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로부터 그 성읍의 이름이 "주께서 거기 계시다."(여호와삼마)가 될 것이라(겔48;35)
에스겔성전은 소망과 회복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라
제 3성전도 하나님이 멸할 것이라 봅니다.(겔43;5-12)(계11;1-2)(슥14;4) (단, 황금돔 사원 옆에 제 3성전이 설 경우),
재림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성전이 될 것입니다. (슥1;16, 6;12-13)(겔48;1-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겔43: 5-8)
가증한 거짓성전이 거룩한 성전 옆에 담하나 사이에 있게하여 예수님의 분노를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11:1-2)
동문의 중앙선으로 부터 현 황금성전의 가장 가까운 지역까지는 6미터의 공간이 있으며 이곳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성전 밖 마당이다.여기서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방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에언하고있다.
즉, 성전 밖 마당은 황금성전이며 이것은 곧 이방인에게 준 결과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있는가?
앞으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이 세워진다면 현재의 황금사원을 폐할 필요가 없이 그 옆에 나란히 세워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곳에 이방인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 건물이 바로 황금사원이 된다는 말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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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ekiel's (Third) Temple. New Jerusalem. Beast 666.
http://www.youtube.com/watch?v=nymuvDpQ-Fg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슥1;16)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슥6;12-13)
대제사장도, 대속죄일도, 희년도 나타나지 않는다.54)
에스겔서는 분명히 그러한 제사가 기념이나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속죄와 감사 등을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겔40:39, 42:13, 43:19, 43:21, 43:22, 43:25, 44:27, 44:29, 45:15, 45:19, 45:22, 46:20)
레위기 23장에 규정된 무교절, 나팔절, 속죄절, 맥추절, 오순절에 관한 규정은 없고, 오직 유월절과 장막절, 안식일과 초하루(new moon)만 나옵니다.
모세 율법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 대해 성결의식(정결례)을 행했던 것과 달리, 에스겔 서의 사독(Zadok) 계열 제사장들에 대해서는 따로 정결례가 없고 오직 그 제단에 대한 정결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43:20). 이는 십자가의 피로 이미 깨끗하게 되어 또 다른 성결의식이 필요 없는 참 신자들이 제사장들(벧전 2:9)이기 때문 아닐까요?
여기서 바울은 절기와 초하루, 안식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대속죄절을 비롯해 유교절, 무교절, 나팔절, 맥추절, 오순절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과 성령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지만, 장막절은 천년왕국에 성취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에스겔서에 오직 유월절(예수님의 초림), 장막절(예수님의 재림), 안식일과 초하루만 기록되어 있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성만찬(유월절)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장막절), 그리고 앞으로 있을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주일), 초하루(이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 10:10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심일까요? 삼상 20:5, 18, 24 등에서 다윗과 사울왕이 초하루절기를 지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4:22-23을 보면 초하루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 말씀을 배우는 듯한 암시가 나옵니다. 초하루절기의 의미는 말씀공부일까요?) 만이 있기에 에스겔서에서도 그 절기들만 나타난 것 아닐까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슥14;4)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성안에 성전은 없습니다.(계21;1-2)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Ⅲ.에스겔 40-48장의 성전구조
에스겔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그의 메시지에,사독 자손 제사장들을 이스라엘 배교 때의 신실한 제사장으로 표현했다(44:15;48:11).40-48장에
묘사된 신정정치는 제사 제도가 중심을 이룬다.새 성전은 지극히 높은 산 위에 세워진 성읍 형상의 것이며(40:2),사독의 자손 레위 제사장만이 이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에스겔도 사독 가문의 일원이자 예루살렘 제사장 중에서 요직에 있었다.40-48장에 나타난 제사제도는 신명기 법전 뿐 아니라 P문서의 그것과도 다르다.후자의 합법적 제사직이 아론 자손에 국한 된 것은 에스겔에 있어서 사독파와 레위파를 구별하는 것 같이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구별한다.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백성들에게 요구된 거룩함은 제사장직 가운데서 상징화 되고 있으며 제사장직이 계약의 중재자가 된다.41) 사독자손의 제사장에42) 집착하는 것,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향한 관심으로 에스겔은 그의 두 면모,제사장과 예언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43) 40-48장의 본문은 포로기의 삶의 자리는 그럴 수있는 처지가 비록 아닐지라도 에스겔의 성전제사를 관장할 제사장으로서의 면모와 야웨께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증언하고 있다.
41)J.P.Spencer,“Aaron,”AnchorBible dictionary,Vol.1(New York:DoubleDay,
1992),1-6.
그렇다면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의 제사장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사독계열 사제와 함께 아론 계열 사제,레위 제사장 등이 모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부류 속에 들어가고 있다.문제는 이들 제사장 등이 모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 그룹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문제는 이들 제사장 그룹들이 신앙과 신학이 서로 다르다는데 있다. 이들은 결코 하나의 색깔을 지니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사독계열 사제가 체제 유지적이라면,아론 계열 사제는 체제개혁적이다.구약성서 레위기와 민수기는 아론계열 사제를,신명기는 레위 제사장을 각각 제사장으로 인정한다.솔로몬의 성전을 관장하는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사독계열 제사장이다.왕대일,“회막,성전,회당 그리고 교제직 계승에 관한 전승과 사독계열 제사장들에 대한 전 이해를 통해 그들이 그렸던 새 성전에 관한 프로그램을 알아보고자 한다.
43)G.Fohrer,「구약성서개론(하)」,292-293.
1.사제직 계승
"누가 사제직을 수행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해 P문서는 레위지파 중 한 가문인 '아론과 그의 자손'이라고 말한다.에스겔은 '아론의 자손'을 '사독의 자손'으로 대체시킨 것 외에는 P문서의 관점과 같다.P문서나 에스겔 모두 레위인들에게 열등한 거룩함이 있음을 인정하였다.왜 에스겔은 레위 사람들을 열등한 제사장 계층으로 분류시켰을까? 에스겔은 44:40-41에서 레위인들이 외국인으로 교체됨을 이야기 한다.레위인들이 우상숭배의 못된 길로 빠진 죄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며,더 이상 제사장으로 수종을 드릴 수 없으며,부끄러움과 가증한 일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도 야웨는 그들을 성전의 종으로 삼을 것이라 중재적인 말을 던진다.이에 오직 제사장으로써 의 사독자손에 대한 언급은 44:15-16으로 이어진다.그들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레위인들처럼 타락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에스겔은 레위인들을 열등한 제사장 계층으로 분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D문서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모든 남자는 택한 곳에서 사제가 될 수 있었다.그러나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제단에 참석하지 못하는
레위인은 보통 평민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었다.44)J문서와 E문서에서도 족장들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치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사제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이는 사제와 관련된 성전이 아닌,도처에 산재해 있는 개별적인 제단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44)Menahem Haran,Temple and Temple-Service in AncientIsrael(Oxford,1978),
58-63.
