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포털뉴스의 정윤석목사의 서사라목사 비판에 대한 문제점
서사라 목사 간증에 대한 비판적 주장에 대해 답하다.
기독교신문
gdknews.kr/news/view.php?no=9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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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덕교수
1. 성령의 印(인)과 하나님의 印(인)은 같은 것인가?
정윤석씨는 서사라 목사를 비판하면서 포럼에 참여한 교수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조롱하듯이 비판했다. 이런 비판이 과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는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 문제와 더불어 대답하려고 한다.
서사라 목사의 인침 집회는 서목사가 인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자들을 보내어 참 회개하는 자들에게 인치심을 보여주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사역은, 그 행위 표현으로 보아, 에스겔 9:3-4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 요한계시록 7장에 인치는 사역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질문은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은 동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윤석씨는 이 두 가지가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비판한다. 그는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을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하며 하나님의 인은 마지막 때 이미 성령의 인을 맞은 사람이 추가로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해요. 근데 이게 비성경적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의 인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구원 사건과 언급된다. 신약성경에는 인치심이란 말을 그렇게 많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성령의 인치심은 구원사건과 관계한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절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 지니는 인(印)인데 성령의 인이다.
“고후 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3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 구절은 중간태(中間態)로 표현되어 있다. 즉 “자기를 위하여 너희를 인치신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구절이 가리키는 인치심은 계 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과는 달리 성령으로 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실 그 동안 이 주제 곧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에 대한 문제는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지나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헨드릭슨은 그의 요한계시록 7장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인을 에스겔서와 연결시키지도 않고 단지 인(印)에 대한 세 가지 의미만 언급했다. 조지 엘던 랫드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 사이의 구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이 하나님의 인은 구원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는 문제와 연관시킨다.
그리고 문맥으로 봐도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치신 것이다. 이 말은 이미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 부여한 것이 하나님의 인이라는 말이다. 언젠가 이 문제는 논문으로 답해야 될 것 같다.
M. Eugene Boring은 계 7:1-11을 주석하면서 짐승의 표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인을 설명한다. 그는 짐승이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시를 준 것은 어린양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준 하나님의 인을 모방했다는 것이라 말하여 하나님의 인이 성도들에게 준 인임을 암시한다.
NICNT 주석 시리즈의 요한계시록 주석가인 Mounce는 매우 명백하게 이 하나님의 인이 구원 사건과 관계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 인은 성례식의 의미로 세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인침의 으뜸 목적은 성도들을 다가오는 심판에서 보호를 받음을 보증 하는 것이다.” 세례는 구원 사건과 관계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런 사실을 강조한다. “그들은 분노를 받지 않도록 인침을 받았지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인침을 받지 않았다. 인치심은 하나님의 종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마귀세력의 공격에 대항하여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Harrington은 「Sacra Pagina Series」에서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치심에 대한 내용이 에스겔소 9:4-6절과 관계함을 전제하고 주석을 시작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치심은 이들이 환난과 죽음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을 상징하지 않고 환난 기간 동안 환난을 통과하면서 인내하는 것을 상징한다”라고 말하며 이 인침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택한 백성을 인치는 것은 애굽 사람들을 쳤던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면역을 가진 것을 연상시킨다. … 하나님의 종들이 대환난을 통과할 때 보호를 받기 위해 인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 곧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방식으로 승리를 얻는다”
그리고 독일 성경주석가 Adolf Pohl 하나님의 인을 설명하면서 계 7:1-11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수세자가 되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여기 인침은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과 관계한다고 했다. Pohl은 이 구절이 에스겔서 9:1-11과 연관된다고 지적한다.
Pohl은 에스겔서 9:1-11을 세상 마지막에 일어날 대배도, 대환난과 연관시킨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즉 대배도 곧 타락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즉 인치심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짐승을 위한 쪽으로 조종하는 베리칩의 대칭 사건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인은 적그리스도 원형이 등장하기 이전에 곧 대배도 사건이 일어날 때 환난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부여하는 표시하는 말이다. 정윤석씨가 말하는 성경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근거도 없이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목사가 성령의 인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인은 재앙을 피하는 문제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과 연관함을 말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인은 지금도 천사들에 의하여 사람들의 이마에 쳐지고 있는가?
