 분이나 저나 우리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나를 주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 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이 바뀌어져서 말이나 행동에서 예수가 나타나야 해요.
이렇게 함으로써 내 삶에 평범하게 대인과 영성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만나는 사람은 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어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었잖아요?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피멍이 든 그 몸으로 매 맞고 씻지도 않고 핏자국 엉겨 붙은 그 몸으로 바울과 실라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어요. 어떻게 바울이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바울은 3층천을 다녀온 사람이었어요.
이미 모든 것을 다 보았어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때문에 핍박 받고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어떤 자가 큰 자인가를 알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떤 일이 생겼어요?
지진이 나면서 감옥 문이 열렸잖아요. 그때 갇힌 자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간수가 자 기가 죽임당할 것을 알고 자결 할려고 했잖아요.
그것을 본 바울이 뭐라 그래요?
“너 칼을 내려 놔라 내가 여기 있다” 고 하죠.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볼 때 바울을 만난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 이었어요. 바울에게서는 정말 내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가는 자 였어요. 그랬더니 그 간수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습니다.
바울이 말하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그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집으로 데려가서 피멍을 다 씻어 주고 설교를 듣는 중에 그 집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어요.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우리를 만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끔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대인과 영성에서 힘써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 이웃이 나 타났을 때 그가 원수든, 아니든 상관없이 우리가 뭘 주려고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줄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줄려고 하면 내가 나갈 수가 없어요.
내 감정이 나갈 수가 없고 내 생각과 판단이 나갈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주길 원 한다면 미워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여러분이나 저나 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의 생명단계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지를 봐야돼요. 이것이 사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교육과 문화와 환경을 보면
‘나만 기쁘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해요. 그게 아니지요. 저도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그런 줄 알았어요.
신앙이 어릴 때도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행복하면 모든 것이 OK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주님을 알면 알수록, 내가 주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기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너희는 날마다 자라가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나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노라”
그래서 여러분, 생명의 삶은 나를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 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이것을 적용시켜 보세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결국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다음에 생명단계의 네 번째 특징은 ‘영화로움이다’라고 나와 있는데 생명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모든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섬기는 것도 기쁘게 여기고 이웃이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섬기는 것을 기 회로 삼고 이웃에게 하나님을 주면서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 모든 삶이 영화롭게 느 껴진다는 거죠.
그리고 생명단계의 다섯 번째 특징은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입니다.
여러분, 영성훈련을 10년을 해도 시비를 가리고 있다면 아직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 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이방인들 속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화가 올라오 죠? 왜 화가 올라옵니까?
시비를 가리기 때문이죠.
“왜 당신이 내 주차장에 주차했느냐 말이에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것이 시비를 가리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왜 이런 사건을 우리 인생 속에 허락하시는가 하면 네가 빛의 역할 을 감당하려면 지금 당장 네 앞에 있는 이방인인 그에게 빛을 보여 주라는 거예요. 빛을 나타내라는 거예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주라고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렇게 화나던 것이 화가 안나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저 사람을 사용하여 이 상황을 만들고 계시니까요. 할렐루야! 저도 이것을 깨닫기까지 몇 년이 걸렸어요.
제가 맨해턴에 살 때 저는 주차장이 하나 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1층에 한의사 하는 분이 사셨어요. 매일 손님들이 제 주차장에 주차하는 거예 요. 그래서 나는 주차를 못해요.
그런 일들이 왜 내 인생에 계속 일어 날까 했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차를 길거리에다 하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요.
그제서야 제가 그 시험에서 통과가 되더라는 것이에요.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지를 알아야 돼요.
우리는 예수 잘 믿는다고 하고 잘 믿는 신앙인처럼 행동하면서 정말 필요할 때는 빛 을 비추지 못하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안 해도 되는 상황에서는 내가 잘난 척하고 그런 우리의 모습들이 있죠.
내가 길거리에 주차하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주차장에 주차를 안하더라구 요. 이것을 누가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죠.
처음에는 그분들이 많이 미웠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너무 감사했어요.
저들이 아니면 내가 결코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는, 건널 수 없었던 그 강을 그분들 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건너게 하셨어요. 할렐루야!