사제직에 관한 한 J와 E는 D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레위 지파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당연시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자료들은 처음부터 사제직이 레위지파에게만 주어 졌다는 점에 일치한다.다만 레위 지파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기능했는가
에 대해 견해가 다른 것이다.사제계열의 학파 중 P의 경우는 아론의 자손에게만 한정되었다고 보며,에스겔의 경우에서는 사독의 자손에게만 한정 되었다고 보는 반면에,비 사제 계열에서는 레위지파 전체에게 주어졌다고 본다.다만 J와 E의 경우는 기존의 여러 성소에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반면,D는 오직 선택된 한 곳에서만 사제직이 수행될 수 있다고 보았다.그 밖에 사제가 아닌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여타 이스라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사제직에 관한 고전 이론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사제직의 시작은 왕조성립과 더불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실로의 엘리,눕의 아히멜렉으로 대표되는 왕조이전 초기의 사제직은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는 성소의 문지기로서 신상을 지키고,점치며 축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는 것이다.48)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사제직을 단지 점치고, 축하는 것뿐이었다고 볼 증거가 별로 없다.이스라엘의 사제직은 아주 고대적인 산물이며,실제로 사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49)일반적으로 사제 가문은 자신들의 선조를 모세에 소급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레위지파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50)따라서 어떻게 이른 시기부터 사제직의 특권이 레위 가문에 할당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45)Ibid.,63-65.
46)Ibid.,66-67.
레위 지파는레위지파가 사제직을 받은 것은 특히 J의 단편인 출 32:25-9의 '황금 송아지'사건과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데,그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한 자기 가족과 친척을 가차없이 죽일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신33:39).
47)Ibid.,70.
48)Ibid.,71-73.
49)Ibid.,73-76.
50)Ibid.,78-79.
야웨 종교의 최초의 전파자인 모세에게서 유래하며 이들은 이 신앙을 다른 지파에 전파하였다.따라서 모세 이후 이 지파는 사제직에 봉헌된 것으로 이미 간주 되었을 것이다.
사제직이 레위지파에만 해당된다는 원칙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첫째로 레위 지파 중 누가 실제로 사제직을 보유하는가?-아론의 자손인가, 아니면 달리 정해진 집단인가-하는 문제이고,둘째로 사제가 아닌 레위인은 제사 기능을 맡는 것이 불가능했고,기껏해야 사제에 종속된 신분일 뿐 이었는가,아니면 그들에게도 사제직이 열려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52)
P기자는 아론 자손에게 13개 성읍(유다/시므온 9개 + 베냐민 4개)을 할당하고 있으며,나머지 레위 지파에는 35개 성읍을 할당하고 있다.그런
데 아론 자손의 성읍은 유다,시므온,베냐민 지파의 영역에만 분포하고 있으며,아론 자손과 비사제 레위인이 공유하는 성읍은 하나도 없다.따라서 이 둘 사이의 경계선은 남북 지파간의 경계선에 해당하며,결국 남부 지파의 레위인은 무흠한 사제들로 인정된 반면에 북부지파의 레위인은 사제직의 권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53)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J,E,D가 말하는 아론 자손이란 남부 지파에 거주하는 레위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54)
사제가 아닌 레위인의 지위가 문제가 된 것은 북부 출신 레위인이 유다나 베냐민 지역의 성소에 왔을 경우이다.이런 점에서 볼 때,예루살렘에서 레위인의 문제가발생하게 된 것은 특히 북왕국 멸망 이후 히스기야 치세 때라고 믿을 만한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51)Ibid.,81-82.
52)Ibid.,84.
53)Ibid.,84-85.
아론 자손과 나머지 레위인 간의 긴장 관계는 P문서 안에서도 나타나 있다.바로 고라와 그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인데,고라는 고핫 자손으로서,이들은 P에 따르면 북부 왕국에 속한 에브라임,단,므낫세 반지파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54)Ibid.,87-88.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산당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산당의 사제들을 레위인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성전에서 수행하는 정식 사제들의 권리를 박탈한 것도 아니다.따라서 이 개혁은 사제와 레위인의 계급 형성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55)
예루살렘 멸망 이후 에스겔은 사제직을 사독 자손에게 한정시키고,사독 자손이 아닌 사제들은 레위인 반열로 강등 될 것을 말했는데,이것은 P 이후의 발전된 양상을 반영한다.따라서 '아론 자손'은 '사독 자손'이 발전․ 확장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56)따라서 하란은 포로후기에 레위인들이 소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레위인이 사제들보다 몇 배나 많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P자료가 포로기 후기 상황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는 통설에 동의하지 않는다.57)
그런데 에스겔이 레위인으로 강등시킨 비사독계 사제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므낫세가 도입한 우상 숭배에 고용된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제들 중 일부로서,성전 사제단의 주류가 아닌 유다 지방 사제들이거나 북부 출신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사독 자손은 성전 사제단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므낫세 치세 동안에도 정통 제사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것 같다.58)
에스라 시대에는 사제 문서는 토리의 중요 부분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레위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 시기에 레위인의 수효는 매우적어서,레위인을 거쳐서 받아야 될 십일조를 직접 수령하였다.이렇듯 P문서와 포로 후기 상황 간에는 실제적인 관련성이 결여되어 있다.59)
55)Ibid.,99-101.
56)Ibid.,102.
57)Ibid.,92-97.
58)Ibid.,103-107.
59)Ibid.,108-109.
레위인의 숫자가 이렇게 줄어들게 된 것은 포로 후시에는 사제직을 사독의 자손들에게만 제한하는 좁은 원칙이 사라지고,아론 자손들 전체가 사제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따라서 레위인으로 간주될 사람은 북왕국 출신의 사제 가문들 뿐이었다.
2.사독계열 제사장
40-48장은 레위인과 제사장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본문이다.40-48장은 새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백성 가운데 거룩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주며 미래의 신정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이 새 성전의 건설을 위해 에스겔은 특별히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의 성결을 요구한다.그 당시까지 성전에는 전쟁 포로 출신의 이방인들을 고용하여 레위인을 도와 성전의 천한 일을 시키던 관행이 있어 왔다(민수기 31:28-30,40-41;여호수아 9:23,27).에스겔은 이들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을 성전 봉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44:6-9).
그의 엄격한 성결에 관한 기준은 레위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그들의 우상을 쫓아 나(하나님)로부터 떠나갈 때 나로부터 멀리 떠나간"(44:9-14)죄를 범하였다.에스겔은 이런 죄를 범한 레위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제단에서 제사장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제사장 직에서 박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44:12-130.
그 대신 그들이 맡게 될 일은 바로 이방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천한 일- 곧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944:11).
성전에서 레위인의 지위 하락은 상대적으로 사독계 제사장들의 세력 성장을 의미한다.더구나 에스겔은 사독계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범죄할 때에 충성되게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묘사하며 앞으로의 제단 봉사는 예루살렘의 사독계 제사장들에게 제한한다고 선포하였다.60)
이렇게 에스겔서로 인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신분과 직분은 더욱 확연한 차이가 나게 된다.예컨대 40:46"북쪽을 향한 저 방은 제단 일을 맡은 제사장들의 방이다.60)R.Abba,“PriestandLevitesinDeuteronomy,”VT,Vol.27.(1977).3.