필자가 서사라 목사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은 2019년초로 기억된다. 총신대원 선배이고 고교 후배 목사 한 분이 서목사의 서적을 읽어볼 것을 권고했다. 필자는 즉시 신청하여 그 당시 7권의 저서를 구입하여 두세 주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었다. 성경은 지옥과 천국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해 주지 않는다. 아마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더욱 파괴된 인간의 언어로서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성경에서 우선 급한 일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을 받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이전에 재임시 종말론을 강의하면서 기존 가르침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 관심이 쏠린 것으로 여겨진다. 마라나타 정신이 미흡하고 현실중심적인 경향이 농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뉴톤 시대의 그에 방불한 스웨덴 과학자인 스웨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저술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과 미국 하바드 의과대학 교수이던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가 쓴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도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에 대해 간증하는 여러 유튜브도 들어보았다. 서목사의 간증수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은 본 것을 기행문식으로 열거하지만 서목사는 천국에 있는 주님과 믿음의 선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한번은 필자의 거주지 근방에서 서목사의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살짝 참석하며 설교를 들은 적 있다. 서목사의 관심은 오직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하는 일에 있었음을 감지했다. 저녁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지인 한 분이 참석한다길래 나중에 내용을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집회에는 인(印)침을 받는 집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 지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필자는 듣고 매우 놀랐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참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마에 십자가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에스겔서 9:3-4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나 같았다.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7장은 이마에 인을 친다는 말만 한다. 그런데 서목사가 본 이마의 인은 십자가였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인을 ‘십자가’라고 하는가? 필자는 2012년 초여름 구약학자이던 고(故) 최의원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을 기억했다. 한국 최초로 히브리 원어에서 순수 우리 말로 구약성경(새즈믄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최박사는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구약에서 유일하게 십자가가 나오는 구절이라고 하시며 자기는 “곱셈 표시”(✕)로 번역했다고 한다. 최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추었다고 말했다.
사실 에스겔서 9:4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의 히브리 원문에는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이다. 필자는 여러 가지 번역 성경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이마에 표하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어권의 유명한 성경인 ‘츄리숴 비벨’(Züriche Bibel)에는 ‘십자가를 그리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 다음 필자는 여러 가지 주석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카일과 델리취는 이 표를 십자가라(cross)고 지적한다. 카일과 델리취는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베트 맨 나중 글자임을 지적하면서 히브리어 더 초기 문헌에서는 ‘십자가 형태’(×)를 가졌다고 한다. 현대 주석가인 Block도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임을 지적하며 고대 문서에는 Χ형태 또는 십자가 형태를 취했음과 아람어로부터 문자를 채용하기까지는 초기에는 이 형태를 취했음을 주장했다.