그 사람들도 예수를 믿게 되고 좋은 결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예수 믿는 자들로서 예수 안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욕먹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러분이나 저나 항상 깨어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없는 얘기들을 제가 조금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이니 적으실 분들은 적으시고요.
여러분,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해요.
생명의 삶을 살게 되면 결국에는 많은 열매가 맺어지는데 이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서는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해요.
첫째는 내가 비워져야 됩니다.
내가 비워지기 위해서는 영성훈련에서 자아파쇄에 주력해야 합니다.
나의 못된 자아들이 내려놓아져야 비워진 내 안에 누가 와서 살게 될까요?
비워지지 않으면 못 들어오시는 거예요.
컵에 물을 반 정도 채워 놓으면 공기가 반 정도 채워져 있잖아요? 그러나 물을 다 버리면 공기가 컵을 가득 채우죠.
그것처럼 우리가 우리 안에 내가 비워져야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있는 거 예요.
우리는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해요.
이것을 영성훈련에서는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와서 사는 것을 신령한 집이 지워진다 고 말해요.
내가 비워지고 내 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져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서 동고동락 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기는 생명으로 넘어가야 돼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쫒아서 사는 삶과 순종하는 삶 이 두 가지가 같이 이루어져야 돼요. 어떤 사람은 이 아랫것만 강조해요.
아무리 강조해도 내 안이 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살 수가 없어요.
아무리 내가 입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나도 죽었다라고 말은 하지만 내 안이 비워지지 않고 내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말한다고 해도 예수 가 그 안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다 이루어져야 돼요.
여러분이 3년 동안 영성훈련 하는데 이 두 가지를 하는 거예요.
나를 비우는 작업 그리고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사실 때 내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쫒아서 사는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여러분이 3년 동안 훈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베소서 4장 22절부터 24절 보겠습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갈라디아서 4장 19절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
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 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라”
내가 다 버려지고 내 안에 누가 산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사시는 거라고 했지요.
다음에 갈라디아서 5장 24절 다 같이 읽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다 같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을 읽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아까 읽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 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은 자아파쇄죠.
벗는 훈련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가 자아파쇄 하라는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제게 와서 성경에 자아파쇄란 말이 어 디 있냐고 물어요.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왜 성경에도 없는 그런 말을 씁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2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 로 ‘벗고 입으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파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라 고 대답해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와서 좀 들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아파쇄 훈련은 벗고 입는 거예요. 나의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죠.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려 볼께요.
우리가 많은 경우에 감정, 즉 부당한 일을 당할 때 화가 올라오죠? 감정이란 것이 ‘자아’잖아요?
주님은 어디계시냐 하면 우리 속사람 안에 있거든요.
내가 내 감정을 내려놓지 않으면 내가 느끼는 것은 바깥에 있는 감정만 느껴져요. 내가 주님으로 행하고 주님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게 올라오는 이 감 정이란 자아를 벗지 않고는 이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UP 되었을 때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던가요?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주님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내가 느끼는 것은 주님의 바깥에 있는 감정이 주님을 둘러싸버려요. 아예 안 느껴지는 거예요.
나의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는 주님이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주님이 만져지지도 않고 주님으로 행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을 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옛 사람의 모습들을 자아파쇄 훈련을 통해 벗기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깨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이것이 없어지고 정말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내가 느껴질 수 있게끔 훈련해야 돼요. 이것이 자아파쇄 훈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아파쇄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냐 하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모든 문제와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을 깨뜨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나에게 왜 오늘 이런 문제가 생겨서 내가 또 넘어졌나?”
하고 낙심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문제와 사건을 통해서 내가 왜 넘어졌는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감사가 나오더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서 그것을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거죠.
우리는요, 자아파쇄가 되어져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내 안에 이루어지고자 하는 추구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모든 문제와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면 모든 문제와 사 건을 ‘내 자아가 파쇄 될 기회’로 봐야 하는 거예요.
