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
교회협동신문
승인 2021.01.08 20:07
http://www.pf-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55
서영곤 교수
서영곤교수
약력: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공과대학 컴퓨터공학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박사
-미 캘리포니아 센트럴대학 목회학석사(M.Div.)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Th.M.)
-예명대학원대학교 신학박사(Th.D.)
-현, 아름다운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주)국민일보 기획부장, (주)대교 교육정보연구소장 역임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장 및 교수 역임
-한양대, 백석대, 성결대 겸임교수 역임
-KCU(한국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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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비판에 대한 변해서
1.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한 다섯 편의 비판 글 중에서 <네 번째 것: 성밖으로 가는 목사, 지옥으로 가는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5가지 주제로 변해(辨解, Apology)하고자 한다.
#1. 요한계시록 3:5에 의하면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진다.
#2,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목사는 이기지 못한 자로서 모두 ‘성 밖’에서 고통 받는다.
#3. 타락한 목사들은 ‘지옥’에 처해진다.
#4. 히브리서 6:4-6은 한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들에 관한 말씀이다.
#5. 이기지 못한 목사들이 가는 ‘성 밖’은 요한계시록 22:15의 예루살렘 ‘성(城)밖’이다.
2. 위 주제에 대한 [박유신 목사]의 비판과 [서사라 목사]측의 반박성 변해
[비판 #1]: 성경 계 3:5에 의하면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진다.
서사라 목사는 요한계시록 3:5의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잘 못된 해석으로 적용한다.
☞ 성경 오역과 임의적 해석문제: 인용된 성경 계3:5의 ‘액살레입소’(ἐξαλείψω)에 대한 바른 해석은, ‘지워진다’는 뜻이고 ‘흐려진다’는 의미는 전혀 없는 것이다(#1). ‘이기지 못하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진 자로서 ‘성 밖’에 처하게 된다는 임의적인 해석(#5)을 하고 있다.
- “흐리지 아니하고”에서 ‘흐리지다’로 번역된 원어 ‘액살레입소’(ἐξαλείψω)는 ‘닦아내다’, ‘지우다’, ‘제거하다’의 뜻으로서 ‘흐려지다’, ‘희미해지다’라는 의미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 모든 번역본 성경에서도 하나같이 ‘액살레입소’를 지우다, 제거하다, 삭제하다의 의미로 번역한다. 생명책에 있는 이름 중에 흐려지는 이름이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렇게 이름이 흐려진 사람들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것이다.
[비판 #1]에 대한 변해: 계 3:5의 ‘액살레입소’(ἐξαλείψω) 해석은 지우다, 제거하다는 본래의 의미가 맞는 것이다. 하지만 한글로 번역 과정에서 ‘지우다, 제거하다’를 강조하여 ‘흐려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서 실재로 여러 한역 성경에서 서사라 목사가 적용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팩트(Fact)이다. 오히려 강조법으로 번역된 것이 더 주님의 확고한 심정을 잘 느끼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영어의 {Blot ~ out}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지우다, 희미하게 만들다’ 로도 함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을 것이다.”와 “~생명책에서 결코 흐리지도 않을 것이다”는 동일한 의미(은유법: 원관념과 보조관념)로 보아야 한다. 단 어느 것이 더 주님의 심정을 잘 표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1) 계 3:5의 해석 문제: 오역이 아니라 원어(ἐξαλείψω)에 대한 ‘직역과 의역의 차이’로 보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성경(성문서)의 문학적 표현으로 보아도 좋다.
2)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생명책에 이름이 ‘흐려진 자’는 그 이름이 ‘지워진 자’가 아니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있는 자’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흐려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직유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성경에서 ‘이기는 자와 이기지 못하는 자’의 개념은 둘 다 신자(믿는 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불신자는 이기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과는 원천적으로 상관이 없는 자이다. 태생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사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4) 서사라 목사가 그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서 주장하는 신자(믿는 자) 중 [이기지 못하는 자]에 대한 두 부류의 종말 심판적 운명은 [인본주의 신앙, 가식적 회개-생명책에 흐려진 이름-성 밖]와 [회개 없는 영구적인 타락자(히 6:4-6)-생명책에 지워진 이름-지옥]의 구분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서사라 목사는 믿는 자로서 일시적 타락 이후 회개로서 부분적으로 회복하거나 타락 후 배도와 배교로 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이기지 못하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거나 완전히 지워질 수도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라 목사의 성경 해석관(생명책에 기록~흐려짐~지워짐의 표현)은 오히려 [이신칭의]의 구원관에 더 충실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원에 이르도록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더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비판 #2]: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목사는 이기지 못한 자로서 모두 ‘성밖’에서 고통 받는다.
