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포털뉴스의 정윤석씨의 서사라 목사를 비방한 동영상과 글에 대한 반박
교회협동신문
승인 2021.01.08 20:15
http://www.pf-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54
권호덕 교수
권호덕교수
약력:
-총신대학교 신학과(BA)
-총신대학교 신대원(M div. eq.)
-독일 뭔스터대학교 신학석사(Mag. theol.)
-뭔스터장로교회 개척및 목회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역임 (은퇴)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역임
-현재 콜부르게학파 연구소 소장
============================================================================
1. 성령의 印(인)과 하나님의 印(인)은 같은 것인가?
정윤석씨는 서사라 목사를 비판하면서 포럼에 참여한 교수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조롱하듯이 비판했다. 이런 비판이 과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는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 문제와 더불어 대답하려고 한다.
서사라 목사의 인침 집회는 서목사가 인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자들을 보내어 참 회개하는 자들에게 인치심을 보여주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사역은, 그 행위 표현으로 보아, 에스겔 9:3-4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 요한계시록 7장에 인치는 사역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질문은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은 동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윤석씨는 이 두 가지가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비판한다. 그는 “성령님과 하나님의 인을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하며 하나님의 인은 마지막 때 이미 성령의 인을 맞은 사람이 추가로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해요. 근데 이게 비성경적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의 인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구원 사건과 언급된다. 신약성경에는 인치심이란 말을 그렇게 많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성령의 인치심은 구원사건과 관계한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절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 지니는 인(印)인데 성령의 인이다.
“고후 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3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 구절은 중간태(中間態)로 표현되어 있다. 즉 “자기를 위하여 너희를 인치신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구절이 가리키는 인치심은 계 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과는 달리 성령으로 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실 그 동안 이 주제 곧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에 대한 문제는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지나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헨드릭슨은 그의 요한계시록 7장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인을 에스겔서와 연결시키지도 않고 단지 인(印)에 대한 세 가지 의미만 언급했다. 조지 엘던 랫드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성령의 인과 하나님의 인 사이의 구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이 하나님의 인은 구원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는 문제와 연관시킨다.
그리고 문맥으로 봐도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치신 것이다. 이 말은 이미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 부여한 것이 하나님의 인이라는 말이다. 언젠가 이 문제는 논문으로 답해야 될 것 같다.
M. Eugene Boring은 계 7:1-11을 주석하면서 짐승의 표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인을 설명한다. 그는 짐승이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시를 준 것은 어린양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준 하나님의 인을 모방했다는 것이라 말하여 하나님의 인이 성도들에게 준 인임을 암시한다.
NICNT 주석 시리즈의 요한계시록 주석가인 Mounce는 매우 명백하게 이 하나님의 인이 구원 사건과 관계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 인은 성찬식의 의미로 세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인침의 으뜸 목적은 성도들을 다가오는 심판에서 보호를 받음을 보증 하는 것이다.” 세례는 구원 사건과 관계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런 사실을 강조한다. “그들은 분노를 받지 않도록 인침을 받았지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인침을 받지 않았다. 인치심은 하나님의 종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마귀세력의 공격에 대항하여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Harrington은 「Sacra Pagina Series」에서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치심에 대한 내용이 에스겔서 9:4-6절과 관계함을 전제하고 주석을 시작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치심은 이들이 환난과 죽음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을 상징하지 않고 환난 기간 동안 환난을 통과하면서 인내하는 것을 상징한다”라고 말하며 이 인침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택한 백성을 인치는 것은 애굽 사람들을 쳤던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면역을 가진 것을 연상시킨다. … 하나님의 종들이 대환난을 통과할 때 보호를 받기 위해 인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 곧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방식으로 승리를 얻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인은 적그리스도 원형이 등장하기 이전에 곧 대배도 사건이 일어날 때 환난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부여하는 표시하는 말이다. 정윤석씨가 말하는 성경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근거도 없이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목사가 성령의 인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인은 재앙을 피하는 문제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과 연관함을 말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인은 지금도 천사들에 의하여 사람들의 이마에 쳐지고 있는가?