‘문제가 터졌다’, ‘감정이 올라오려고 한다’
그럴 때 이런 말 하잖아요? “브레이크를 잘 걸어라.” 여러분, 차가 브레이크가 잘 안 걸리면 어떻게 해요? 이것은 응급상황이죠? 사망당할 수 있죠.
여러분, 내안에서 감정이 올라오려고 할 때 브레이크를 잘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로 믿습니다.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문제와 사건 속에서 나의 자아파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설사 넘 어졌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주님, 왜 나에게 이런 사건이 발생했습니까?”
그리고 “나의 반응이 어떠했고 나는 또 넘어졌습니다.” “여기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물어 보면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죠.
예를 들어 이 문제와 사건 속에서 정말 부당한 일을 당해서 화가 올라오고 그리고 화 를 참지 못해 쏟았다고 하면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넘어졌잖아요?
화를 쏟은 게 너무 분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애통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 모습이 아직도 이렇습니다. 왜 제게 이 사건을 허락하셨습니까?” 화가 나는 이유가 뭐라구요?
워치만니가 이렇게 썼어요. “교만한 자가 화를 낸다”구요. 화를 내는 자는 내가 교만하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제가 봐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교만하니까 화를 내는 거예요.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데 왜 화를 내는가 하면 워치만니의 말대로 교만한 자가 화를 내는 거예요.
내 안에서 왜 화가 나는지 이유를 봤더니 아직도 ‘너보다 내가 옳다’라는 생각을 갖 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드 러나게 하실려고요.
‘내가 너보다 낫다’라는 생각은 진리가 아니잖아요?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남을 너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시죠.
아직도 이런 마음이 있고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화가 올라온다는 거예요. 이런 마음들을 처리하고자 하나님이 그 문제와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거죠.
그 사람을 나를 위해 사용하신 거예요. “어제 내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며칠 전에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
내 안을 들여다보니까 내 안에 이런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처리하시려고 그 문제와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그 때는 넘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그분들을 미 워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더 잘해줘야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는 모든 문제와 사건 속에서 자아파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문제와 사건이 있습니까? 삶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걸어오시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더란 것입니다. 모든 문제와 사건 속에서 내 삶에서 하나님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왜 이 사건을 일으키시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문제와 사건을 통해서 듣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아는 영적지각 즉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장성한 자라고 했어요.
여러분의 삶이 장성한 자의 모습으로 변하여져 갑니다.
왜냐하면 문제와 사건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까지 나 자신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기 때문에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자의 것으로 변하여 가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물어볼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중 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말씀하시는 것은 문제와 사건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걸어오시더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눈이 여러분에게 열리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그 정도가 많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에서는 다 놓치고 기도 속에서만, 예언에서만, 병 고치는 것에서만, 이런 데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 님의 음성을 다 놓치기 때문에 10분의 7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나가서 무엇에 대해 애통해야 돼요?
남편이 나한테 잘못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애통해야 해요.
그런 남편을 안아줄 수 없고, 그런 남편을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 없고, 안 되는 나를 놓고 애통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을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곳으로 불러 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많은 아픔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아픔을 통해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성장시킬 거예요. 여러분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목적 안으로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이 이 목적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모든 문제와 사건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그 목적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려고 하실 때 잘 깨 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나그네 인생이에요.
가만히 보면 어제 보이던 사람이 안보이구요, 한 달 전에 수박을 같이 잘라 먹던 사 모님도 안보이고, 조금 먼저 가고 조금 뒤에 가는 나그네 인생이란 것입니다. 이 나 그네 인생 속에서 티격태격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인생이 연극이라고 했어요. 연극은 마치면 집으로 즉 본향으로 갑니다. 인생이 연극입니다.
막 함부로 살다가 실재 본향에 갔더니 거지로 살아요.
내가 이 세상에 살 때는 돈이 많고 인정도 받고 그럴싸하게 살았는데 본향에 돌아가 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에서의 인생이 연극하는 삶이란 거예요.
여러분, 연극하는 배우가 그 역할이 끝나면 집으로 가잖아요?
잠깐 무대에 나와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다가 끝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영원히 자기 집에서 살잖아요?
우리가 늘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은 “내가 본향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연극과 같은 인생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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