그들은 레위 자손 가운데서도 주께 가까이 나아가 섬기는 사독의 자손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43:19과 44:15에도 사독이 레위 자손이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이것은 사독계가 신명기로부터 형성된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 자손이어야 한다"는 여론에 굴복하여 내린 조치라고 여겨진다.61) 자신들을 레위 자손으로 만듦으로써 사독계는 여전히 제사장직 독점 체제를 유지하였고 레위인들은 더 하위 그룹으로 전락하였다.에스겔서에서 사독 제사장의 위치가 더욱 확고하게 다져진 것이다.62)
에스겔서의 기록대로 과연 포로기 이후의 제사장직은 사독계가 독점하였고 왕을 대신하여 절대 권력을 누림을 볼 수 있다.그러나 에스겔서가
말하는 레위인의 범죄 행각이 역사적 사실인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기록되었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분열 왕국 시대부터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유다에서 최고의 왕립 제사장직을 차지했던 자는 사독계 제사장들이다.그런데 그 시대의 역
사는 우상숭배로 인한 뚜렷한 야웨 절대주의 신앙의 쇠퇴를 보여주며 특히 부패는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적이 빈번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이러한 부패에 맞섰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왕의 우상 숭배를 방조하거나 혹은 이를 개혁하려는 왕의 의지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물론 왕립 제사장으로서의 그들의 종속된 위치가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그들은 성전 관리나 예배에 마저 소홀하였고(왕하 12),유다 말기에는 예레미야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거짓 예언 등의 죄악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렘 2:8;5:31;6:13).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레위인들의 배교와 이로 인한 실각이나 사독계 제사장들의 변함없는 충성에 관한 기술에 대한 진실성에 적잖은 타격이
된다.그리고 에스겔서가 신명기 바로 뒤에 나왔으며 제의와 제사장에 관한 진술 내용이 상반된다는 점에서 에스겔서가 신명기서를 반박할 목적으
61)A.Cody,A history ofOld TestamentPresthood (Rome:E.Pontoficio Instituto
Biblico,1969),136.
62)왕대일,“레위기의 구조,레위기의 신학,”「신학과 세계」29호 (1994년 가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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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일부 쓰여졌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즉 '오직 레위인만이 사제직을 담당할 권리가 있다'는 신명기의 주장을 '사독계 제사장은 레위 자손이며 사독계만이 충성된 길을 걸어 왔다.따라서 사독 자손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에스겔서는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뜨겁게 표면화된 레위계(아비아달계)제사장과 사독계 제사장의 세력 싸움은 곧이어 맞게된 바벨론의 유다 멸망에 의해서 일단 휴지 상
태를 맞는다.또한 바벨론 통치하에서 겪게 되는 정치적,종교적 변화는 이 들의 세력 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사독계열 제사장들의 성전구조
이스라엘 역사학자들은 통상 주전 587년부터 538년까지에 이르는 반세기를 포로기라고 부르는데,이것은 유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추방(주전
587년)당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주전 538년)하게 되는 때까지를 근거한다.추방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귀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각각 이루어졌다.그렇지만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유다 백성들에게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를 살게 하는 서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그 식민지 살이는 페르시아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거주해 살던 일단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그 땅은 유대인의 땅이 아닌,여전히 페르시아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정신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물론 폐허로 남은 예루살렘 성전의 흔
적 위에서 팔레스틴 땅의 난민들이 듣는 소리는 실의와 좌절뿐이었다(애1:1;5:14-15).정든 땅에서 추방당하거나 피난살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유다 난민들도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었다(시 137편).시온의 상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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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백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하지만 이들의 좌절을 긍정적으로 읽을 때,그 속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행해지고 있었다.두 가지 질문이 그런 반성의 분위기를 야기한다.첫째,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 "마르
둑"(Marduk)에게 지고 마신 것인가?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야 말았는가?
둘째,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을 스스로 버리셨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땅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는가? 포로기에
활약했던 에스겔이 정리해 놓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들이 바로 에스겔서에 편집되어 있다.63)
에스겔서가 전하는 "하나님 이야기 "속에 잃어버린 땅의 회복과 민족의 부활이 중심 소재를 읽을 수 있다.이 시기의 디아스포라들은 성전 없
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다.안식일 준수,할례,정결예식 등의 본격적인 시행이 그런 노력의 산물들이다.회당의 성립과 발전도 성전(희생제사)없는 경건의 일종으로 태동한다.64)
에스겔은 주전 597년,예루살렘 주민의 제 1차 추방 때,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무리 중에 끼였던 인물이었다.65)예루살렘 최후의 날이 실현되
기 이전,즉 주전 587년 이전까지 그의 몸과 마음에서 터져 나온 예언은 유다의 멸망을 선고하는 일에 몰두되어 있었다(겔 1-32장).그러나 일단
나라가 없어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나자,에스겔은 철저히 쓰러진 민족의 재생을 선포하는 희망의 사신되기에 여념이 없었다(33-48장).에스겔의 시 대가 예레미야와 약간 겹치기는 하나 그는 대체로 제 2이사야와 함께 포로기의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진다.
에스겔의 예언 중에 독특한 것은 역사에서 경험할 사건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나님이 그 성전
63)왕대일,「구약성서이해」(서울:성서연구사,1993),170-171.
64)Ibid.,171.
65)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8),1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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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버리시고 떠나셨기 때문으로 본다.마찬가지로 에스겔의 환상 중에 그리고 있는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도 성전으로 귀환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전자가 하나님의 피난을 상징하고 있다면,후자는 하나님의 귀향을 상징하고 있다.66)
내가 보니,그룹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 청옥과 같은 것이 있는데,그 모양은 보좌의 형상과 비슷하였다…그 때에 주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고,성전에는 구름이 가득차고,안뜰은 주의 영광에서 나오는 광채로 가득찼다…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그룹들 위로 가서 머물렀다.그룹들이 내가 보는 데서 날개를 펴고 땅에서 떠올라 가는데,그들이 떠날 때에,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그룹들은 주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무르고,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그들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에 본 것으로,이스라엘 하나님을 떠받들고 있던 생물들이다.나는 그들이 그룹 임을 알 수 있었다…그들은 각각 곧게 나아갔다(겔 10:1,4,18-20,22)
뒤에 그가 나를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다.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땅은 그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다…그러자 주께서 영광에 싸여서,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다.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안뜰로 데리고 갔는데,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겔 43:1,4-5) 스겔의 하나님 이야기(하나님의 피난,하나님의 귀향)는 역사의 경험을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스라엘의 멸망이 야웨의 피하심(8-11장)으로 인해 왔다면 이스라엘의 재건,구원은 야웨의 임재,도래(43이하)로 시작될 것이다.그러므로 야웨의 임재,도래를 위하여 로운 성전은 필수적이다.그러나 이전의 성전으로는 안된다.부정했던 성전은 새롭게 재건되어야만 했다.67)이것이 포로기를 겪으면서 남의 땅에서 대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에스
66)왕대일,「구약성서이해」,171-172.