필자가 서사라 목사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은 2019년초로 기억된다. 총신대원 선배이고 고교 후배 목사 한 분이 서목사의 서적을 읽어볼 것을 권고했다. 필자는 즉시 신청하여 그 당시 7권의 저서를 구입하여 두세 주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었다. 성경은 지옥과 천국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해 주지 않는다. 아마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더욱 파괴된 인간의 언어로서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성경에서 우선 급한 일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을 받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이전에 재임시 종말론을 강의하면서 기존 가르침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 관심이 쏠린 것으로 여겨진다. 마라나타 정신이 미흡하고 현실중심적인 경향이 농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뉴톤 시대의 그에 방불한 스웨덴 과학자인 스웨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저술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과 미국 하바드 의과대학 교수이던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가 쓴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도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에 대해 간증하는 여러 유튜브도 들어보았다. 서목사의 간증수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은 본 것을 기행문식으로 열거하지만 서목사는 천국에 있는 주님과 믿음의 선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한번은 필자의 거주지 근방에서 서목사의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살짝 참석하며 설교를 들은 적 있다. 서목사의 관심은 오직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하는 일에 있었음을 감지했다. 저녁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지인 한 분이 참석한다길래 나중에 내용을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집회에는 인(印)침을 받는 집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 지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필자는 듣고 매우 놀랐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참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마에 십자가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에스겔서 9:3-4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나 같았다.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7장은 이마에 인을 친다는 말만 한다. 그런데 서목사가 본 이마의 인은 십자가였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인을 ‘십자가’라고 하는가? 필자는 2012년 초여름 구약학자이던 고(故) 최의원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을 기억했다. 한국 최초로 히브리 원어에서 순수 우리 말로 구약성경(새즈믄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최박사는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구약에서 유일하게 십자가가 나오는 구절이라고 하시며 자기는 “곱셈 표시”(✕)로 번역했다고 한다. 최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추었다고 말했다.
사실 에스겔서 9:4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의 히브리 원문에는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이다. 필자는 여러 가지 번역 성경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이마에 표하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어권의 유명한 성경인 ‘츄리숴 비벨’(Züriche Bibel)에는 ‘십자가를 그리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 다음 필자는 여러 가지 주석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카일과 델리취는 이 표를 십자가라(cross)고 지적한다. 카일과 델리취는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베트 맨 나중 글자임을 지적하면서 히브리어 더 초기 문헌에서는 ‘십자가 형태’(×)를 가졌다고 한다. 현대 주석가인 Block도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임을 지적하며 고대 문서에는 Χ 형태 또는 십자가 형태를 취했음과 아람어로부터 문자를 채용하기까지는 초기에는 이 형태를 취했음을 주장했다.