[비판 #2]에 대한 변해: 서사라 목사는 천상(낙원)의 성 밖 쇠창살 안에 있는 한 목사를 목도하고서, 그가 본 목사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자는 이기지 못한 자로서, 모두 ‘성 밖’에서 고통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성 밖’에 처하는 자들은 목사뿐만 아니라, 1) 주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모든 자들”과 2)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방식대로 삶을 사는 크리스쳔들 그리고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청지기가 되지 못하면 모두가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인 서사라 목사의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은혜/믿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삶(율법/행함)을 살지 못하는 형식적인 크리스쳔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참조: [성경해석의 새 지평」, 서영곤 논문(68-69쪽), 하늘빛출판사, 2020]
[비판 #3]: 타락한 목사들은 ‘지옥’에 처해진다.
[비판 #3]에 대한 변해: 비판 #3은 [비판 #2, #4, #5]와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것으로 별도의 변해를 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2, #4, #5 참조).
[비판 #4]: 히브리서 6:4-6은 ‘한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들에 관한 말씀’이다.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에 대하여 박유신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히6:4-6]은 ‘구원의 취소’, ‘구원의 취하’, ‘구원의 박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서사라 목사는 이러한 의미를 가진 히브리서 6:4-6을 임의대로 해석해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그 행위에 따라 그 구원을 거두어 가시는 분으로 확정한다. 그리고 이를 타락한 목사에 대하여도 대입한다. 목사의 ‘타락’과 히브리서 6:6의 ‘타락’은 배경과 의미에 있어서 명백히 구분된다.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는 문장 또한 ‘박탈된 구원’과 무관하다. 서사라 목사는 이 본문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지옥 체험기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탈한 체험기이기 때문이다.
[비판 #4]에 대한 변해: 서사라 목사는 ‘이기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예를 들면서 계21:8과 계22:15을 예시 말씀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즉 이기지 못하는 자의 두 부류가 다 예수를 믿는 자들인데, 하나는 불 못과 또 다른 하나는 성(城)밖으로 나뉘어 처하여 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계시록 21장 8절(불 못) 경우의 이기지 못하는 자는, 죄를 지어도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성령이 떠난 경우이다(즉 화인을 맞아 타락-배교-배도한 자, 히6:4-6 참조). 그러나 같은 죄의 항목이라 하더라도 계시록 22장 15절(성 밖)으로 간 경우에는 아직 성령이 떠나지 아니한 즉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결과 한 쪽은 하나님이 완전히 버린/유기된 것이고 다른 쪽은 성령이 아직 내주하는 경우라는 의미인 것이다.
정리하면, 계시록 21장 8절 = 불신자 + 이기지 못하는 자들 중에 양심이 화인 맞을 정도로 재 타락하여 불신자와 같은 상태로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 구원을 잃어버린 자들이고[불 못], 그러나 계시록 22장 14-15절 = 이기지 못하는 자들이 가는 [성(城)밖]인데, 이들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들이다. 즉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므로 [성(城)밖]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 부류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박유신 목사]가 단정한, [히6:4-6]은 ‘구원의 취소’, ‘구원의 취하’, ‘구원의 박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히6:7-8을 깊이 묵상 해 보면 누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는 자인지 그리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아닌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히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말씀은 앞의 [히6:4-6]을 주석하는 말씀이다.
[비판 #5]: 이기지 못한 목사들이 가는 ‘성 밖’은 요한계시록 22:15의 예루살렘 ‘성(城)밖’이다.