67)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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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의 처방이었다.이로써 에스겔은 하나님의 계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해답은 공동체적이다.하나님의 귀향의 가능성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나 이 때의 개인은 신정정체를 꿈꾸는 공동체를 형성한다.예언자 에스겔이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는 목적은 포로민들을 한사람,한 사람씩 새로운 공동체의 신뢰할 만한 구성원들로 변화시키고 훈련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집단적인 정체성과 책임을 재건 하자는 것이다.68) 성전 환상이 밝히고 있는 재건 프로그램(겔 40-48장)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참가하는 제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상,예언자 자신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는 예언자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민족 그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본문의 증언(40-48)에 귀를 기울이는 이상 그 문제의 해답은 개개인이 변화되어 이룬 공동체로 확장시켜서 찾아야만 한다.신명기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청사진이라면 에스겔의 성전 본문은 포로후기 황폐해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성전을 포기하기 보다는 새롭게 재해석한
사독계 제사장 자손들의 청사진이다.69)
68)노만 K.갓윌드,「히브리성서 2-사회․ 문화적 연구」,김 상기 역 (서울:한국신학
연구소,1994),163.
Ⅳ.예언자 에스겔의 성전신학
1.에스겔 성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에스겔 성전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표이다.이것을 보다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스겔 성전이 제 1성전 즉 솔로몬 성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된다.
1)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의 근본적인 건축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의 상징인 법궤의 거처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에서 성전을 지은 것은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왕상 8:21)'한 것이라고 하였다. 건축할 전의 전체길이는 60규빗,너비가 20규빗,높이가 30규빗이었다(왕상6:2). 여기서 규빗(암마, 70( ה )은 미터법으로 환산할 때 약 50센티미터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성전은 크게 낭실(울람, וּא ם )과 성소(헤칼, י ל )지성소(드빌,רי )로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낭실의 크기는 길이 20규빗,너비 104규빗(왕상6:3)이고,성소는 길이가 40규빗이며 너비가 20규빗인 직사각형 구조이며, 지성소는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20규빗인 정사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특히 이곳은 백향목 널판으로 마루에서 천정까지 막아 성소와70)국영성경에서 규빗으로 번역된 길이 단위인 히브리어 '암마'는 약 45-52센티미터 정도로서, 성인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다.규빗(cubit)은 라틴어로 cubitum,즉 '팔꿈치'라는 말에서 나온 옛 영어이다. 김중은,「거룩한 길 다니리」(서울:한국성서학연구소,2001),159.-47- 첫째,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놋으로 부어만든 반구형의 '바다( ם ,왕상 7:23)'라고 불리우는 제사장들의 정결을 위한용기가 있었다. 이것의 크기는 지름이 10규빗,둘레가 30규빗,높이가 5규빗이었다. 이 바다를 열두 소가 받쳤는데 사방으로 세 마리씩 서 있었다(왕상 7:25). 열두 마리의 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한다.학자들은 이 바다가 여호와께서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시던 원시바다 혹은 대양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둘째, 성전 앞뜰의 북편에 다섯 개,남편에 다섯 개씩서 있는 희생제물을 씻을 수 있는 열 개의 물두멍( ריּוֹ )이다. 이것들은 모두 번제물로 쓰이는 희생 제물들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놋단( תח )이 있는데 길이와 너비가 각각 20규빗이고 높이가 10규빗이다(대하4:1). 넷째, 솔로몬 성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성전 앞의 두 기둥 야긴( וי)과 보아스( ז )가 있다(왕상 7:21). 이 기둥들의 높이에 대하여 열왕기는 18규빗(왕상 7:15)으로 역대기는 35규빗으로(대하 3:15)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열왕기의 기록은 기둥만의 높이를, 역대기는 기둥머리를 포함한 전체를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성소 내부에는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야웨의 언약궤'( ןוֹ ֹתי- ה ה )가 있었다. 언약궤는 그룹들 아래 지성소의 안쪽에 놓여져 있었으며 그룹들은 감람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입혀졌고(왕상 6:23ff),그 높이는 10규빗이고,날개들은 10규빗 길이로 펼쳐졌는데 지성소 길이의 반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결과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기록은 주로 성전 내부를 중심으로 묘하사고 있음을 알수 있다.
a.성전의 구조와 구성요소
솔로몬 성전의 구조를 말해주는 성경본문은 열왕기상 5-8장과 역대기하 2-7장이다.
성전 뜰에 있는 기구로는
성소내부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금단과 진설병의 금상과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 씩 두 쌍의 정금 등대(왕상 7:48-49)가 있었다.
각종 기물들을 금으로 만들었다는 화려함이 특징으로 부각된다.
b.솔로몬 성전의 설계
성경의 기록들은 솔로몬 성전이 베니게 출신의 건축가와 장인들에의해 건축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왕상 7:14).
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의 구조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니게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수리아지역의 성전모형을 알아보아야 한다.
기본 설계에서는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낭실,성소 및 안방 또는 뒷방이 필수적인 구성요소들이다. 이와 같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신비하게 되어 있는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배열의 예는, 세부적인 면에서는 많은 수정과 장식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마 그리고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고학적 조사의 많은 부분은 긴 방 또는 긴 집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조의 중간부분을 가장 크게 하여 옆으로 3등분하면 솔로몬 성전의 구조와 유사한 설계도가 나온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은 긴 집에 해당하여 낭실은 넓은 방,성소는 긴 방,그리고 지성소는 정방형의 방에 해당한다.
솔로몬 시대 직후인 9세기(또는 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신전 또는 부속 예배당이 1936년에 알렙포와 안디옥 사이의 북시리아에 위치해 있는 텔 타이네트(TellTainet)에서 발견되었다.
이 신전의 규모는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작지만 세부적인 설계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에있어서도 솔로몬 성전과 아주 유사하다. 다만 텔 타이네트의 지성소는예루살렘 성전과는 달리 정방형이 아니었다.솔로몬 성전과 마찬가지로 텔타이네트의 부속 예배당도 성전과 궁정이 인접해 있는 종합 건물군의 일부였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 성전의 기본 설계는 먼 북방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주전 2천 년대에 여러 민족의 태동과 혼합이 이루어짐에 따라 히타이트,앗시리아,시리아,이집트 및 페니키아의 건축양식 요소들을 흡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의 모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4)71)"성전,예루살렘,"「기독교대백과사전」9권,(1983).
72) Encyclopaedia Judiaca(UR-Z), s.v. "Temple," Jerusalem, 1972, 948. Alfred J.
Hoerth,Archaeology &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Mich:BakerBooks,1998),
281.
2)에스겔 성전
이 성전의 구조는 건물의 높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주로 대칭적으로 나뉘어진 성전건물에 대한 측량 지수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성전의 구조로서 묘사되는데 이것이 에스겔 성전 묘사의 특징이다.
상상을 요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묘사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거한다는 것을표현하는 한 가지 점에 모든 노력이 집중되어 있다.
우선 이 성전의 위치는 이스라엘 땅 매우 높은 산 위이며 방향은 산의 남쪽이다(겔 40:2).
성전구역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40:5), 이는 거룩한것과 속된 것을 구불하기 위한 것이다(42:20). 담의 높이는 6규빗이며 전체크기는 500×500규빗이다(42:15-20). 바깥담으로 된 구역 안에 3개의 문이있다.에스겔이 처음 찾아간 곳은 동문이고 뒤이어 방문한 곳은 북문과 남문인데 크기는 세 개가 동일하다.
