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슬

인사

하늘이슬 2020. 8. 8. 10:22

인사

10807 임정현

 

피곤하지? 눈 좀 붙이고 있어.”

어머니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목소리가 억지로 덤덤한 척 하는 것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1월이라 그런지 새벽 4시인 지금, 하늘은 펜에서 나오는 잉크보다도 검었다. 추운 공기는 우리 모두를 깨웠던 핸드폰 벨소리가 내 귀에 박혔듯이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을 가득 채웠다. 서둘러 준비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조금만 더 쉬라는 듯 말씀하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가 갈 거야.”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 5년째 되는 지금 말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작년부터 특히 건강이 나빠지셨다. 작년 봄에 수술을 받으시고 한동안 우리 집에서 회복하셨는데, 여름 정도만 해도 건강이 호전되셔서 온 가족이 다 모여 여행도 가신 분이었다. 그런 외할아버지는 가을이 되며 다시 건강이 나빠지셨고 결국 오늘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외할아버지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에 찾아가셨고, 그렇기에 이번 겨울에는 나 혼자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셨다. 그러나 나는 집에 있었다. 어머니께서 피곤할 테니 잠자고 있으라고는 말씀하셔도,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속 편히 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고, 그냥 실감이 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물 잔에 차가운 물을 가득 채워 넣고는 의자에 걸터앉아 멍하니 계속해서 굴러가는 시계바늘만 보고 있었다.

물 잔이 몇 번이나 비었다 채워지고를 반복하고, 시계 분침이 한 세 바퀴는 돌았다. 점점 거실에 있는 큰 창으로 햇빛이 내 눈에 들어오고,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집을 나서려고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집 안을 휘젓는다.

1월이라 그런지 해가 뜨는 것도 늦었고, 이미 떴다고는 해도 차가운 공기가 따뜻해지진 않았다. 주위에 많은 건물들이 있어서 그림자 때문에 햇빛은 건물 사이사이로만 간신히 새어 들어오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버지께서 병원에서 데리러 오셨을 때, 차 안이든 차 밖이든 겨울의 가라앉은 침묵한 공기는 다르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해가 어느 정도 높이 솟아올랐다. 해가 뜨기는 했어도 역시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병원 건물에 들어간 다음에 나와 아버지는 장례식장이 어디에 있는지 길안내 표지판을 따라다녔다. 병원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이상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고 그래서인지 더더욱 무거운 공기, 겨울이라서, 아침이라서, 병원이라서, 안 그래도 차갑고 무거운 공기는 더더욱 무겁고 차가워졌다.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어머니나 선생님들께서 혼을 내시는 것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시면 무서워서 울먹이던 때였다. 그 때와는 다르게 지금 나는 차가운 분위기가 제일 싫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채로 가만히 서 있으려니 정신이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서 발만 움직이는 데도 무거웠다. 내 생각인데 그 어떤 누구라도 병원 공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 외할아버지 역시 그러셨겠지라고 생각해보니 병원은 정말 별로인 곳이다.

식장에 도착했다. 외할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는 온 가족 분들이 모여 계셨다. 내 기억에는 본 적 한 번 없던 사람들도 있었다. 사촌 형들인데 내가 엄청 어렸을 때에 한두 번 만난 것이 전부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향해 절을 두 번 하고서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외삼촌들과 이모들, 그리고 어머니께서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데 울고 계시지는 않았다.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아버지 옆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슬슬 조문객 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외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배웅하러 왔다. 그 사람들 중에는 예전에 뵌 적 있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 친구 분들도 계셨다.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의 빈소에서 절을 두 번 올리고 큰 외삼촌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찾아오시는 분들께 방명록 작성을 도와드렸다.

여기다가 성함 적으시고 조의금은 이곳에... , 감사합니다.”

나는 찾아오는 조문객 분들의 안내를 맡았다. 이름은 한자로도, 한글로도 꾸준히 적혀 한 권 한 권 채워나갔다. 주로 나이가 있으신 아저씨들이 한자로 이름을 적었고, 나머지는 전부 다 한글로 적었다. 사촌 형들이랑 같이 있기는 했어도 내 기억 속으로는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괜히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나이 차가 10살이 넘어가서인 까닭도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시는 분들마다 안내를 하던 나는 그런 방명록에 적힌 사람들 이름들 중 내가 아는 이름이 있나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용원이는 어디 대학 갔대?”

말도 마, 공부를 그렇게 하라 그래도 안 하더니 이제 재수 한다. 누구를 닮아서 그런 건지...”