필자는 문득 독일 유학시절 히브리어를 배울 때 사용한 문법책이 생각났다. 그 당시 독일 대부분 신학교에서는 독일의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 예니(Ernst Jenni)가 저술한 문법책을 사용했다. 예니는 독일 구약주석가 베스터만(Claus Westermann)과 함께 두 권으로 된 구약 히브리어 사전까지 저술한 바 있다. 예니의 히브리어 문법책은 먼저 히브리어가 어떻게 발전해 나왔는지를 설명하면서 문자 발전사 도표를 제시했다. 첫째 단계는 페니키아어 알파벳, 둘째 단계는 옛 히브리어 알파벳, 셋째 단계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 성경(BHS)의 알파벳이 표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에스겔시대의 문자는 둘째 단계임을 파악하고 둘째 단계 알파벳의 맨 끝자인 타우를 찾으니 ×였다. 에스겔은 그 당시에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고 한 것이 ‘십자가를 그리라’고 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의원 박사와 츄리숴 비벨은 잘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일 델리춰와 블록(Blook)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다. 2,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예언이 하나의 상징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금도 지금 이런 집회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만일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주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긴박하게 준비해야 되는 시기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참 회개자들에게 인을 치심을 보여주는 집회에 대해 지나친 비난적인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3.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근래에 칼빈 전문가들은 칼빈을 평가하면서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칼빈은 성경신학자이다”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을 연구하기를 좋아했고 주석했으며 이 좋은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강요”는 사실상 성경 입문서이다. 성경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강조했다. 성경은 성령의 조명으로 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석 전체는 성령으로 꿰뚫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칼빈을 가리켜 성령신학자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는 사실상 성경의 모든 내용을 중요시 했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성경의 모든 관심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에 걸려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박사논문에서 칼빈을 다루었기 때문에 칼빈에 대해 좀 알고 있다. 동시에 이 논문에서 종교개혁신학 곧 정통교회를 공격하는 대적(對敵)들의 사상체계를 연구하여 이단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후자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이단 운운하는 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만을 언급할 뿐이다.
칼빈의 구원론의 중심부에는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칭의함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시고 칭의하시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칼빈에 의하면, 칭의사건과 동시에 성화(聖化)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는 십자가로부터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흘러나온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칼빈은 칭의 사건 이후 성도가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중생(重生)이라고도 하고 성화라고도 하는데, 그가 설명하는 회개(悔改) 내용을 보면 이 세 가지는 동일한 사건이다. 이 세 가지는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그런데 성화의 삶이란 우리의 의지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쪽으로 결단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칭의함 받고 중생을 통해 노예의지를 벗어나 회복된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의 예정론은 기독교강요 3권에 나오는 구원론의 끝 부분인 21-24장에서 상당히 장구하게 상세하게 언급된다. 이것은 칼빈이 로마서 구조를 따른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뒤를 이어 성경에 근거하여 이중예정(二重豫定)을 설명한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또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되는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문제는 이것을 읽는 독자들이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이해하고 실족하게 되는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예정론을 운명론(運命論)으로 이해할 경우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정론에서 중생인들이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문제가 언급되지 않아 운명론에 빠진 사람들은 실족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견인(堅忍)의 문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쪽으로 결단하고 사는 삶의 태도와 연관된다. 이 문제는 그의 후예들이 보강해주어야만 했다.
정윤석씨는 서사라 목사의 서적을 모두 읽었는지 모르겠다. 서사라 목사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목사는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지옥에 가지 말자고 하는 선교적 의도가 있음을 간과하는 것 같다.
칼빈의 역사적 유산을 지옥불 급행열차로 다 몰아넣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도에 넘치는 비난으로 보인다. 신학이란 계속 비판하고 반성함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이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 66권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만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은 상대적인 것으로 비판을 받고 대안을 제시해야 신학이 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치우친 보수주의적인 자세이다. 이런 신학은 매 시대마다 변하는 정황(情況) 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대답을 할 수 없고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어야 한다.
정윤석씨가 이렇게 함부로 교수들을 모독할 정도로 비방하는 행위는 큰 실례로 보이며 다음 신학포럼에 참여하여 논문을 발표하여 자기 발언에 대해 평가를 받도록 스스로가 압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만일 그의 발언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적인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그의 비판은 학문적이지도 않다. 신학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천박하게 선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단을 논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성경 전체에 대한 지식과 균형있는 신학 지식을 지니어야 실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교회협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태그
'서사라 목사님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기독교신문 (0) | 2021.01.12 |
---|---|
기독교포털뉴스의 정윤석목사의 서사라목사 비판에 대한 문제점-기독교신문 (0) | 2021.01.12 |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서영곤교수 (0) | 2021.01.10 |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서요한교수 (0) | 2021.01.10 |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 저서를 비방한 글에 대한 반박-조상열교수 (0) | 2021.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