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가 <1812년 서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의 일로 <이탈리아 기상곡>을 완성한 지 조금 뒤의 일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릴 산업예술박람회의 음악감독이 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당시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이자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였으나,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혹평한 일로 한때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었다)의 의뢰 때문에 쓰게 된 작품이다. 경제관념이 다소 희박해 빚을 지기 일쑤였던 차이코프스키였던지라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만, 어지간히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던지 당시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어떤 축전을 위해 작곡하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다’, ‘아무런 애정도 없이 쓴 것이어서 그리 가치가 없다’는 등 스스로 작품에 신랄한 혹평을 가하고 있다. 이런 곡이 오늘날 표제음악의 걸작 중 하나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작곡가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런 애정도 없이 작곡한’ 표제음악의 걸작
제목의 ‘1812년’은 이 해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전(러시아에서는 이를 ‘조국전쟁’이라 불렀다)을 가리킨다. 처음에 의기양양하게 진군하던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만나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이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혁명 때 작곡되었으며, 현재 프랑스 국가이기도 하다)와 제정 러시아 국가의 각축으로 표현되었으며, 결국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 악단이나 지휘자가 이 곡을 녹음한 사례는 거의 없다. 말하자면 이란에 마라톤 선수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는 다분히 외면적이고 통속적인 효과를 겨냥한 작품이지만, 매우 극적이며 악상의 전개가 절묘해 표제음악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이 곡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다룬 음악이다. 말 위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바라고 있다.
이 곡은 교회 종과 대포 등 정규 관현악곡에서는 쓰이지 않는 특이한 악기(?)가 사용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 곡의 인기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초심자에게는 엄청난 극적 쾌감을 선사하고, 오디오 마니아에게는 음반과 음향기기의 재현 능력을 가늠할 잣대 중 하나로 여겨진다. 물론 실내에서는 대포를 쏠 수 없기 때문에 일반 공연장에서는 보통 큰북으로 대체되며(이 경우에는 교회 종 파트도 대개 차임벨로 연주한다), 야외 공연에서는 군대의 의전용 대포를 빌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대포를 누가 쏘게 할 것이냐를 놓고, 이 경우에는 대포도 악기라는 이유로 음악가가 맡아야 한다는 의견과 대포는 어디까지나 무기이니 군인이 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군악대에서 한 명 차출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Vladimir Ashkenazy cond.
St. Petersburg Philharmonic Orchestra 1996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과정이 그림으로 생생하게 전개됩니다. 음악과 그림 장면이 아주 잘 맞아떨어져 마치 역사의 현장에 뛰어든 감동이 밀려오네요. 강추!^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전투를 벌이는 클라이맥스
이 서곡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머리는 라르고, E♭장조로 비올라와 첼로가 함께 연주하는 장중한 주제로 시작한다. 이 주제는 러시아 정교 성가 ‘주여, 당신의 백성을 구하소서’에서 따온 것으로, 드물기는 하지만 서곡을 연주할 때 이 대목에 실제로 가사를 붙여 합창단이 노래하는 경우도 있다. 점차 힘차게 악상이 고조되다가(1부 후반부의 격하고 비통한 악상은 러시아 민중의 고난을 나타낸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2부에 해당하는 안단테로 접어들면 오보에와 클라리넷, 호른이 연주하는 주제가 러시아군의 출진을 알린다. 이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알레그로 주스토’(‘정확한 알레그로로’)로 지정된 대목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빨라진 템포와 더불어 급박한 분위기가 프랑스군의 침공을 묘사한다. 곧이어 ‘라 마르세예즈’ 선율의 단편이 금관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것이 가라앉고 나면 G장조로 고요한 민요풍 선율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노브고로드(모스크바 서남쪽에 있으며, 모스크바보다도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지방 민요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이 주제는 주로 현으로 연주되는 반면, E♭단조로 제시되는 경쾌한 춤곡풍 선율은 주로 목관(처음에는 플루트가 연주한다)이 담당하고 있다. 이 선율은 러시아 민요 ‘문 앞에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이후부터가 ‘알레그로 비바체’로 지정된 3부에 해당한다. 명쾌한 C장조로 전개되는 이 대목은 전곡 가운데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벌이는 격렬한 전투가 양쪽 악상의 교차로 묘사되며, 앞서 언급한 러시아 민요들도 다시 등장하면서 복잡한 전개를 보인다. ‘라 마르시예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가 대포소리와 함께 프랑스군이 서서히 퇴각하며, 곡 첫머리의 성가 주제가 교회 종소리를 배경으로 금관으로 힘차게 연주된다. 종소리가 그치고 나면 러시아군의 개선 행진이 벌어지며, 대포의 연발과 함께 금관이 연주하는 장중한 주제는 제정 러시아 국가인 ‘신이시여 차르를 보호하소서’이다. 성대한 종소리와 함께 전곡이 마무리된다. 덧붙이는 말이지만 제정 러시아 국가 선율은 구소련 시절에는 글린카의 오페라 <이반 수사닌>에 나오는 합창 선율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아마 정치가 히스테리를 부리면 예술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의 사례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의 국가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병장교 루제 드 릴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전쟁을 앞두고 1792년에 작곡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라인 강 전선을 향해 진군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프랑스 의용군들이 즐겨 불렀으며 1879년에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가로 채택되었다. '마르세예즈'라는 제목은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올라온 의용군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것에서 기인한다. (편집자 주)
추천음반 이 곡의 경우 음반 선택은 두 가지 기준에 따라 나눌 수 있다. 생생한 음향효과(특히 대포소리를 얼마나 잘 잡아냈는가)를 기준으로 따지자면 가장 먼저 에리히 쿤첼/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의 2001년 녹음(Telarc)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녹음도 대단히 뛰어나다. 이 연주가 음색이 좀 야하다고 판단한다면 네메 예르비/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1989년 녹음(DG)도 들을 만하다. 표지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 대포를 사용했으며 합창도 등장한다. 곡 자체를 얼마나 충실히 구현했느냐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996년 녹음(Decca)이 특히 우수하다. 전반적으로 모든 요소가 조화로우며 강한 통솔력으로 세련된 연주를 들려준다. 좀 오래된 녹음이긴 하지만 효과적인 극적 연출과 돈 코사크 합창단의 힘찬 합창이 돋보이는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의 1966년 녹음(DG)도 빼놓을 수 없는 녹음이다.
글
황진규(음악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전문지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스트라드> <인터내셔널 피아노> <콰이어 앤 오르간> <코다> <라 무지카> 등 여러 잡지에 리뷰와 평론, 번역을 기고해 온 음악칼럼니스트이다. 말러,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 닐센의 음악을 가장 좋아하며, 지휘자 가운데서는 귄터 반트를 특히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