필자는 문득 독일 유학시절 히브리어를 배울 때 사용한 문법책이 생각났다. 그 당시 독일 대부분 신학교에서는 독일의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 예니(Ernst Jenni)가 저술한 문법책을 사용했다. 예니는 독일 구약주석가 베스터만(Claus Westermann)과 함께 두 권으로 된 구약 히브리어 사전까지 저술한 바 있다. 예니의 히브리어 문법책은 먼저 히브리어가 어떻게 발전해 나왔는지를 설명하면서 문자 발전사 도표를 제시했다. 첫째 단계는 페니키아어 알파벳, 둘째 단계는 옛 히브리어 알파벳, 셋째 단계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 성경(BHS)의 알파벳이 표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에스겔시대의 문자는 둘째 단계임을 파악하고 둘째 단계 알파벳의 맨 끝자인 타우를 찾으니 ×였다. 에스겔은 그 당시에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고 한 것이 ‘십자가를 그리라’고 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의원 박사와 츄리숴 비벨은 잘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일 델리춰와 블록(Blook)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다. 2,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예언이 하나의 상징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금도 지금 이런 집회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만일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주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긴박하게 준비해야 되는 시기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참 회개자들에게 인을 치심을 보여주는 집회에 대해 지나친 비난적인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3.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근래에 칼빈 전문가들은 칼빈을 평가하면서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칼빈은 성경신학자이다”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을 연구하기를 좋아했고 주석했으며 이 좋은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강요”는 사실상 성경 입문서이다. 성경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강조했다. 성경은 성령의 조명으로 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석 전체는 성령으로 꿰뚫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칼빈을 가리켜 성령신학자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는 사실상 성경의 모든 내용을 중요시 했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성경의 모든 관심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에 걸려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박사논문에서 칼빈을 다루었기 때문에 칼빈에 대해 좀 알고 있다. 동시에 이 논문에서 종교개혁신학 곧 정통교회를 공격하는 대적(對敵)들의 사상체계를 연구하여 이단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후자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이단 운운하는 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만을 언급할 뿐이다.
칼빈의 구원론의 중심부에는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칭의함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시고 칭의하시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칼빈에 의하면, 칭의사건과 동시에 성화(聖化)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는 십자가로부터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흘러나온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칼빈은 칭의 사건 이후 성도가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중생(重生)이라고도 하고 성화라고도 하는데, 그가 설명하는 회개(悔改) 내용을 보면 이 세 가지는 동일한 사건이다. 이 세 가지는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그런데 성화의 삶이란 우리의 의지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쪽으로 결단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칭의함 받고 중생을 통해 노예의지를 벗어나 회복된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의 예정론은 기독교강요 3권에 나오는 구원론의 끝 부분인 21-24장에서 상당히 장구하게 상세하게 언급된다. 이것은 칼빈이 로마서 구조를 따른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뒤를 이어 성경에 근거하여 이중예정(二重豫定)을 설명한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또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되는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문제는 이것을 읽는 독자들이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이해하고 실족하게 되는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예정론을 운명론(運命論)으로 이해할 경우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정론에서 중생인들이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문제가 언급되지 않아 운명론에 빠진 사람들은 실족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견인(堅忍)의 문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쪽으로 결단하고 사는 삶의 태도와 연관된다. 이 문제는 그의 후예들이 보강해주어야만 했다.
정윤석씨는 서사라 목사의 서적을 모두 읽었는지 모르겠다. 서사라 목사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목사는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지옥에 가지 말자고 하는 선교적 의도가 있음을 간과하는 것 같다.
칼빈의 역사적 유산을 지옥불 급행열차로 다 몰아넣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도에 넘치는 비난으로 보인다. 신학이란 계속 비판하고 반성함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이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 66권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만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은 상대적인 것으로 비판을 받고 대안을 제시해야 신학이 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치우친 보수주의적인 자세이다. 이런 신학은 매 시대마다 변하는 정황(情況) 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대답을 할 수 없고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어야 한다.
정윤석씨가 이렇게 함부로 교수들을 모독할 정도로 비방하는 행위는 큰 실례(失禮)로 보이며 다음 신학포럼에 참여하여 논문을 발표하여 자기 발언에 대해 평가를 받도록 스스로가 압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만일 그의 발언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적인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그의 비판은 학문적이지도 않다. 신학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천박하게 선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단을 논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성경 전체에 대한 지식과 균형있는 신학 지식을 지니어야 실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약력:
-총신대학교 신학과(BA)
-총신대학교 신대원(M div. eq.)
-독일 뭔스터대학교 신학석사(Mag. theol.)
-뭔스터장로교회 개척및 목회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역임 (은퇴)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역임
-현재 콜부르게학파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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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곤교수
1.한국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간증한 것에 대한 비판
1-1) [비판 내용]:서서라 목사가 간증한 ‘한국전쟁설’은 불발했다, 거짓 선동이다.
