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시인 김용택

[스크랩] 김용택 시 모음 1

하늘이슬 2019. 2. 22. 16:45

** 봄 **
바람 없는 날

저문 산머리에서 산그늘 속을 날아오는

꽃잎을 보았네

희고 고운 몸짓으로

물에 닿으며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을 보았네

아아, 나는 인자 눈감고도 가는

환한 물이네

 

** 이 바쁜데 웬 설사 **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 시인 ** 

배 고플 때 지던 짐 배 부르니 못 지겠네 

 

** 콩, 너는 죽었다 **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 흔 적 ** 

어제 밤에 그대 창문 앞까지 갔었네
불 밖에서 그대 불빛 속으로
한 없이 뛰어들던 눈송이 송이
기다림없이 문득 불이 꺼질 때
어디론가 휘몰려 가던 눈들
그대 눈 그친 아침에 보게 되리
불빛 없는 들판을
홀로 걸어간 한 사내의 발자국과
어둠을 익히며
한참을 아득히 서 있던
더 깊고
더 춥던 흔적을 

 

** 내 사랑은 **

아름답고 고운 것 보면
그대 생각납니다
이게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지금 나는 빈 들판
노란 산국 곁을 지나며
당신 생각입니다
이제 진정 사랑이라면
백날천날 아니래도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밤 너무나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엽 서 **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은 논에 해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에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가 지는 초가을
소슬한 바람이 부는 산 아래 쓸쓸하게 서 있답니다
두 손을 편하게 내려놓으니 맘이 이렇게 편안하네요
초가을에는 서쪽이
좋습니다


 

** 짧은 해 **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갈대가 하얗게 피고
바람부는 강변에 서면
해는 짧고
당신이 그립습니다. 

                                         
** 슬 픔 **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 꽃 한 송이 **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 송이

 

** 빗 장 **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 내게 당신은 **

사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요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 사랑을 이끌어낼 사람
어디 있을라구요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 

당신...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당신...

 

**참 좋은 당신 ** 

어느 봄 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해도
참.좋.은.당.신
 

**  적막 강산 **
느티나무 잎 다 졌네
꽃보다 고운 것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느티나무 밑을 돌아오는
내 여인이 그렇고
햇빛 좋아 바람 없는 날
강가에서 늦가을 물을 보는
농부의 일 없는 등이 그렇다
꽃보다 고운 것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느티나무 잎 다 졌네. 


** 낙화유수 **
머리가 허연 할머니 한 분이 마을에서 걸어나와 옷을 입은
채 강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허연 머리끝까지 강물에 다
잠기고, 연분홍 산복숭아꽃 이파리 한 장이 물 위로 떠 오른
다 꽃잎이 일으킨 물결이 강기슭에 닿을 때, 강굽이를 돌아가
던 꽃 이파리가 마을을 잠깐 뒤돌아본다

햇살이 고운 봄날이다 

 ** 그래서 당신 **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 능소화  **
꽃 졌다
능소화 진다
한낮 불볕 속
깊이 살을 파는
생살의 뜨거움
피가 따라 흐른다
우지 마라
말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
도도해져서
산처럼 서다 

** 다시, 끝 **
세상의 끝에서
시가 길을 잃었다
절망의 절정이 희망의 절정을 끌어올 때까지
절정은 불처럼 뜨겁다

울어라 봄바람아! 
                   

**  선운사 동백꽃 **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 보리씨 ** 
달이 높다
추수 끝난 우리나라
들판 길을 홀로 걷는다
보리씨 한 알 얹힐 흙과
보리씨 한 알 덮을 흙을
그리워하며 나는 살았다. 

** 첫 눈 **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출처 : 숲속의 작은 옹달샘
글쓴이 : 효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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