옆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내 귀에 들어온다. 흔히 장례식이라고 하면 무거운 분위기와 함께 침묵 속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봤을 때, 장례식장은 전부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려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식사를 하던 분들은 이모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서로 안부를 묻는 등 웃으며 평소처럼 대화가 전개되었다. 종이로 된 소주잔은 어느 탁자에나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런 장례식장의 풍경을 바라보며 조금은 놀라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조문객 분들과 함께 웃으며 추억을 회상하는 친척 분들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였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렇게 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그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날이 되었다. 물론 날짜만 지났지 밖에는 달이 높게 떠 있었다. 밤늦게까지 왔다 가신 조문객 분들이 있어서 탁자를 치우고 하다가 어느새 시침은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에게 귤을 까 주시던 작은 외할머니께서는 잠에 드신지 오래였다. 다른 분들도 피곤하신지 눈을 붙이셨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 커피를 하나 마셔서 그런지, 아니면 오늘 같은 날이 워낙 없어서인지 깨어 있는지 딱 하루가 지났음에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아무리 뭘 하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아서 나는 딱 하루 전처럼 물 잔에 물을 따라놓고 불 꺼진 장례식장에서 물을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몸이 피곤해도 전혀 졸리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세수하고 돌아오고는 물이나 마시는 것, 그게 전부였다. 어제와는 그래도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어제는 시계 초침만 눈으로 계속 따라다녔다면 오늘은 멀리 보이는 영정사진만 계속 쳐다봤을 뿐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입원하시기 전 사진이 보이는데, 사진 속 외할아버지가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으신 것이 중후한 멋이 있으시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곧게 정면을 향해 있었다. 눈빛이 맑고 곧게 뻗어있어서 어렸을 때에는 저 눈빛이 무서웠던 적도 있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 따뜻한 분이신데 말이다. 막내인 어머니랑 단 둘이 찍은 사진을 찾아봤을 때에는 딸 바보 아버지들이 흔히 짓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 생각을 계속 하다가 보니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다.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밤늦게 잠자기 시작했을 텐데 몸은 어쩐지 가벼웠다. 바닥도 딱딱하고 이불도, 베게도 부족해 없었는데 푹 자고 일어난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옷을 정리한 다음, 나는 다시 어제 있던 곳으로 갔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똑같이 방명록 작성을 돕고, 신발 정리도 하면서 있었다. 사촌 형이 피곤할 거라면서 방에 들어가 쉬라고 해서, 덕분에 점심시간은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밖에서는 사람들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입관식이요?”

. 2층 복도로 나와.”

점심시간이 지나자 입관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입관식? 그게 뭐지 싶어 여쭤보았더니, 돌아오는 대답으로는 시신을 관 안에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 5년 전에는 그런 게 있는지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래서 다시금 물어보니 그 때 나는 너무 어려서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서 병원 복도를 걸어갔다. 하얀 복도를 따라서 영안실에 도착했다. 영안실, 영안실이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몸이 떨렸다. 무섭기도 했고 현실임을 알 수 있어서 정신이 확 깼다. 영안실 문 앞에는 온 가족 분들이 다 복도를 따라 모여 계셨다. 장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 같이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상주 분은 이쪽으로 와주세요.”

영안실 안으로 들어서자 유리벽을 넘어서 한 침대가 보였다. 그 침대 위에 할아버지께서 누워계셨다. 옷 바깥으로 튀어나온 할아버지의 손과 팔이 보였다. 할아버지의 팔은 말 그대로 뼈밖에 남지 않았다. 며칠 전 병실에서 보셨을 때보다 더 빠진 것 같았다. 그 때 눈물이 주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눈 주위가 촉촉해진다거나 하는 예비동작도 없이 그냥 눈물이 주르륵 하고 흘렀다. 슬퍼서 그랬던 것 같다. 미안해서였기도 하고, 죄송해서였기도 하고, 후회되었기도 하다.

각자 고인 분 가시는 길에 작별인사 하세요.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이라든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이라든가...”

그러고서는 가운데에 닫힌 문을 열었다. 유리벽 너머로만 볼 수 있었던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섰다. 외할아버지 옆에 서 계셨던 큰외삼촌이 먼저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동생들까지 어머니랑 키우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니 나중에 만나시면 이야기 많이 나누시고, 여태 하고 싶으셨던 말도 많이 해드리세요. ..”

큰외삼촌이 이야기를 끝마치시고, 이어서 다른 분들도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도 외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엉엉 울며 아버지, 아버지.. 하시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어머니는 입을 열었다.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지금 얼마나 울고 계시는지는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해한다고 말하면 안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옆에 서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모부들, 아버지, 사촌 형 누나들이 인사를 드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저에요. 할아버지 손자. 지난주에 찾아뵈었는데, 오늘 또 왔어요. 할아버지 손자인데도 많이 안 와서 죄송해요, 방학이라 시간도 많은데 오지 않아서 죄송해요. 작년에 저희 집에서 지내실 때 잘 못해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지금 할 말도 죄송하단 말밖에 할 게 없어서 또 후회되고...”

말을 하려고 할아버지 옆에 서서 입을 열었더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와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데 여태까지 해 드린 이야기가 참 적다는 점에 후회되었다. 계속해서 말을 하기는 했는데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말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고 인사를 잘 드린 것도 아니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였다.

할머니랑 같이 좋은 데에서 지내세요. 거기서는 아프고 힘들 일 없이 행복하게 지내세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지막 인사를 엉망으로 드린 것 같았다. 고치고 고쳐서 완성된 편지는 머릿속에 있었는데, 미처 챙기지 못하고 엉망이었던 첫 번째 편지가 우편함에 들어갔다.

