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과 영성2 첫째주(1-3)
하나님께서 주님 말씀은 갈라디아서3장 19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를 한다.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면서 사는 것이 율법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복음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은 설사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설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할지라도...우리는 죄인 아닙니까?
설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복음안에서 그들을 품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더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남이 지은 죄를 가려주고 덮어주고 용서해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과연 율법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복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인가를 스스로를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율법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만이고 주님이 오시고 나서는 우리는 복음이라는 그 시스템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옛사람을 택해서 늘 남을 정죄하면서 사는 그 삶은 죄와 사망의 법을 좇아서 결국 사망의 삶을 그런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복음의 능력안에서 그 복음의 능력은 어떤건가?
또 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주님은 뭐냐면 서로를 정죄하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요한복음12장 15절에 보면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주님의 새계명이죠!
눅7:36절에는 시몬의 집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그 동네에 있는 한 죄인인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발에다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거기다 붓고 그 다음에 발 옆에서 울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고...그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집 주인인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마음에 생각하는데 저 사람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텐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이 그 시몬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이 그 시몬에게 시몬아 내가 너에게 이를 말이 있다. 그가 말하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빚진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사람은 오백데나리온 빚을 졌고 한사람은 오십데나리온 빚을 졌다.
그런데 두사람이 돈이 없어서 갚을 길이 없어서 다 탕감을 해 주었는데 그중에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 그랬더니 시몬이 듣고 아니 당연히 오백데나리온 빚을 탕감을 받은 자가 더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그래 니 말이 옳다.
그러면서 주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얘기하죠.
내가 니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내 발을 씻었고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기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사람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사함을 적게 받은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복음의 능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그 죄를 주께로 갖고 나오면 다 사함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율법아래에 율법만 있었다면 주님이 오시지 않고 우리도 불교와 똑같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불교는 뭐에요?
너는 죄인이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만약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율법아래에 있는 율법만 있는 그거는 불교와 같았을 같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율법으로 정죄했던 그 모든 죄가 사함 받은 것입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우리가 그 복음의 능력 아래에 살고 있고 또 우리도 그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아라고 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 계명이더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할렐루야!
우리는 분명히 이 복음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율법적으로 사느냐 말입니다.
왜 내가 꼭 율법처럼 살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왜 나의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냐 말입니다.
나는 복음으로 나의 모든 죄가 그 많은 죄가 사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는 모습은 왜 율법아래 있느냐는 말입니다.
복음의 능력, 여러분이 복음안에 있으면 내가 복음안에 있는 자처럼 주님이 우리를 복음으로 용서했듯이 우리도 복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17절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아직도 우리의 모습이 옳고 그름에 빠져있으면 사람들을 보면 저사람은 저게 옳고 저게 틀렸고 그게 먼저 보이는 사람들 그건 나는 아직 옳고 그름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주님의 눈은 모든 인간을 사랑의 눈으로 보셨어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러분의 눈이 이렇게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든지 간에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보는게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아멘
그것이 복음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더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아직도 나의 모습이 옳고 그름에 빠져 있다면 복음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그 복음이 나에게도 적용이 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안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은 결코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삶은 용서와 사랑이에요.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직도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면서 ‘아휴 저건 틀렸어’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율법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져야 합니까?
잘못하는 것을 볼 때 ‘나도 그랬어. 내 모습이 저 모습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참아주고, 기다려 주고, 기도해 주고, 그를 사랑의 눈으로 보는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야 만이 우리 스스로가 복음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고 하나님도 속지 않습니다.
내가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인가? 내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인가? 보시면 알잖아요.
내가 아직도 시비를 가리는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남을 보면 옳고 그름이 따져진다 그러면 나는 아직 초등학교 몽학선생 아래있는 율법 아래 있는 나는 예수를 믿어서 불 못은 면했지만 나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복음안에 살게 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게 복음안에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냐면 주님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했을 때 그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그랬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은 고작해야 100달란트 빚 진 자들이에요.
우리는 일만 달란트 백데나리온과 일만달란트 비교는 일만달란트는 10만년 일해서 벌 수 있는 품삯이에요.
10만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에요. 여러분은 고작해야 100년 살고 가는데 10만년은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0만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일만달란트, 100데나리온은 3개월만 일하면 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느냐?
에베소서 4:13-14절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은 다른 일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그 마음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용서와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데이트 할때는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부부가 되면 서로를 잘 알아요. 그러잖아요.
그것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진짜 아는 거에요. 하나가 되어서.
그러니까 지금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라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정죄합니다. 몽학선생 아래 있는 자들..
그러니까 그런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져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라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온전한 사랑을 이룬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 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가지 자라는 자, 그런 자라는 거죠.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자에게는 머리가 예수그리도라는 것입니다.
몸은 머리가 시키는대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머리를 그리스도로 잡은 자, 그런 자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면서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롬13:10 이것이 결론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살펴봤는데 더더욱이 우리 스스로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지만 내가 아직도 율법에 메여 있고 율법적으로 살고 있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복음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의 전체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변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변한 그 시스템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에게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입니까?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붙였어요,
그런데 아직도 율법안에 사는 자인지 아니면 내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인지 살펴보고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용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뭐가 나타나냐면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죠. 그의 삶에는 정죄가 아니라 사랑하고 그리고 희락 화평하고 오래참고 자비로움과 양선을 베풀고 충성, 하나님께 충성하고 온유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절제하는 이런 것들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법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온 은혜로운 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혹이라도 율법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늘 용서와 사랑하고 살게 하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사랑 왜 그 사랑을 보여주셨는지, 첫째는 우리가 그 사랑을 받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정죄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더라도 덮어주고 용서하며,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주신 것과 같이 그들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그런 복음 안에서 사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반영되어지고 적용되어져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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