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방

생각이 변해야 사람이 변한다.

하늘이슬 2009. 9. 11. 15:34

생각이 변해야 사람이 변한다.

2006. 1. 22.

 

 

  첫 번째는 그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생각이 곧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의도, 뜻, 생각, 동기가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나 행동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번듯하게 그럴싸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우리의 생각을 살펴야 합니다. 내 생각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생각은 날개가 있습니다. 길을 걷고 있을 때, 누웠을 때, 가장 편안한 시간에, 무의식중에 내 생각은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을 향하여 날아가야 합니다. 높은 데로 날아가야 합니다. 땅에 있는 물질이나 명예나 쾌락이나 성공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행동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회개의 원어는 메타노이아입니다. “생각을 바꾸다, 마음을 바꾸다”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나 행동만 바뀌었으면 외식입니다. 생각은 바뀌지 않았는데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성경공부 잘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보십니다.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우리를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생각들을 꿰뚫어보시고 직접적으로 우리를 아십니다. 생각을 바꾸는 회개가 우리 속에 일어나고 구원 받을 정도로 그런 회개가 있어났더라도 더 철저하게 더 깊이 그런 회개가 일어나가지고 정말로 정결한 사람이 되어서 마지막 때, 대부흥 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생각이 바뀌려면 계시가 필요합니다. 생각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생각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의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서 생각이 변화된 의인, 생각이 변화되지 않은 악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판이한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겨는 알맹이가 없는 것입니다. 쭉정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쭉정이입니다. 말이나 행동은 그럴싸한데 그 속에 알맹이인 마음의 생각이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알맹이, 알곡 신자일까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알곡만 데리고 가십니다. 알곡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이,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내용, 우리의 속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알곡은 속이 차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해져야 합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겸손이, 온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고 그것이 알곡입니다.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악인도 죄를 짓고 제멋대로 살아도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면 다 심판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속은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의인의 회중은 천국입니다. 의인의 회중은 휴거의 복된 대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은 단 한 사람도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의인이며 누가 악인일까요? 악인은 악인의 꾀를 생각하고 악인의 꾀를 좇는데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쩌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생각이 바뀐 사람을 여기서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마태복음 5장 20절 이하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생각이 변화된 자라야 진짜 천국에 가는 자고 생각이 변화된 자라야 진짜 의인이라는 것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청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종교가 아니고 마음의 청결입니다.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의 청결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마음의 겸손, 온유함, 마음의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중요한가? 마음의 청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무엇을 보여 줍니까? 묵상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묵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악인은 악인의 꾀를 생각하지만 의인들의 특징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의인들을 의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생각이 바뀝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 생각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히 4:12) 그것이 우리 생각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이것이 의인입니다. 묵상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기서 볼 수 있지요?

  테드해가드 목사님은 “지역 교회의 최고의 사명”이란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한 다음에 말하고 말한 다음에 행동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성경의 원리를 어기는 생각을 하면 곧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나쁜 책보다 좋은 책이 낫고 저질 영화보다 좋은 영화가 나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인생을 바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인생을 바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TV를 많이 보는 것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TV를 많이 봄으로 말미암아 너무 세상적인 것을 많이 생각함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나쁜 영화들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안 좋은 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운명이 바뀔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테드해가드는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 묵상을 원어로 풀어놓으면 “묵상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는 뜻이 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자꾸 입으로 고백하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사람이 바뀝니다. 그것이 성경에 믿음을 받는 원리이기 때문에 그 믿음에 의해서 우리 속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하는 시간만 가지면 변화가 안 됩니다. 이제는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카페에 있는 “새창조”란 게시물을 매일 읽고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매일 가정예배 때 가장이 선창하고 가족들이 따라하고 고백할 때 그 속에 믿음이 들어가게 되고 그 속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생각이 바뀌고 그 사람이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변화됩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내 생각의 주제와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명예를 생각하고 쾌락을 생각합니다. 이게 죄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주제가 바뀌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내가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이것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생각의 주제와 대상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내가 신령한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말도 바뀌고 행동도 바뀌어야 합니다. 내 노력만으로 말과 행동과 생각을 바꾸는 것은 참 힘들고 온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겔 18:31) 내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내 생각이, 내 마음이 바뀝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한 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창세기 19장 29절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사무엘상 1장 19절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시편 139편 17절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144편 3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에스겔서 24장 25절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의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제하는 날”