기독교포털뉴스의 대표(기자, 목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서사라 목사는 그의 간증서(2013년 12월 14일, 2014년 4월 24일)에서 곧 한국 전쟁이 난다. 한국 전쟁이 나면 한국은 초토화 된다고 거짓말했어요. ‘곧’은 ‘이제 곧’이라는 뜻인데, 근데 지금 7년이 지났으니 ‘곧’이 아니잖아요. 서사라 목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다고 거짓 간증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1-2) 비판에 대한 [해명과 변해]:서사라 목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곧(Soon)’ 이라는 시간(때)의 의미를 우리 사람들은 명확하게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 기한과 때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중휴거도 ‘곧(Soon)’ 있을 거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공중휴거는 아직 안 일어났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예언(말씀)하신 때로부터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또는 예언한 후에 얼마 후에 그 일이 성취되었는가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계 22: 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Yes, I am coming Soon.")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필자 영문 삽입 및 밑줄 첨가)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내가 속히(Soon) 오리라”고 재림을 약속하셨으나 아직도 주님은 안 오신 것이다.물론 때가 되면 다시 반드시 오실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시간 개념(카이로스)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이다.
[행 1: 7] 가라사대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사 7: 14]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는 예언을 하였을 때에 그 일이 700년 후에 일어날 것을 이사야와 수신자가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주님도 속히 오신다고 했는데 언제 오실지는 정말 모른다. 하나님의 시간에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도 ‘곧’ 이라고 받았으나 한국전쟁이 언제라고 년, 월, 시를 말한 적은 없다.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이란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실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정한 때에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고 서사라 목사는 해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국전쟁이 ‘곧’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 개념으로 주님께서 서사라 목사의 천상의 영적여정 중에 주신 말씀이다. 우리 인간의 시간(크로노스) 개념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서사라 목사가 ‘곧(Soon)’이라고 받았다는데 7년이 지나서도 안 일어났다고 해서 거짓 예언인가? 그렇게 산수하듯이 육적으로 단순히 보고 듣는 대로 믿고 단정해 버릴 무뇌(無腦)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듣는 자의 생각과 이해하는 수준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과 때와 시간은 정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어쩌면 한반도에 2014년 이후 총성 없는 [영적전쟁]이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하나님의 징계가 내포된 전쟁이라는 표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14년 이후 우리 한반도는 세월호 사건을 기점으로 대통령 탄핵과 정쟁 그리고 국론분열과 사회혼란 및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프로세서 차원에서 진행된 남북미간의 협상과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까지 이 나라가 전쟁보다 더한 폐해 속에 처해 있다. 한마디로 온 나라와 백성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충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아는 자는 다 아는데 어찌 형제들의 눈에는 영적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하는가?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곧 복음이 없이는 현실을 극복하고 나아갈 다른 길이 안 보이는 때이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도 싹이 돋기도 매우 힘든 이 형국에 밤새 와서 가라지를 심는 마귀를 돕는 일을 하는 거짓 목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2. ‘유명한 종교지도자가 지옥에 처한 이유’에 대한 간증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
2-1) [비판 내용]:“이거 굉장히 불손하고요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입니다. 천국 지옥을 갔다 왔다는 서목사는요. 특별히 누구를 지옥에 갔다라고 하냐면 칼빈이 지옥에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칼빈이 불못에 간 이유라고 하는 것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거예요.”