입관식이 끝나고 다시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나는 아버지께 할아버지께 다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보고 이렇게 말했다.

인사는 드리고 싶을 때 드려. 나중에 찾아뵙고 다시 이야기 나누든가... 지금 할 수도 있지.”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도 나는 아쉬움이 남았다. 후회되는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뭐를 하더라도 허전할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뒤늦게 나를 책망했다.

살아계실 때 잘할 걸. 이제 와서 뒤늦게 후회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어렸을 때부터 무섭다고 어머니 뒤에 숨지 말 걸. 중학교 들어와서는 좀 이야기도 나누고 할 걸. 그랬다면 지금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5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11살이었던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몰랐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께서 전한 그 소식을 듣고는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날 아버지 차에 타고 병원에 가서야 믿게 되었다. 그런 나는 죽음이라는 게 영 익숙하지 않아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만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냥 방에서 가만히만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래서 그 때 사촌형들을 못 본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처음 가본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이 어떤 맛인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첫째 날 밤이 되어 잠을 자려는데 그 때 빈소에서 가만히 앉아계시던 외할아버지를 뒤에서 보게 됐다. 그 때, 외할아버지는 그 곧은 눈빛으로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셨다. 아무리 눈치가 없었던 나라도 그 때만큼은 가만히 서서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말 한 마디 없이 계속 앉아만 계셨다. 지금 와서 그 때를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일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후회되는데, 평생을 넘게 같이 살던,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다면 얼마나 공허할까. 그 날 나는 할아버지가 직접 일어나실 때까지 그 뒤에서 쳐다보기만 하였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장례식장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면 영구차에 관을 모신 뒤 발인을 한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영 좋지 않아서인지, 보일러 때문에 바닥이 뜨거웠는지 바깥으로 나갔다. 장례식장 건물을 나가니 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1월이라 그런지 눈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더라면 눈 온다면 신나서 구경한다거나, 친구들 만날 생각만 하고 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차가운 눈이 나를 좀 식혀줬으면 하는 바람에 가만히 서 있다.

외가댁에 갔을 때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결혼식 사진이 있다. 전부 흑백으로 된 결혼식 사진을 보면 두 분의 젊을 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외할아버지는 지금껏 늘 멋있는 분이시다. 옷을 요즘 사람들처럼 입는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셨다. 그것은 예전부터 그랬는지 사진 속에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서있다. 그 사진을 언젠가 찾아뵈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웃으며 이야기해주시던 것이 생각난다. 그 때는 이미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생각해보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외할아버지와 이야기한 적이 많아진 것 같다. 대가족 모임을 제외하고도 이모랑 외할아버지랑 함께 우리 가족끼리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그런 작년 가을 버스터미널에서 외할아버지 옆에서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마저 기억에 선명하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와 함께 쌓은 추억들이 하나하나 솟아오른다. 작년에 집에 지내신 덕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을 수 있었지.. 하고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첫 날 친척 분들이 조문객 분들과 함께 웃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식장을 다 치우고 남은 탁자를 모아 술을 마시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왠지 알 것도 같다. 그 큰 병원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뭔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난간 손잡이에는 눈이 조금이나마 쌓여있다. 나는 맨손으로 눈을 조금씩 모아 한 움큼 쥐었다. 손의 온도 때문일까, 손 안에 꽉 쥐어진 눈덩이는 어느새 녹아 물이 되어 손을 타고 떨어진다. 손이 시리기는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역시 눈이 내리니까 나쁠 것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에 있는 큰 시계는 벌써 두 시라고 알려주고 있다. 눈이 차가워서 그런지 오늘은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정신이 멀쩡하다.

할아버지께 찾아간다. 빈소에 놓인 영정사진 속 그분은 여전히 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분의 눈빛은 내가 처음 봤던 것처럼, 여태까지 봐왔던 것처럼 역시 곧게 뻗어 내 이마를 향해 꽃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바라다본다. 할아버지가 그러셨듯이 나 또한 그렇게 앉고서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천천히 눈으로 그려 본다. 그러고는 다시 인사를 드린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손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이 고맙습니다. 할아버지랑 작게나마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 고맙습니다. 더 많은 추억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고 후회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선명히 남을 추억을 만들어 주신 것, 제가 이 추억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이 기억 한 조각 한 조각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지를 알려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시간이 어느새 더 지났다. 시계 바늘은 네 시를 향해 있다. 장례식 첫 날 내가 전화벨 소리에 깨어난 후 정확히 이틀이 지났다. 다시금 바닥이 뜨거워져서 나는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인지 방금 나왔을 때보다도 추워져 있다. 사람들도 다 자고 있고, 불이 켜진 곳은 얼마 찾기 힘들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고 눈도 오고 있었다. 세고 추운 바람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3일이 지나면서 내게 남은 것은 날아가지 않을 테니 오히려 맞기에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