  빌립보서 1장 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4장 10절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히브리서 13장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여기 생각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잖아요. 이 생각이 무엇하고 관련이 있을까요? 여기 나온 생각은 전부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 생각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이 생각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나타나는 것을 이 모든 성구들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비결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니라.”(요일 4:19)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거기에 감동되면 자연히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지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쏟지 않았으면 부모라고 자녀들이 무조건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을 거두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고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나야 유혹이 되는 것인데 생각이 나지 않으면 유혹이 되지 않으니까 죄도 짓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모든 유혹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세상이 나에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생각을 바꿔놓느냐? 주님의 사랑이 바꿔놓는 것입니다. 근본을 지적하면 십자가가 바꿔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생각을 바꿔놓고 모든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고 완전히 변화되고 싶으면 십자가에 주목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주목하시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무데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길이 있습니다. 비행기는 항로가 있고 배는 수로가 있고 자동차는 도로가 있듯이 우리 생각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길입니다. 내가 무엇을, 누구를 사랑하면 내 생각은 반드시 그 길을 따라갑니다. 내 생각을 바꾸려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생각이 바뀌려면 계시가 임해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6~9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말씀에 주목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버려야 하는데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이 회개인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초월적으로 높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제한적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뱅뱅뱅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지식에 의존한 설교는 늘 그렇습니다. 설교는 계시적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제한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지만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한 지식과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제한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거기서 “뭐 좀 배웠다. 대학 갔다. 공부를 잘한다. 박사다. 석학이다.” 그래도 생각이 엄청나게 차이 나는데 완전한 무한대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하나님하고 제한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인간하고 이거는 하늘과 땅입니다. 절대로 성경은 지식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바탕으로 쌓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초와 바탕으로 습득해야지 이것을 가지고 끝까지 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공부는 해야 하고 지혜와 지식을 갖추고, 그 다음에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께 의존해서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계시가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영의 세계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착각하고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뭐가 옳으니 그르니 좀 배웠다고 대학교수라고 박사라고 웃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높기 때문에 그 생각이 하늘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게 내려오는 것, 하나님의 생각이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바뀌려면 이런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계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될 때 우리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8~10절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5, 16절에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는 것이 계시입니다. 십계명 돌 판에 십계명을 기록한 것을 빗대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돌 판에다 말씀을 새겼는데 지금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입니다. 새 언약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이 구원 받으려면 복음 제시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영혼에 역사하시므로 말미암아 계시를 주셔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으려면 계시가 임해야 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것이 계시인 것처럼, 그것이 단순히 지식이 아닌 것처럼,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내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계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종이를 들고 올라갔습니까? 산을 올라가는데 돌을 깎아서 만든 무거운 돌 판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록하기 위하여 종이와 먹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 판에 글씨를 파서 새겨 넣으셨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지식은 혼의 작용이지만 계시는 영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심령 깊숙이 뚫고 들어가서 새겨집니다. 이것은 계시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늘 복음을 듣고 늘 설교를 들어도 그 영혼에 계시가 없기 때문에 종교인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개인의 영혼에 계시가 임해야 합니다.