정윤석씨의 서사라 목사를 비판한 즉 유명 [종교지도자에 대한 명예훼손 건과 그분에 대한 비판 건]에 대하여 해명하고자 한다. 첫째, 초기 간증 책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실명으로 발간되었던 것을 조언을 받아 즉각 수정하여 현재의 개정판에서는 실명 없이 ‘종교지도자’로 정정하여 올려져있다. 둘째, 서사라 목사는 간증 책에서 유명한 종교지도자에 대한 신상을 음해하는 인신공격이나 명예를 훼손하는 말을 한 것은 전혀 없다. 명예훼손과 비판을 했다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 억측(臆測)이며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2-2) “그가(종교지도자) 나의 말보다 바울의 말을 더 믿어서 지옥에 있다”고 주님께서 서사라 목사에게 말씀하신 것을 간증한 것에 대한 [해명과 변해]:
다음으로,본 질문의 핵심인, 서사라 목사가 주님께서 “그가 내 말보다 바울의 말을 더 믿어서 지옥에 있다”라고 하신 말씀을 간증한 부분에 대하여 해명하고 변해하고자 한다.예수님께서는 막9: 43-49 에서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하거든 찍어내고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셨다.사실은 서사라 목사에게 주님이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가 하면 칼빈이 지옥에 가 있는 이유가 예수님의 하신 말씀, 즉 [막 9:43 이하]보다 바울의 이신칭의를 더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처럼 믿게 만들어서 그들의 행위가 예수 믿고 나서 어떠하든 간에, 그들은 결국 ‘성도의 견인’(TULIP교리의 5번째)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까하는 그런 식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신칭의로 구원은 받았으나 그 이후에 믿음에서 탈락되어 지옥에 가는 경우가 많이 생기게 한, 결국 잘못 인도한 책임이라는 것(의미)이었다.
칼빈 자체는 이신칭의로 구원받은 후에 성화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칼빈의 교리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무조건적인 선택’과 ‘성도의 견인’으로 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가르쳐지고 인식되게 된 것이다.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네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내어라 하였는데 안 찍어내고(철저한 회개 없이) 살다가 결국 믿음에서 떨어져 나중에 침륜(멸망. 지옥)에까지 빠지게 된 것이다.따라서, 서사라 목사에게 유명한 종교지도자(칼빈?)의 지옥에 거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세상 가운데 교훈하여 깨우쳐 주시려는 주님의 목적과 의도는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의 회개를 촉구함과 바른 구원관을 가질 것을 경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성경의 결론 장인 요한계시록 21:7과 22:14에서도 다음과 같이 권면하여 말씀하신다.
[계21: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22:14]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 의나 공덕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과 그 누구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큰 자도 없거니와 피하여 나갈 자가 없는 것이다. 또한 변명할 자도 없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 간증을 대하는 모든 수신자는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천국에 있다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남녀노유, 빈부귀천 구분 없이,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누구든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심판에 따라 각인의 처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그의 의(義)를 힙 입어 우리의 죄를 매순간 씻어 정결케 하는 회개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끝까지 승리하는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즉 믿음과 회개 그리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지옥에는 ‘마귀 부하들이 형벌을 집행’하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비판
3-1) [비판 내용]:서사라 목사가 본 지옥에서는, 마귀뿐만 아니라 그 부하들도 지옥에서 심판의 집행자로 설명해요. 이게 문제지요. 지옥형벌의 집행자가 누구? 마귀 부하들로 묘사되고 있어요. 즉 사람만 지옥에서 저주를 받고 마귀와 그 부하들은 제외 되는 것처럼 서술했다는 점이에요. 성경에 이런 지옥은 없습니다. 서사라 목사 간증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거짓 체험이에요.
3-2) ‘마귀 부하들의 지옥형벌 집행 간증은 거짓’이라는 [비판에 대한 해명과 변해]:
성경은 사탄/마귀와 귀신의 존재와 실재를 명시하고 있지만 그 기원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다.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암시적인 구절들(에스겔 28:13-17-두로왕, 이사야 14:12-15-바벨론왕, 요한계시록 12:3-4, 7-9-큰 용/옛 뱀/마귀/사탄=타락한 천사들)을 통해 추론해 볼 때, 사탄/마귀와 그 부하들의 정체는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락한 천사설]을 지지하는 메릴 웅거 박사는 그의 책「성경적 마귀론」(Bibilical Demonology)에서 그리고 프레드 디카슨 박사는 그의 저서「귀신들림과 기독교인」(Demon Possession & the Christian)에서 반역한 천사들은 육체 없는 영으로서 하늘에서 지상으로 던져졌으며, 지금도 타락한 천사들이 사탄/마귀의 부하들로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 대부분의 보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이러한 사탄/마귀의 정체를 ‘타락한 천사설’에 기인함을 지지하고 있다(예영수,「귀신의 기원과 정체」. (서울: 엠북스, 2013), pp. 53-58).