새 예루살렘 성은 천국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그리스도의 신부’와 ‘어린 양의 아내’를 가리킨다(계 21:9-10). 요한계시록 22:2에서도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로 묘사한다. 신랑은 어린 양 예수이다.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 교회공동체이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실체는 어린양의 신부 곧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이미 서사라 목사의 ‘성 밖’ 스토리도 팩트가 아님이 증명된다. 예수를 믿어도 이기지 못한 자들이 간다는 ‘성 밖’이란 없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다양한 교회의 모습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다양한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최종적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응축한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면모는 요한계시록 21:9-22:5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서사라 목사는 요한계시록 21, 22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구조와 특징을 천국의 실제 모습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천국 밖의 지역을 ‘성 밖’으로 지칭하며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진 자,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한 자, 예수는 믿으나 이기지 못하는 자 등등이 죽은 후 가는 곳이라고 한다. 상식을 벗어난 해석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성 안과) ‘성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성경과 계시록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판 #5]에 대한 변해: 전형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잘못목된 비판의 글이다. 박유신 목사는 무천년기주의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이며 서사라 목사는 [전천년기주의]에 입각하여 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인 것이다. 자신이 어떤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가 남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신학에서 본질이 아님 관점의 차이는 상호 인정하면서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무천년기적 관점]에 속하는 자들은 미래적 천국이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실재하는 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박유신 목사]와 같이, 신랑과 신부(예수님과 교회)로 해석하는 것이다.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자들과 무슨 소통이 되겠는가?
하지만 비판자들은 서사라 목사의 간증서적을 올바로 정독하지 못하여 [서사라 목사]의 위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해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해당 간증서적을 잘 생각하며 정독해 줄 것을 권면하는 바이다. 따라서 본 비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기술할만한 지면도 부족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비판적 질문에 대한 해명보다 우선 선행되어야 할 ‘비판자의 오해 또는 성경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비판한 질문은, 전형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잘못된 비판의 글이다. 비판자는 [무천년기주의적 관점]에서 종말론과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이며, [서사라 목사]는 [전천년기주의]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자로서 근본적으로 각자기 쓰고 있는 안경이 다르다. 자신이 어떤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가 남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신학에서 본질적 주제가 아닌 관점의 차이는 상호 인정하면서 양립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무천년기적 관점]에 속하는 자들은 미래적 천국이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실재하는 천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비판자와 같이, 신랑과 신부(예수님과 교회)로 치부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자가 말한 것 같이 성경과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 상징적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성 안’과 ‘성 밖’이란 개념은 “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천국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즉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과 어떻게 대화가 되겠는가? 처음부터 대답할 가치가 전혀 없는 어리석은 질문, 곧 우문(愚問)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박유신 목사가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하여 비판한 다섯 편의 글 중에서 <첫 번째 것: 높은 인기와 깊은 의혹의 상호모순성을 가진 천국지옥 체험기>에 있는 “지옥에서 루시퍼를 만났다“는 간증은 [비성경적, 잘못된 주장] 이라는 비판을 다음과 같이 변해(辨解, Apology)하고자 한다.