이 문들은 모두 성전 밖에서 바깥뜰로들어가는 문들이다.이어서 에스겔은 안뜰로 들어가는 남문,동문,북문으로 인도함을 받았다.이들 여섯 개의 문들은 군사적인 기능이라기보다는부정한 자를 거룩한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모든 문은 점차 높은 지점으로 이끄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깥문은 일곱 개의 계단을통해 올라가야했고(40:6,22), 안뜰로 들어가는 문은 여덟 개의 계단을 통해야 했다(40:34,37). 성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했다(40:49).특징적인 것은 성전삼면의 지대가 6척 높이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겔41:8).이와 같이 성전건물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73)"성전,예루살렘,"「기독교대백과사전」9권,(1983).
74)EncyclopaediaJudiaca(UR-Z),s.v."Temple,"Jerusalem,1972,944.
75)WalterEichrodt,Ezekiel,「에제키엘」,642.
76)김성익,"제 3성전의 구조와 신학에 관한 연구,"「신학리뷰」4(1996):57.
에스겔이 인도되는 곳은 주로 문이 많이 언급되는데 문 하나의 전체규모는 50×25규빗(41:8)이다. 문 중앙을 통과하는 통로 양편에는 각기 3개씩의 문지기 방이 있다.문 자체가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는데 그 크기가 성전내부 크기(20×40)보다 크며, 길이는 안뜰의 크기(100규빗)의 반이나 된다.또한 각 문마다 문지기의 방이 있다.그것들의 기능은 속된 것으로부터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다. 성전의 동,남,북쪽과는 달리 성전 서편에 문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태양을 경배하는 것(8:16-17)과 같은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성전의 바깥뜰에 대한 묘사이다.
바깥뜰 삼면에 박석으로 깔린땅이 있었다(40:17). 그곳에는 30개의 방이 있는데 예배자들의 모임이나 식사하는 장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바깥뜰의 네 구석에는 부엌설비(40×30)가 있었다(46:21-24). 안쪽 북,남문 옆에 번제물을 씻는 방과 희생물을 잡는 방과 상이 있다(40:30-43).안쪽 북,남문 가까운 곳에 제사장들을 위한 방 두 개가 있다(40:44-46).남향한 방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이 쓰고,북향한 방은 제단을 수직하는 사독자손으로 구성된 제사장을 위한 것이다. 안뜰은 크기가 100×100규빗으로 그 한 가운데에 제단이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뜰에 있어야 하는 대야 즉 물두멍이 없다는 것이다.
성소건물은 현과과 성소,지성소로 나뉘어진다.성소의 내부규모는40×20규빗이며 지성소는 20×20규빗이다(41:2-4).전 삼면을 의지한 골방이 성소의 벽사방으로써 3층으로 30개가 있다.전 전체의 크기는 100×100규빗(41:13-15)이다. 전 뒤편 서쪽 뜰에 있는 한 건물이 있는데 70×90규빗의 크기이다(겔 41:12).이 건물 양쪽 편에 두 개의 건물이 더 있는 것으로보인다(42:1-12).
그리고 나무제단이 나오는데 '여호와 앞의 상'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41:22). 77)Ibid.,58.
3)공통점과 차이점
지금까지 우리는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 각각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각기 구조가 이와 같다면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의 주요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
에스겔 성전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두 성전 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a.차이점
에스겔 성전은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과는 다른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우선 에스겔 성전에서는 휘장(출 26:33)78)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다른 제사장들도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게되었다.79)
또한 에스겔 성전에서는 제단에 대한 설명(43:13-17)이 성전의다른 어떤 것보다 자세히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매우 크게 묘사된다.번제물을 드리기 위한 제단은 안뜰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것은 성막이나 성전의 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그것이 없이는 성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속죄가 이루어지는 제단에서 만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솔로몬 성전 앞에는 번제단이 있었다는 것이 당연시 됨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서에는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에 대한 언급은 역대기하(4:1)와 에스겔서에만나온다. 에스겔 성전에서는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40:47;43:13-17).
차이점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78)김금희,"구약의 속죄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신학석사학위 논문,장로회신학대학교,
2002),32.
79)GeorgeC.M.Douglas,"EzekielTemple,"TheExpositoryTimes(1987/8):366.
첫째,대제사장이 나타나지 않는다.지성소가 제사장 모두에게 개방됨으로써 대제사장에게만 부여되었던 특별한 의무와 특권이 모든 제사장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졌다.80) 또한 화려한 제사장 의복과 우림과 둠밈에대한 언급도 없다.
대제사장이 없다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이전보다 더욱 더 완벽한 방법에서 야웨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소명을 받는다는 것을말해준다.81)
둘째,시은좌( ת ,mercy-seat)82)가 있는 언약궤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잃어버린 언약궤 대신 모든 나라들이 모여드는 곳 즉 여호와의 보좌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이 바로 언약궤를 대신한다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버려져 있는 동안 포로된 백성들이 있는 그 곳에서 여호와께서 잠시 성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11:16-20).따라서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처럼 언약궤 안에 있는 돌 판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또
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은좌로부터의 여호와의 말씀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과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셋째,대제사장의 특별의무와 특권이 없어졌고 공식적으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서 시은좌가 없으므로 이제는더 이상 속죄일이 존재하지 않는다.속죄일은 완성되었으며 지성소는 개방되었다.이처럼 에스겔의 환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의 전진을 보여준다. 속죄일의 완성은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는데 예를 들면스가랴 3장 9절이 그러하다.(참조;겔 45:23)
넷째,대제사장과 속죄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희년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이 영광스럽고 독특한 모든 것들의 해방을 알리는 신호는 속죄일에(레25:9)나팔을 크게 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지성소로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고 있는 현재,이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초자연적인 생명이 선물로 주어지고,완전히 그들 사이가 재연합되는 것을 볼 때 그 것은 이사야 61장 1-2절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85)
80)Ibid.,420.
81)C.F.KeilandF.Delitzsch,「에스겔」,송종섭 역 (서울:아가페출판사,1995),753.
82)김중은,「거룩한 길 다니리」,160.
83)GeorgeC.M.Douglas,"EzekielTemple,"420.
84)Ibid.,421.
성소가 지성소와 같은 동등성과 정체성을 갖는 것과 아울러 에스겔 성전과 그것의 봉사 직무에 있어서 몇 가지 다른 독특한 점들이 있다.
첫째,
번제단 옆에 있었던 그리고 모세 성막의 입구에 놓여 있었던 물두멍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죽지 않도록 그들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기 위한 기물이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 물두멍이 열 개의 물두멍과 놋바다라는 좀 더 정교한 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빠진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바이다.그래서에스겔 성전에서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띈다.그러나 완전한 속죄와 정화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데 왜 이것이 더 이상 있어야 하는가?
새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두멍은 계속 유지될 필요가 없다.86)
둘째, 관유( ן ה )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출 40:9-11;레 8:10-11).
이 관유는 원래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희생물에 기름을 바르는 일에 사용되던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에는 기름부음을받는 제사장들이나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다.87)
셋째, 모세 성막에는 7개,솔로몬 성전에서는 10개였던 정금등대( תוֹרוֹנ )에 대하여 에스겔 성전에서는 언급이 없다.
왜 에스겔 성전에서는 촛대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그 이유는 지성소를 가득 채우고 그곳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넷째, 특이한 점은 향단과 진설병상이 에스겔 성전에서는 하나로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41:22).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는 성소에 세 가지의 기물들이 있었다.그것들은 눈에 띄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락시킬 수 없는데 바로 등대,진설병상,향단이다.