먼저베드로 후서 2:4 과 유다서 1:6을 살펴보자.성경 [벧후 2:4]에,“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필자 밑줄), [유다서 1:6]는,”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이 구절들은 많은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우선 범죄한 천사들은 분명히 마귀 부하들이다.왜냐하면 사탄/마귀는 한명이니까 단수여야 한다. 그런데 천사들은 그의 부하-귀신들(복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지옥에 던져(감금되어) 현재적 지옥=음부(부자가 죽어 음부에 가서 불꽃가운데서 고통 받는 곳)에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의 이 심판 때는 백보좌심판의 때로 보인다. 그러면 그 때(= 백보좌심판 때)에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 성경 [계 20장 14]을 보면,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즉 이 백보좌심판 때에 현재의 지옥인 ‘음부’가 불 못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마 25: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필자 밑줄). 이 때에 지옥에 있는 마귀 부하들도현재의 음부(지옥)가 불못에 던져질 때에 영영한 불에 들어가서 고통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베드로 후서 2장 9절에“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필자 밑줄)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불의한 자는 형벌아래 두어서 심판날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즉 악인들은 지옥(음부)에서 형벌을 당하는데 아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심판 날까지 지키게 하였다(벧후2:4)하였으니, 여기서 마귀 부하들이 불의한 자를의 형벌을 가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여 정리하면, 현재적 개념의 지옥인 음부에서의 불의한 자들(벧후2:9)에 대한 잠정적(최후 백보좌심판 후 영원 불 못에 던져지기 전까지) 형벌 집행자는 그 곳에 떨어져 감금되어 있는 타락한 천사들(=마귀의 부하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지키는 자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다. 서사라 목사는 자신이 체험하여 목격한 것을 거짓 없이 증거하였을 뿐이다.
비판자들은 서사라 목사의 간증서적을 올바로 정독하지 못하여 [서사라 목사]의 위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해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해당 간증서적을 잘 생각하며 정독해 줄 것을 권면하는 바이다.
약력: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공과대학 컴퓨터공학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박사
-미 캘리포니아 센트럴대학 목회학석사 (M.Div.)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 (Th.M.)
-예명대학원대학교 신학박사 (Th.D.)
-현, 아름다운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주)국민일보 기획부장, (주)대교 교육정보연구소장 역임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장 및 교수 역임
-한양대, 백석대, 성결대 겸임교수 역임.
KCU (한국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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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한교수
1. ‘직통계시’용어는 천국지옥 간증과 또한 예언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즉 영적인 교통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1) 사도 바울은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하였다. 언급한 대로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경험하였다. 소위 직통계시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가 변화산의 세 제자들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삼층천 체험을 원한다. 그런데 여기사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말씀처럼 사도요한과 함께 직통계시는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며 경건에 힘쓰는 이유는 직통계시, 즉 제자들과 사도 바울처럼 또 다른 계시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묵상, 다시 말하면 현재적 삶,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 영적으로 보다 깊은 그분과의 교제를 위함이다. 따라서 직통계시의 오해와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오늘 날 교회는 직통계시 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묵상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죄 많은 이 세상에, 오늘같이 코로나의 위협에 살지라도, 주님의 형상을 닮기 원하는 영적 갈망하며, 고통과 슬픔, 이별과 죽음이 없는 곳을 꿈꾸며 신앙으로 승리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지만, 우리의 소망은 항상 위엣것, 즉 주님이 계시는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하루 하루의 삶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분과 교통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와 예언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은 다음과 같다.