(1) [비판 내용]: “서사라 목사는 [그의 간증서적을 통해] 지옥에서 천사장 출신 루시퍼를 만나 대화했다고 밝히며, 그 루시퍼의 기원, 그의 타락 과정, 그의 실체를 이사야 14:13-15, 에스겔 28:13-17, 요한계시록 12:3-4이 밝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루시퍼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서사라 목사가 지옥에서 만나 대화까지 나누었다는 루시퍼는 누구인가? 이러한 성경의 틀을 벗어난 체험이 있을 수 있는가?“
(2) “사탄을 루시퍼로 이해하며 간증한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변해]:
본 질문에 대하여는 긴 해명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원어 단어의 해석상 문맥적 고려를 일반적 성경 해석에 적용할 경우에 복잡한 논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탄을 ‘루시퍼(Lucifer)’로 지칭 또는 명명하는 것이 명분이 있느냐?”하는 것과 성경 말씀과 역사 속에서 암시하는 것을 연역적로 해석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을 훼손하는 것이 되는지를 해명하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말한 대로 고유명사 ‘루시퍼(Lucifer)’의 실체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사라 목사는 이사야 14:12에 등장하는 “계명성”의 영어 번역 과정에서 나온 ‘루시퍼’가 사탄의 정체로 이해한 것이다. 위 성경의 ‘계명성’이란 의미는 ‘바벨론 왕’을 비유하기 위해 도입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사탄/마귀를 암시하는 ‘루시퍼’라는 이름의 출처는 다 아는바와 같이, KJV와 NKJV 성경이 새벽별(금성)의 의미를 가진 ‘계명성’으로 영어 번역한데서부터, 루시퍼(Lucifer)로 명명하게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란 말은 ‘대적자, 불법자’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세 개의 자음 ‘신’(שׂ)과 ‘테트’(ט)와 ‘눈’(ן)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즉 히브리어인 사탄(ןטש, Satan)=헬라어(디아볼로스, Diabolos)=라틴어(루카페스, Lucifer)=영어(루시퍼, Lucifer)로 번역되면서 히브리어 ‘사탄(ןטש)’이 영어권의 의미로 ‘루시퍼(Lucifer)’로 불리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탄(ןטש)이 히브리어라는 것과 히브리어인 사탄을 문맥적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타락한 천사’로만 보는 것은 다소 비성경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이는 구약 성경에서의 단어는 일차적으로 그 시대의 상황적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서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분명하게 사탄/마귀의 존재를 인정하고 명시하고는 있지만 그 기원을 말해 주지 않기에, 오늘날 신약 시대적 상황에서는 성경에서 그 출처를 통전적 해석의 관점, 즉 성경 전체 역사 속에서 유추하여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서사라 목사는 사탄/마귀의 정체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에 기반 한 [타락한 천사설]에 근거하여 ‘사탄/마귀의 정체를 타락한 천사장‘으로, 그 부하들을 ‘타락한 1/3의 천사들의 무리‘로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다. 이는 기존 신학에 반(反)하거나 구속사의 본질적 교리를 훼손시키는 점이 결코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비판자들이 지적한 성경 구절(에스겔 28:13-17, 이사야 14:12-15, 요한계시록 12:3-4)을 [타락한 천사설]에 기반하여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 신학자들과 교단에서는 일반적인 사실(Fact)임을 상기하길 바란다.
4. [박유신 목사]의 비판에 대한 ‘자격, 신분 및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
1) 비판의 자격:
[박유신 목사]는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어떤 의도로> 저자(서사라 목사)의 동의도 없이 자의적인 해석과 일방적인 비판과 폄하(貶下)의 글로 인터넷 미디어를 통하여 유포하고 있는가? 아울러 이러한 비판 및 비방은 실증법상으로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에 엄중하게 묻는 바이다.
2) 신학적 정체성: [박유신 목사]는 기독교포털뉴스의 ‘이단문제 전문연구위원’이라는 타이틀로서 서사라 목사의 간증수기에 대하여 비방적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판 내용이나 방법적인 면에서 소위 이단문제 전문위원이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정도의 [신학적 왜곡과 검증의 준거]가 모호하고 성경 해석의 기준 또한 자신의 편협 되고 한정된 지평을 보이고 있다. 하여 [박유신 목사]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질의를 가하니 성실히 답변 해 주길 바란다.
(1) [박유신 목사]가 이해하는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2) [박유신 목사]는 성경에 계시된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실존 또는 그 실재를 믿는가?
(3) [박유신 목사]는 성경이 계시하는 천국의 현재적 낙원, 미래의 천년왕국 그리고 역사적 종말의 영원천국(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실재를 인정하는가?
(4)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학설 또는 교리로서, [박유신 목사] 자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전천년기설? 후천년기설? 아니면 무천년기설인가?
(5) [박유신 목사]는 위의 3관점 중 어떤 것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가?
(6) [박유신 목사]는 이단문제 전문연구원으로서 그 판별 기준의 핵심과 원칙은 무엇인가?
(7) 성경 해석이나 신학사상이 상호 대립될 경우 이를 조정하거나 양립을 허용 또는 가능 하게 하는 [박유신 목사]의 최소한의 가치중립적 기준이나 준거는 무엇인가?