그런데 진설병상에 대한 설명과 그 부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에스겔의 '여호와 앞의 상'이 진설명상과 향단의 두 가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남는다.에스겔이 비록 여기에 대하여 언급이 없으나 그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이것들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찼기 때문에 향과 향료 등이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의 환상은 모든 가시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기물들에 대하여 새로운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밖에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솔로몬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기둥 명이 나타나지만 에스겔 성전에는 기둥에 대한 명칭이 없다.솔로몬 성전은 직사각형 구조를 갖고 있으나 에스겔 성전은 정사각형으로서 뚜렷한 대칭 구조를 보이고 있다.이것은 성전구조의 중앙 집중적인 의미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성전의 공평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성전에 대한 묘사는 정적이다.그러나 에스겔 성전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는 동적인 측면이 부각되며 각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특히 강조하는것을 볼 수 있다.동시에 건물들에 대한 측량지수에 대해서는 마치 실제건물을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겔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과 경계표시와 측량이다.
또한 성전 건물 중 특이한 것은 성전 서편 뒤에 건물이 서 있다는 것이다(41:12).
그러나 그 건물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그 용도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건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사단의 원류인 그룹(케루빔)의 형상이 있다.
이 건물에 대하여는 차후로 살펴보겠다.
에스겔 성전이 이전의 솔로몬 성전과 확연히 다른 점은 우선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성과 속이 구별된다는 점이다.그리고 외형의 규모도 더 크고 지대도 더 높다.윈워드(Winward)는 새 성전이 옛 성전에 비해 궁궐과 떨어져 있고 지대가 높고 짜임새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숭고성,완전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에스겔 성전은 문과 담이 나옴으로써 성전의 안과 밖의 구역을 명확히 구별하고 있지만 솔로몬 성전은 외곽경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것은 에스겔 성전의 거룩성과 분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또한 솔로몬 성전 내부의 많은 부분이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나 에스겔 성전에 대한 묘사에서는 '금'이라는 낱말이 나오지 않는다.이것은 성전이 회막처럼 검소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화려하기가 극치를 이루는데,그 동안 광야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지내왔던 회막(성막)과는 완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b.공통점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과의 전형적인 공통점은 성전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두 성전 모두 기둥을 갖고 있는 점이 유사하다. 에스겔성전이 동향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도 해뜨는 방향을 향하고있다.
에스겔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크기는 열왕기서와 정확히 일치한다.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에는 곁방이 모두 같이 묘사된다. 성전내부와 장식 및 비품들은 열왕기에 나오는 목록들과 같다(40-41장).
성전의 낭실,성소,지성소 등의 기본구조는 같다.
이외에 벽들을 치장한 장식 소재들은 솔로몬 성전에서와 같다(왕6:29-30).
나무로 되어있건 혹은 놋으로 되어 있건 제단 또는 상이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그리고 솔로몬 왕조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해왔던 사도계급이 에스겔 성전에서도 계속 그 직위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막에 임재하셨던 야웨의 영광(출40:34-35)이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성전에서도 임재하셨던 점이 일치한다.
이것은 성소의 중심에는 야웨의 영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8),156-157에서 재인용.
영광이 임재하셔야만 그 성소의 정체성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것은 에스겔 성전이 전혀 새로운 형태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갖고 있었던 사건들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더구나 성전의 추이는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대하3:1).
이것은 출애굽 당시 광야시대의 성막 전승과 가나안 정착 후 실로 전승과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제 1성전 전승과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성전의 핵심부분이라 할 수 있는 지성소,성소,낭실 구조는 두 성전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본질적인 성전의 정체성의 연속성도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막,제1성전,에스겔 성전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라는 신학에 있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2.불연속적 측면에 대한 신학적 의미 분석
에스겔 환상 성전은 인간의 손길이 관여한 바가 없는 야웨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편 과거 솔로몬 성전의 구조들은 이 새로운 시대에 적용될 수 없었다.90) 에스겔 성전은 암묵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비판하는 측면이 있다.
그 성전은 약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어긋난다. 하나님의 회막은 얼마나 검소한가! 본래 이동식 성막이던 것이 정착식 성전으로 변하면서 성소 본래의 모습이 변질된다.왜 성전의 부속건물에 대하여 길게 서술하는 것일까? 솔로몬 성전 당시 거룩해야 할 성전과 그 부속 건물이 세속에 물듦으로 인해 그 거룩성이 훼손되었다.그 성전은 바깥뜰이 직접 그지역의 속된 땅과 직접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따라서 백성의 죄로 인해 생긴 그 땅의 오염이 직접 뜰의 거룩한 곳에 침투할 수 있었다.
90)WalterEichrodt,Ezekiel,658.
그러나 새 성전은 바깥문과 안뜰 문이라는 이중 통과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막을 조치가 마련되었다.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 건물,그 부속 건물들,문과 뜰에 대한 매우 상세한 설명은 새 성전이 모든 면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에 부합되고 또한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배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과의 불연속적 측면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세속과의 분리를 통한 거룩성의 확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제 2성전과의 관계
에스겔 성전과 제 2성전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에스겔 예언활동이 끝난지 약 50년 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제 2성전을 건축한다. 이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들었을까? 그렇다면 학개가 에스겔의 프로그램을 취하고 선포함으로써 당대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91)그것은 스가랴에 의해 선포되어지고 있는 예언자 에스겔의 본래적인 계획이다.헨슨(P.Hanson)은 학개와 스가랴를 에스겔 전승
의 담지자로 본다.그가 보기에 회복된 공동체의 구조는 에스겔에 의하여 상세하게 그려진 것들이다.92) 에스겔의 프로그램에 대한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활동의 의존성은 새 성전에 대한 건축계획에서도 자명하다.93)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에스겔의 계획을 스룹바벨 성전에 관한 연구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에스겔의 성전계획과 포로기 이후 성전 재건계획의 일치는 너무 포괄적이다.즉 새 성전은 에스겔 43장 11절에 나타난 계획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이다.
91)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이무용,김지은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228-229.
92)Ibid.,229.
93)김지은,"학개의 성전 재건선포에 대한 역사적 연구,"「구약논단」(2000):85."94)
왕대일도 학개,스가랴를 에스겔 전승의 담지자로 본다.95) 학개의 신탁은 스가랴와 함께 성전제사의 회복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있다.이 점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에스겔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96) 에스겔은 이 환상의 말씀을 포로기 공동체에게 주었다(겔 43:10-12).에스겔은 포로기 이전의 성전예배와 연속성을 가지며 특별한 제도적 상술과 구체적인 역사적 수행자들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바라 보는 회복 프로그램의 윤곽을 그려주는 환상을 보았다.97)본 논문에서는스룹바벨 성전에서 에스겔의 프로그램이 일부 성취되었다고 본다.