욜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요 16:13, “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또한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벧후 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리고 예언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서목사의 천국지옥간증은 천국에서 믿음의 선진들에게 성경의 궁금한 점들을 직접 물어서 기록했으므로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매우 소중한 참고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목사의 간증은 자신이 먼저 성경을 통해 자가검증을 마친 후에 기록했기에 신뢰할 수 있으며, 이것이 간증기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것이다.
2. 천국지옥간증자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사도바울이 삼층천 즉 셋째 하늘을 다녀와서 14년 후에야 겨우 말을 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천국지옥간증을 폄하할뿐 아니라 그러한 간증은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끌어간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1) 성경해석에서 역사적 배경의 이해가 중요한바, 상기 주제 또한 성경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당시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첫 번째 주 사역은 말씀처럼 밖으로 이방인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안으로는 자신과 같이 심각한 오해와 극단적 편견에 빠져있는 동족 유대인의 시급한 구원이 문제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여러 서신서, 특별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삼층천 체험, 즉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의 설파보다도(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적 전통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동족에 대한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전도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14년 전에 체험한 삼층천을 뒤 늦게 언급하였던 것이다.
(2) 한편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은, 2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요청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의 동족 구원에 대한 긴급성과 같이 서목사는
(i) 오늘날 현대인들의 미래적 삶, 즉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불신 풍조를 일깨우기 위하여,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역설하였다. 천국과 지옥은 흔히 하는 농담이나 동화, 신화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가는 실재를 강조하며, 전자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며 후자는 영원한 불못에서 고통을 받을 것을 가르친다.
(ii) 따라서 서 목사는 천국과 지옥을 통해 한 영혼이라도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긴박성으로 저서를 출간하였고, 오대양육대주를 다니며 지금까지 10여년을 복음 전도에 주력해 왔다. 이것을 위해 서 목사는 자신의 전 삶과 재물을 여기에 투자하면서 주께 헌신하고 있다. 서목사에게 천국지옥의 역설은 영혼구원의 긴박성, 어떻게든지 믿지 않는 형제들, 불신자들이 장차 도래할 지옥에서 받을 고통을 피하게 하기 위한 긴박성에 기초하였다.
(3) 결론
주변에 천국지옥체험자들이 많지만 그들 중에 서목사는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과학자요 소명받은 목사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이 시대의 선각자로서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서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런 면에서 서목사의 사역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목사는 무엇보다도 영혼구원에 집중하고, 교회의 모든 재정을 복음전도와 영혼구원을 위하여 무료 책자 발매와 막대한 선교비 사용, 지금도 교회가 없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복음의 불모지에 교회를 건축하며, 소위 자비량 선교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위 비판자들은 서목사의 남다른 사역과 소명에 대하여, 기도하며 돕지는 못할 지라도, 최근에 몇몇 이단 감별사들이 단지 신학적 논리와 지식에 기초하여 분별없이 예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극히 삼가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이들은 교회를 지키고 보존한다는 명분아래 오히려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며 교회를 파괴하는 신학적 혹은 성경적 지식없이 날뛰는 풋내기 지식인들로, 단언컨대 소위 신종 분파주의자들로, 공히 신학 사상을 검증 받아야 할 대상들이다. 특별히 정윤석 기자의 경우, 안방에 앉아서, 마치 자신이 선각자요 교주인 듯이 세속적 인기나 인기몰이에 편승하여 성도들을 현혹하고, 무엇보다도 지극히 자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채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폄하하는 것과 또한 함부로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즉시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약력:
- 총신대 신학과, 합동신학원 졸업
- 영국 애버딘 대학교 신학석사 (Th.M., 역사신학)
- 영국 남 웨일스 글라모르간대학교 (Ph.D., 역사신학)
-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Post-Doctoral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교수 역임 (역사신학)
- 언약사상사 (Ph.D.),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제 21회 기독교 출판 문화상 신학부분 최우수상), 종교개혁사,
개혁신학의 전통, 청교도유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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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문 기자 cap88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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