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하스킬(1895-1960)
"나는 평생 진정한 천재라 할 만한 사람을 셋 만났다. 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_찰리 채플린
세상에는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겪었던 천재 음악가들이 더러 있지만, 클라라 하스킬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달리 또 있었을까. 온몸이 뒤틀리는 불치의 병에 걸려 불과 몇 년 사이에 천사와 같던 용모를 잃고, 나치가 무자비하게 유대인들을 탄압하던 시절에는 병석에 누워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육체적 고통과 고독, 전쟁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녀를 엄습했습니다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음악을 무너뜨리진 못했습니다.
클라라 하스킬은 1895년 루마니아에서 유대인 부모 슬하에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성장했지요. 자라면서 한번 들은 음악을 대부분 그 자리에서 기억해내는가 하면 때로 즉석에서 조바꿈 연주까지 하는 등 일찌감치 신동이자 천재로 불렸습니다.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14세에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그녀의 나이 18세, 글자 그대로 꽃보다 아름답고 무한한 영광만이 그녀의 앞길을 비춰줄 거라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때 척추측만증(scoliosis)이라는 불치의 병이 그녀를 엄습해오면서 기나긴 시련이 시작됩니다. 연주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그녀는 뒤틀려가는 자신의 온몸에 보장구를 부착한 채로 침대에 누워 투병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를 돌보아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클라라 하스킬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며 하루하루 병마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년 뒤인 1921년, 무서운 의지로 병마와 싸워온 클라라 하스킬은 무대공포증에서 벗어나 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라 모차르트를 연주하며 재기에 성공합니다. 이어서 1924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1926년에는 영국에서 데뷔 연주를 가졌고, 그 후 파리에서 당시 음악계 후원자로 명성이 높았던 폴리냐크 공작부인에게서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연주를 계속합니다. 그 후 1930년대 후반까지 이자이, 카잘스 등과 같은 당대의 초일류 대가들과 작품활동을 하지만, 당시 청중들의 반응은 어린 시절 그녀가 받았던 평가에 비하면 많이 모자랐었나 봅니다. 아름다운 미모와 더불어 수많은 찬사 속에서 천재로 칭송받던 그녀에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행과 그로부터 연유한 그 후의 일련의 일들이 그녀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했을지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유대인이었던 클라라 하스킬에게도 악몽 같은 시절이 닥칩니다. 당시 파리에 머물던 그녀는 그곳을 떠나 마르세유로, 다시 스위스로 이리저리 피난처를 따라 떠돌게 되는데, 온전치 못한 건강상태로 강행군을 하면서 전쟁의 공포와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나머지 그만 뇌졸중을 얻어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이때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한 유대인 의사가 소식을 듣고 마르세유까지 찾아와 그녀의 수술을 위해 집도합니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클라라 하스킬은 다시 생명을 건졌지만, 18세 이후 그녀를 떠나지 않았던 기나긴 고통으로 결국 그녀는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에 비해 20년 이상 더 늙어버린 외모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10년쯤 후, 구소련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1956년 1월에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방문하게 됩니다. 방문에 앞서 소련 음악계의 지인들은 그녀에게, 서방세계로 가게 되면 당시 떠오르던 지휘자 카라얀의 연주회를 꼭 가볼 것을 권합니다. 잘츠부르크에서 마침 카라얀의 모차르트 연주회가 열리게 되자 니콜라예바는 티켓을 구해 연주회에 참석했습니다. 훗날 그녀는 이 연주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협연을 위해 나온 피아니스트는 온몸이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지휘자 카라얀의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내 눈에는 오직 피아니스트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건반에 손을 올리자 나의 뺨에는 곧이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차르트는 내가 아는 모든 모차르트들 중에 최고였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렬해서, 연주가 끝날 때쯤 연주단원은 물론 카라얀마저도 그녀에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1949년 클라라 하스킬은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며 처음으로 레코딩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녀가 녹음한 모든 연주들은 하나같이 명반으로 남게 됩니다. 195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함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녹음하며 유럽 연주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1960년 12월 7일, 파리에서 그뤼미오와의 연주일정을 성공리에 마친 클라라 하스킬은 다음 예정지였던 벨기에의 브뤼셀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가던 하스킬은 갑자기 계단에서 쓰러져 머리를 부딪쳐 심하게 다친 채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의식불명이던 그녀는 얼마 후 잠시 정신을 되찾았는데, 그 잠깐 동안 자신의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무래도 내일 연주는 어려울 것 같구나. 그뤼미오 씨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렴."
평생을 독신으로, 두 번의 전쟁, 나치의 공포, 척추측만증, 다발성세포경화증, 뇌졸중, 척수종양,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65세의 클라라 하스킬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 하스킬의 연주를 듣노라면,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도 건반을 누를 때마다 매번 느꼈을 그녀의 고통이 떠올라 더욱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클라라 하스킬이 짊어졌던 삶의 무게가 참으로 무겁게 전해 오지만,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운이 좋았어요. 평생을 벼랑 끝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결국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거든요. 이것은 신의 축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