성전의 전체적인 규모는 일치하지 않지만 그 정신은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스겔 성전은 포로기를 정점으로 포로기 이전 성전 신학과 포로기 이후 성전 신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또한 과거의 성전과 결별하는 불연속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따라서 선지자 학개,스가랴를 통해 에스겔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이어진 것이다.98)
성전의 재건축 준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성전 환상이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99)학개,스가랴 선지자가 성전에 대한 전승적 근거 없이 성전 재건의 말씀을 선포하기는 어렵다.바로 여기에서 에스겔 성전 환상이 큰 역할을 하였다. 제 2성전기는 포로후기시대 유대 사회의 암울함과 초조함을 그 배경으로 한다.이 시기는 무너진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성전을 재검함으로써 흐트러진 유대사회의 분위기를 변혁시켜 나가려던 학개와 스가랴의 회복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되었던 성전 재건 계획(40-48장)을 역사 속에 구체화시킨 노력이었다.그렇기에 학개와 스가랴의 메시지는 사독계열 제사장이 주도하는 성직계급사회를 표방 하였다.100)
94) 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258.
95)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서울:감신대 제 9회 성서학연구소 심포지
움/제3회 고고학회 연례학술대회):4.
96)왕대일,「구약성서이해」(서울:성서연구사,1993),177-178.
97)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236.
98)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283.
99)WalterEichrodt,Ezekiel,643.
에스겔 성전은 제 2성전 신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작음의 포로공동체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동체의 정체성이다.그들은 무엇으로 그 것을 입증할 것인가? 다윗 왕조의 정통적 왕위 계승을 그 문제가 해결될수 있는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성전'에서 발견하였다.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 그들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야웨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었던 '성막'을 기억하였다.
하나님의 성막이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그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는 야웨의 백성'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전승 속에서 포로 공동체는 자신들이 귀환할 경우 제일 먼저 할 일이 성전건축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101)그들은 포로로 있을 동안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에스겔의 성전환상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에스겔의 성전 예언은 포로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를 성전 재건으로 해결하려는 선지자 학개,스가랴로 이어지면서 제 2성전 건축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4.신약과의 관련성
주전 587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신학적으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제 2성전 마저도 제 1성전 못지않게 타락했는가? 왜 예수는 성전이 허물어지리라는 예언을 하는가(눅19:41-44)? 마치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리라는 예언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에스겔과 예수는 50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예루살렘 성전
에 대하여 엄청난 예언을 선포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히 두 사건의 신학적 연관성에 관심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00)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4.
101)김지은,"바벨론 유다 포로민들의 삶,"「구약논단」7집 (1999.10):122-123.
성전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비판은 예수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예루살렘 성전체제는 소수 집권층인 제사장 계층이 주도하는 성전 중심의 경제 체제이기도 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희생제물과 성전 주변에 형성된 은행,숙박,건물 건축자,제물 판매업자,환전상인 등 모두 그들의 경제권과 생산력을 성전 체제에 걸고 있었다.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 당시 예루살렘 인구의 상당수가 성전에 생계를 걸고 있었고 그곳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102)로마제국 또한 성전을 책임지던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을 비
호해주는 댓가로 팔레스틴의 노동력과 생산력을 착취하였다.복음서의 예수가 직면했던 최대의 적은 바로 갈릴리의 바리새인과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었다. 마치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렘 7:1-11)에서처럼,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도둑들이 꿰차고 앉아서 온갖 악을 저지르는 온상으로 보았다. 이것을 에스겔의 성전과 비교해보면 성전의 타락상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예수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0)에서 온갖 악행이 저질러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더렵혀지는 성전에서는 야웨 하나님께서 도저히 계실 수 없었기에 에스겔은 성전 심판 환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이것은 주후 70년의 성전 파괴와 주전 587년의 성전 파괴는 서로 신학적인 상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짐을 인하여 모든 사람이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사건을 구약의 제사장적 법에 근거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신약에서 에스겔서가 직접,간접적으로 인용된 경우는 총 65번인데 그 중에서 48번이 요한 계시록에서 인용되었다.103)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에스겔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102)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7.
103)W.S.Lasor,D.A.Hubbard,andF.W.Bush,「구약개관」,박철현 역 (고양:크
리스챤다이제스트,2003),705-706.
에스겔의 성전구도는 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구도(계 21:1-22:5)에 그 영향을 미치며 에스겔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새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이(겔47:3-12)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생명의 강이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높은 산 위에 데려가 성읍 형상을 보여준 것(겔 40:20)처럼 요한 계시록에서도 성령이 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준다(계 21:10). 이 때 요한은 성안에서 성전을 보려하였으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계 21:22)을 목격한다.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사라짐을 보여준다.이처럼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줌으로써 에스겔이 마치 성전 환상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종말론적인 성전 환상을 매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게 보여주고 있다.
5.에스겔의 성전 신학
1)거룩
에스겔 성전은 '거룩'의 신학을 담고 있다.토에바(겔 16:2;20:4)는 거룩한 것을 침범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의 주위를 재난으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다름 없다.104)에스겔은 거룩하신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더러워지고 있음을 고발한다(겔 8-11장). 인간의 악행은 성소를 더럽히는 범죄와 관련
될 경우 가장 큰 징벌을 받게 된다.왜냐하면 그것은 야웨 고유의 거룩하고 신비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5) 에스겔서가 보여주는 것은 제사장적 환상 즉 성전의 역할에 대한 해석이다.
104)KlausKoch,「예언자들」,강성열 역 (고양: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1),164.
105)Ibid.,146.
이는 성전자체가 희생 제물이 되어 창조물을 정화하고 더 나아가 재구성하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조와 관계되는 것이다.106) 성전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기존의 예루살렘성전이 더렵혀졌다는 것이다.
제사장의 관점에서 이러한 부정은 정화되어야만 한다.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의 부정함을 제거하고 이전의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 성전 제의는 창조물의 성결과 안정을 유지,회복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이 부정한 장소가 되어버렸다면 성전과 예루살렘 자체가 상징적으로 제물이 되어 정화와 회복을 가져와야 했던 것이다.107)벵겔(Bengel)은 '드러난 거룩'으로서의 영광에 대해 말했는데, 에스겔 40-48장에서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는 광경은 거룩이 베일을 벗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에스겔은 영광이 거룩한 산으로 돌아올 때 종교적 공동체에게 필요한 제의적, 공동체 요구사항들을 말하고 있다(겔 43:1-12).108)
2)소망
에스겔 성전은 미래를 보게 한다.
이 성전은 에스겔 예언 선포 당시 이루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듣는 청중에게는 미래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성전환상을 통해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갈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은 현재의 포로기를 야웨 신앙으로 극복할 것을 구체적인 성전 환상을 통해 선언하신다. 이것은 야웨께서 포로민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인 성막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에스겔 예언자의 성전신학을 소망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환상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목표를 제시한다.포로시대의 사람들에게 에스겔은 커다란 희망이 메시지를 전해주었다.에스겔 성전이 약속의 땅 팔레스틴에 다시 지어지기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재의 포로기를 인내하며 기다린다.
106)MarvinSweeney,“사독계열 제사장,포로기의 환상 예언자 에스겔,”왕대일역,「구
약성서,읽기와 해석하기」(서울:감신대성서학 연구소,2001),38.
107)Ibid.,47-48.
108)JohnG.Gammie,holinessonIsrael,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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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복
에스겔 성전은 성전 중심의 구도를 보여주는데 이는 회막(성막)을 중심으로 한 민수기 2장의 구도와 유사하다.