  제가 히브리서 두 구절을 읽는데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이 아니고 새 언약이다. 옛 언약 때는 돌 판에다 십계명을 새겼지만 새 언약 때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이것을 새긴다. 그런데 새 언약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지만 구약시대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에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신약시대에 이것이 이뤄지는 줄 아느냐?”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지식이라면 구약에서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입니다. 구약에는 선지자들에게만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들만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약시대는 만민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만민에게 계시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새 언약이다. 그래서 이것이 신약시대에 이뤄지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나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 이해한다.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을 잘 가르칠 수 있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알면, 우리의 학문이나 지혜나 표현력이 얼마나 되면, 웅변을 얼마나 잘하면, 표현력이 아무리 문학적이고 달콤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80세 노인이 산에 올라가서 돌 판에다 어떻게 글씨를 파고 새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겼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는 것입니다. 그때 내 생각과 내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혼에 필요한 계시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모세가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았는데 어린 양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 50일 후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50일이 되었을 때,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에 의해서만 영혼의 구원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사람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려면 내 마음이 바뀌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과 생각에 기록할 때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법을 내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 그러면 내 생각과 마음이 달라지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말도 현실도 달라지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완전한 성화는 아니지만 그런 근본적인 방향 전환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그러므로 목회는 절대로 지적인 목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사람이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시나니”(고전 3:6) 심는 것은 복음 전파고, 물을 주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래서 저도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지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말씀을 얼마나 알든 주어졌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그 시간 나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나를 써 주셔야지 내가 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에 교만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병 고치는 사람도, 예언하는 사람도, 봉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하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심어봤자, 물을 줘봤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우리가 녹아져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세례를 받을 때까지 여기 머물러라.”(행 1:8)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먹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 것이다.”(고후 3:3) 바울은 ‘내 설교로 한 것이다. 내 책으로 한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이것은 성령으로 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다. 성령으로 우리가 너희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만드셨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한 것이다.’ 성령에 의한 말씀의 계시가 교회 안에 쏟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받아 들여야 사람의 생각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이나 견해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은 관심, 신념,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호불호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 5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이 구절에서 바울은 견고한 진, 사탄의 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견고한 진은 “모든 이론”, 원어를 보면 상상입니다. 그리고 견고한 진은 생각과 연결시켰습니다. 영적 무기를 이런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것과 연관시켰습니다.

  영적인 무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지식적인 말씀이 아니라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잡고 사용하시는 것. 설교자가 말씀을 잘 안다고 그냥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식도 말씀을 검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말씀을 좌우에 날선 검이 되게 하고 사람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기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진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탄의 진은 잘못된 상상, 잘못된 고정 관념, 잘못된 생각이 사탄의 진인데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이런 상상, 생각이 마귀에 의해서 형성된 악하고 견고한 진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포로로 만들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대로 되어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마귀의 진이 될 수 있다면 생각은 하나님의 진이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마귀의 진이라면 올바른 생각, 단순히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에 의해서 우리 생각에 심겨지고 우리 마음에 심겨져서 지워질 수 없는 마치 무너질 수 없는 견고한 진처럼 우리 속에서 자리 잡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견고한 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그것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는 무엇을 알게 되든지, ‘전에는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그런 가벼운 혼적인 작용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변화는 비유컨대 이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육으로 되겠습니까? 이것이 단순히, 성경공부나 강해설교로 되겠습니까? 물론 강해설교를 통해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실 때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적인 설교, 세련된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달변이나 아름다운 문학적인 표현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기름부어시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 강해설교나 제자훈련을 통해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만 성령의 역사가 결여됐고, 인간의 지혜와 번뜩이는 문학적인 표현으로는,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교육이나 성경공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계시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계시를 사모하고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설교 듣고 머리 굴리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머리를 굴리면서 그 설교가 틀리니 맞느니 할 것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머리 굴리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은 지식을 얻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꾸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계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포되는 말씀들이 여러분의 생각에,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런 시간이 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을 주셔서 그 시간에 주시는 말씀이 성령의 검, 좌우의 날선 검이 되어서 혼, 영,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게 하시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교만해져서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들음으로 말씀 듣는 사람들의 마음, 생각 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고 계시가 임하고 그들이 바꿔지고 변화되는 그런 시간으로 축복해 주옵소서.” 여러분이 예배를 위해서 중보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그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어떻게 해야 계시를 받을 수 있느냐?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두운 가운데서 삽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생활 혹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는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죄가 더러운 줄 모릅니다. 죄를 짓고 살면서도 막 좋다고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 임하면 이제 그 더러운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더러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면 더러운 것을 알게 되고 기겁을 하고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계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식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지식 이상의 것, 계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려면, 변화되려면, 그것을 따르려면 지식 이상의 것인 계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쾌락, 명예, 권세, 성공에 대한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때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머리로 아니고 마음으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3; 12:13) 이런 실제적인 결단과 실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빛, 계시 속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때 세상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만 보배로 여기고 예수님만 목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나아가서 우리에게는 거룩, 겸손, 섬김, 고난, 순교에 대한 계시가 필요합니다. 릭 조이너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순교에 대한 계시가 교회에 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계시는 정보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바꿔놓습니다. 계시는 전에 우리가 원했던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합니다. 계시는 전에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원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진정한 계시의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변화입니다.