5. [기독교포털뉴스]와 [박유신 목사]에게 드리는 제언과 결론
1) ‘신학사상이나 성경해석에 관한 올바른 비판적 질문과 그 대답’은 어떠해야 하는가?
개혁신학원리에 입각한 질의응답이 되어야 한다. 개혁신학의 제 1원리는 하나님의 존재 인식과 인정이다. 이는 인간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때라도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인식 즉 존전의식(尊前意識)으로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관된 담론에 대한 질의응답은 경솔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담론에 대한 반론 또는 비판적 질문을 가진 자는 최소한 해당 이슈(Issue)나 주제에 대하여 충분한 정보나 배후 지식을 습득한 후에 첫째로, “나의 질문 또는 비판이 진실에 입각한 것인가?”를 주님께 한번 묻고, 두 번째로, “이 질문이 꼭 나는 물론 여러 수신자(Audience)들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것인가?”를 다시 묻고, 마지막으로 “나의 질문이 상대방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행하여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질문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면 또는 비대면 방식으로 정중하게 변해(辨解)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인 절차도 정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차별적 사이버 공간의 오픈된 미디어 상에서 상대방을 비판, 비난, 폄하하는 행위는 비신사적이며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귀하고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모든 부정 또는 비판적 질문을 대하는 대답 또한 정중하고 신실하며 친절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변해자(辨解者)의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수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은 매우 신사적인 것으로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쟁점 주제들에 대하여 매우 세밀하고 깊은 학자적 식견으로 지적하였고 또 그것들에 대하여 대화의 장을 만들기를 본인 스스로 요청 해 주었기 때문이다.
2)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때 가장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비판하는 본인이 지니고 있는 그 비판의 기준이나 평가의 잣대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판단 기준은 그 사람이 연마하고 닦은 학문적인 시스템(System)이다. 따라서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사상의 시스템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한다. 그 비판 시스템의 고기 잡는 그물코가 너무 촘촘하거나 크게 될 때 그 비판은 [객관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많은 비판들이 부메랑이 되어 비판자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3) 신학은 왜 태생적 오류(誤謬)를 범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감화·감동적 조명 없이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이기적 교만이 앞서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세계관과 가치관에 부합한 하나님의 신학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깊은 영성과 묵상은 물론, 특별한 은사를 통한 주님의 계시에도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지상사역 당시에 왜 말씀의 선포와 함께 기적과 이사를 행하셨는가?
왜 오늘날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유체이탈이나 입신이나 영육 분리와 같은 신비스런 초월적 방법으로 천국과 지옥 또는 삼층천을 왕래하거나 천상을 보게 해주시는 것인가? 그들이 특별한 인간이라서? 예뻐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이시려 그러하시는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마치 참 신과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이적과 기적이 없어도 충분히 메시야 사역을 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구원사역과 천국복음 전파를 효과적으로 완성하시려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지혜의 선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하나님 나라(하나님이 계신 곳)의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선지자적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 땅의 하나님 백성들은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들이 전하고 증거하는 것들 중에는 우리의 신앙을 깨우게 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것들도 많이 있으며, 상상력을 확장시키거나 천상의 비전을 더욱 분명하게 해 주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급속히 인본주의 신앙으로 퇴색되어 가는 이 세대의 영성을 새롭게 해주는 귀한 영적자산(靈的資産)이 되는 것이다. 왜 평신도들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고 싶어 하는데, 일부의 교계 지도자나 신학자들은 그것을 비난하고 폄하하기에 앞장서는가? 개인적 선입관으로 판단하지 말자! 그들은 틀리고 내가 맞다하고 쉽게 말하지 말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저들과 다른 것이며, 내 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실수와 허물 많은 인간이 아닌가! 성경을 보기만 듣기만 해도 그리 좋은데, 천국을 보거나 체험해볼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더 큰 은혜가 되겠는가 말이다. 대신, 그 소식들이 비성경적이거나 또는 현존 신학사상이나 교리 간에 불일치한 것으로 보인다면 정당한 신학적 방법을 통해 오류를 검증하여 밝혀준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은 무오하지만, 인간의 신학함은 출발점에서부터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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