한 방향에 세 지파씩 네 방향으로 지파 진영들에 의해 둘러싸여 모든 진의 중앙에 있는 광야의 회막성소(민 2:17)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정체성과 실질을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끌어오는 거룩한 준거점 둘레에 포진한 다양하면서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109) 이것은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래 바라셨던 그런 구도이다.이런 면에서 에스겔 환상 성전은 야웨 중심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야웨 하나님은 열왕기상(9:6-9)에서 의거 즉 신명기 신학에 따라 성전을 떠나시고 열왕기상(9:4-5)에 따라 성전으로 되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은 시온의 회복과 깨어진 야웨와의 계약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그 초점이 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향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겔 36:26-27)."
회복을 의미하는 세 가지 환상 기사가 있다.
첫째,37장의 마른뼈가 살아나는 환상이다.
둘째,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 환상이다.
셋째,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야웨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시는 성전 환상이다.전체적으로 에스겔 40-48장은 33장부터 계속되어온 구원 메시지의 종결편이다. 에스겔은 성전 환상을 통해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받아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야웨의 거룩한 영광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공동체에게 선포한다.
109)JosephBlenkinsopp,「에스겔」,박문재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200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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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결론
1.요약
에스겔 성전은 오늘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방향에서 토론을 전개해왔다.광야시대의 성막으로부터 시작해서 실로 성소를 거쳐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공동체는 삶의 중심에 항상 성소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눈에 보이던 성전이 사리진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근거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겠다고 한 성전이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신학적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에스겔 환상예언을 통해 포로공동체는 약속의 땅에서 행했던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힌 역사였다.
구약성경에 대하여 행해져 왔던 여러 역사 비평적 방법은 예언서를 일종의 역사적인 시대의 산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에스겔서 본문 가운데 에스겔 예언자의 직접적인 증언은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에스겔 학파라는 예언자 제자그룹이 편집한 작품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공시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예언서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본문을 읽는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해석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에스겔 예언자의 예언을 해석할 것인가?본 논문에서는 성경 본문을 정경을 수용하는 해석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스라엘 성전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특정 모델을 결정적인 형태로 볼 수 없다.이 성전은 고대 중동지역에 자리한 만큼 그 지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성전내부를 이루는 3분한 구조는 유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광야시대의 성막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바 그것은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모세라는 선지자를 통해 설계도(출 25:9)가 계시됨으로써 건축된 것이다.이것은 일종의 노천신전으로서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차원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을 가진 준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에스겔 성전은 솔로몬 성전을 넘어서서 광야시대의 성막(회막)전승을 따라가고 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배치된 열두 지파의 구조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배치구조와 흡사하다(민 2장;겔 48장). 따라서 에스겔 성전은 성막의 확대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의 성소가 성막이라면 출바벨론의 성소는 에스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성막은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셔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전능하신 하나님이 회막이라는 노천성막에서 자기백성과 같이 하시겠다는 것은 여타 가나안 신전이 추구하는 정치 신학과 정반대이다.다른 고대 중동성전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성전도 정치적,종교적,경제적 기능을 갖고 있는데 그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정치적인에 따라 성전은 종교혼합주의의 온상으로 비화한다. 바알신앙과 야웨 신앙이 동시에 진행되는데,에스겔 8-9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형적인 타락상을 보여준다.
솔로몬 성전은 고고학적 발견에서 보는 것처럼 가나안 신전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하지만 이 성전의 특수성도 간고할 수 없는데 그것 또한 성막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도한 성전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양식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성전 봉헌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다.그 대신 조건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킬 때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제 1성전을 직접 건축한 솔로몬이 먼저 성전을 이방적인 것으로 더럽혔다.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성전의 거룩성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주전 587년 성전파괴라는 대파국을 초래하였다.
바로 이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공동체에게 에스겔이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성전 환상예언을 통해 포로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선언하기에 이른다.그 것은 포로공동체 가운데 당신이 계시겠다는 놀라운 선언이다(겔 37:26-28).예언자는 포로민들에게 야웨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성전환상을 보여준다.더렵혀진 성전을 떠났던 야웨의 영광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저질렀던 악행들을 회상한다.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야웨 하나님의 고발을 받아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음이 밝혀진다. 본문 43장 1-12절에 관한 주석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야웨의 영광과 거룩'이라는 성전신학을 발견하게된다.
신앙 공동체는 각각의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성전 환상본문을 다르게 받아들인다.환상을 문자적이나 혹은 상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땅에 세워질 역사적 지상성전,지상성전의 원형으로서의 하늘성전,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성전으로 보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본문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입장이 미묘하게 틀려지는데 본문 속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 있다.환상으로 보여진 에스겔 성전은 과연 경험할 수 있는가? 정중호는 가상현실비평 방법을 통해 가상성경을 통한 에스겔성전 측량장면을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마치 입체영화를 보는 것처럼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에스겔 성전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성전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답변을 시도해본다.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과의 비교를 통해 양 성전간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으며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말하는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다윗이 받은 계시대로 지어졌다고 하나 성막의 건립정신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은 핵심부분에서는 거의 모든 부분이 일치한다.그러나 에스겔 성전은 전반적으로 솔로몬 성전의 전체 틀거리를 변경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솔로몬 성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성전의 모습이 드러난다.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성전의 거룩성이다.특히 성전 담을 측량하는 장면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그리고 성전의 우두머리라고 할수 있는 대제사장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해서 이 성전은 보다 더 높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보인다.과연 이 성전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성전인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본문 말씀을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포로기 신앙공동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성전 환상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는 이 환상성전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현재 처한 삶의 자리이다.그들은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상태이다.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환상성전은 그 당시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이다.
지금 그들의 당면 과제는 포로상태에서 과연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이다.이 때 예언자는 그들에게 소망과 회복의 말씀을 선포한다. 성전에다시 나타나신 야웨의 영광을 보았다면 그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자기들 가운데 야웨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성전은 종말론적 이다. 제 2성전이 에스겔 성전의 역사적 성취라고 보아도 무망한 것은 아직도 그들에게 보이는 성전 개념이 중요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로기 직후 학개,스가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이 성전재건이라고 외쳤다.시대정황으로 올 때 예언자 신분을 가진 그들은 이스라엘의 고대 성전전승을 다 알고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그렇다면 그들에게 에스겔 예언이 전해졌다고 보아야 한다.바벨론 포로 공동체가 귀환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재건이었다.이것은 포로 귀환민들에게 있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음을 보여준다.
이제 제 2성전기가 시작되었다. 이 성전은 과연 야웨의 거룩성에 합당한 제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에스겔 예언자가 누누이 강조한 것은 야웨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다. 만일 이 기준에 부적합하다면 다시 이 성전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시 실패한다.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더미가 되면서 이제 보이는 성전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수포화되었는가? 에스겔은 이스라엘 고대의 야웨 전승과 후대의 유대종교를 이어줄 수 있는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으며 이 같은 점들의 연결은 이스라엘 종교역사를 형성함 이 역사는 그리스도를 낳게 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된다. 유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는 여기서 각 공동체의 입장에 따라 노선을 정하였다. 유대 공동체는 다시금 율법 공동체로 방향을 잡았다.이에 대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종말론적인 에스겔 성전이 완성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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