 

  그러면 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계시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첫째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지식을 얻지요?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역사하실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성령이 갑자기 어떤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사용하십니다. 어떤 한 구절을 뽑아서 성령의 검으로 사용하시면 갑자기 그 말씀이 내 심령에 예리한 검처럼 와서 박힙니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잠 12:11)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찌르는 채찍같이 잘 박힌 못과 같이 우리 심령에 와서 아로새겨지고 박히게 됩니다. 그것이 계시입니다. 그것이 레마인데, 레마는 영적인 빛이요, 영적인 계시입니다. 그것이 우리 생각을 바꿔놓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계시를 받기를 원하면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 자체가 계시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읽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만 성령이 감동하시면 성경은 무진장한 계시의 보고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님의 개인 기도>

  거룩하시고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생각에 대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송과 찬양을 드리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버지, 생각이 곧 그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을 바꾸고 단순히 행동을 바꾸고 단순히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생각이 바뀌려면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합니다. 지식으로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돌 판에 십계명을 새긴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그와 같은 계시를 통해서 우리 생각이,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결과적으로 인격과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이고,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고,

  계시적인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계시적인 책들을 열심히 읽는 것이고,

계시적인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내 생각이 있고,

  마귀의 불화살(마귀가 심어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각각 반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 생각은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굴복시키고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불화살은 즉시 말씀의 물로 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물로 바로 꺼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는 불화살을 막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물로 마귀의 불화살을 꺼버리게 해주소서. 즉각 끄고, 즉각 항거하고, 즉각 승리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사랑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음성을 존중하게 하소서. 주님의 음성을 꿀송이보다 더 달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천천금은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그것을 정말 내 영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고 내 삶의 빛으로 삼게 하소서.

  아버지, 생각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 영이 인정하고 공명할 때 그런 생각들을 귀히 여기게 하소서. 그것을 묵상하고 기억하고 그것을 내 마음 속에 담아두게 하소서. 그것을 묵상하고 그것을 가지고 회개하고 그것을 가지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그 말씀의 씨앗들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생각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부어주소서. 무엇이 내 생각인지 알게 하시고 더 이상 내 생각을 고집 않게 하소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내 생각을 분별하고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불화살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위배되는 것은 불화살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위배되는 것은 불화살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성품에 위배되는 것은 불화살입니다. 마귀의 불화살을 분별하게 하소서. 마귀의 불화살은 즉시 말씀의 물로 끄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 속에서 번져나가지 않도록, 그것이 우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즉시 끄게 하소서.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하소서.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시면 우리 영이 즉각 들어 알게 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즉각 눈치 채게 하시고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 음성에 겸손히 굴복하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을 천천금은보다 중하게 여기고 꿀보다 달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 지혜의 영이실 뿐만 아니라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 우리는 지혜도 필요하고 계시도 필요합니다. 지혜와 계시 사이에 균형이 필요합니다. 지혜는 계시를 받쳐주고 계시는 지혜를 받쳐줍니다. 지혜는 계시를 보충하고 계시는 지혜를 보충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정로를 발견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분별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무엇이 길인지 알게 됩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주님은 지혜와 계시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되고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십니다.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사모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소서.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한 자가 있느냐?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시간에 주의 백성들에게 지혜를 부어주소서. 주여, 이 시간에 주의 백성들에게 계시가 임하게 하소서.

  주여, 주님의 영을 물 붇듯 부어주소서. 주님의 영광이 이곳에 임하게 하소서. 주님의 임재가 이 시간에 강하게 나타나게 하소서.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주의 영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하소서. 주님, 역사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