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대인과 영성 윤리 단계 ‘특징’-서사라목사

하늘이슬 2024. 6. 25. 14:13

(2째주-1)

대인과 영성 II - 특징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눌 것은 대인과 영성 윤리단계 ‘특징’이 되겠습니다. 윤리단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윤리가 형성되는 시기죠?

윤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사는 인생 이죠. 이런 마음이 인간관계에서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이웃을 함부 로 대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짜 원하는 것은 두 가지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척도를 보고서 알겠다 고 하시죠. 그죠?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그 러셨죠. 그죠?

우리 이웃은 나와 너 사이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윤리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우리 이웃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윤리가 서게 되지요. 이전에 하나님이 없는 본능단계에 있을 때는 나와 너로서 나와 너와의 관계로 끝나고 맙니 다.

그러나 윤리단계에서는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나와 너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니까 인간관계를 내 본능대로 함 부로 행하는 삶을 그만두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다’라고 말하죠. 이 말이 맞을까요? 틀릴까요?

성경의 말씀이니까 정말 맞는 얘기예요.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을 우리가 삶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사는가 하는 것 이 문제지요.

남자가 머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같이 여자 는 남자에게 순종하라” 하시죠.

그 다음에 남자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남자는 여자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죠.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이 문제로 싸웁니다.

“너부터 해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가정의 불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가 먼저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숙한 자가 먼저 하게 되어 있어요.

 

성숙되지 못한 미숙한 자는 몰라서 못해요. 몰라서 못하는 것을 어떡해요? 더 성장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다 보면 그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먼저 하라고 버티고 있으면 결코 그 상황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장한 자가 해야 되는 거예요.

부부간에도 섬기는 자가 성숙한 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미숙한 자예요. 누가 상이 많을까요? 당연히 섬기는 자가 상이 많죠.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먼저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부부는 서로에게 맡겨졌어요. 우리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여자에게는 시부모와의 관계를, 남자에게는 처부모와 처가 식구와의 관계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맡기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하나하나 내려 보내시는데 왜 하필이면 내가 이 집에 시집왔 을까? 왜 나에게는 이런 시누이들이 있을까?

왜 나에게는 이런 장인 장모가 있을까? 왜 나에게는 이런 처남과 처제가 있을까? 이 모 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기쁘게 하는 것이지만 안 되면 억지로라도 자신을 쳐서 복종할 수 있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 자녀를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거예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 뭐예요? 죽도록 충성하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우리가 한번 뿐인 인생을 사는데 나만 위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를 위한 인생을 산다고 광야에 나 혼자만 있어 봐요. 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맺어 주신 것은 그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예수라는 빛을 비추라고 맺어 주신 거예요.

복음을 전파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잖아요.

외치는 방법이 있고, 몸소 실천하는 방법이 있고 하나님이 맺어 주신 인간관계에서 최선 을 다하여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사실은 별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는 하나님, 옆으로는 이웃,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물질을 주시잖아요. 그 물질을 잘 관리 하는 것과 그리고 내 몸을 어떻게 하면 하나 님께 쳐서 복종 시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맡은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와 내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를 서로에게 맡기셨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므로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상대가 보기 싫다고 해서 언제든지 떼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맡겼기 때문에 끝까지 그 관계 속에서 충성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목사님이 “저 사람은 보기 싫다” 그렇다고 끊어 냅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셨거든요. 맡은 자로서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의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친척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단지 우리가 육체 속에 있는 동안에 육체로서 맺어진 인연들이지만 우리가 육체를 복 종시켜 영으로 잘 섬기고 오라고 우리에게 맺어진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 리는 그들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버릴 수 없어요. 내 마음속에서 내쳐도 안 되는 거예요. 왜요? 나에게 맡기셨기 때문에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분이 나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나에게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지요?

뭐냐 하면 정죄하는 마음이에요. 정죄하는 마음이 어디서 오냐 하면 “누가복음7장 39 절에서 48절을 보면, 바리새인 시몬의 얘기와 그 마을에 있는 죄인인 한 여자의 이야 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죄인인 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맞춤 을 멈추지 않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 인 시몬의 마음에는 무엇이 생기냐 하면 그 여자를 정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상대가 잘못해도 우리가 그를 정죄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간음한 여인을 데려다 놓고 “우리가 그를 돌로 쳐서 죽이리이까?” 했을 때 “아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를 돌로 치라” 그랬더니 다 나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정죄할 수 있는가 하면 죄 없는 자가 정죄할 수 있다 는 것이예요.

여러분, 죄가 없습니까?

내 죄만해도 엄청 많은데, 내 죄를 들여다 볼 시간도 없는데 우리는 눈만 뜨면 남의 죄만 생각하고 남의 죄만 보고 사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우리 인간의 본성이 나빠요.

눈만 뜨면 남의 잘못만 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영성훈련 받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제는 남의 잘못은 보지 말고 스스로의 잘못을 보자는 거예요. 하나님은 남이 잘되기를 원하지 않고 내가 잘되기를 원하거든요. 그럼 내 잘못을 봐야죠. 아멘입니까?

남을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분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어요. 정죄하는 마음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뜻에도 전혀 맞지 않는, 나 스스로가 죄를 짓는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는 것이죠?

그래서 이 바리새인 시몬을 보면 죄인인 그 여자를 보고 정죄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요. 정죄하는 마음이 왜 생겼는지 봅시다.

정죄라는 것은 ‘죄를 정한다’는 것인데 ‘저 여자는 죄인이야’

이런 마음이 왜 생깁니까?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시비, 옳고 그름’ 우리는 항상 ‘옳고 그름’에 빠져 있죠.

우리가 ‘옳고 그름’에 빠져 있으면 늘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이 생겨요.

‘저것은 옳다’, ‘저것은 그르다’ 이렇게 ‘옳고 그름’에 빠져 있으면 사람을 사랑할 수 가 없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 리는 시비를 가리지 말아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 하면요.

노아가 농사가 잘되어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하여 하체를 벗고 자고 있었어요. 그 때 아들 함이 들어가서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고 나와서 샘과 야벳에게 수군거린 거 예요. 잘못된 것을 말한 거예요.

“아버지가 하체를 벗고 위신도 없이 자고 있더라. 아버지답지 못하게 말이야” 그 때 함의 얘기를 들은 셈과 야벳이 어떻게 합니까?

겉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고 그 허물을 감추어 주죠. 노아가 깨어났을 때 노아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을 저주하십니다.

“너는 저주를 받아 네 형제의 종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저주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시비를 가리는 마음과 남의 허물을 놓고 우리가 수군거림을 얼마나 싫어하 시는지를 노아를 통해서 보여 주신 거예요.

노아의 입을 통해서 저주받은 함은 가나안의 아비가 되었어요. 나중에 가나안을 다 쳐부수잖아요.

그 다음에 셈과 야벳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풀렸잖아요.

 

이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자매를 정죄할 권한을 주신 적이 없습니 다.

“당신은 잘못하고 있다.” “당신은 죄인이다.”라고 말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 어요. 왜요? 우리는 다 죄인이거든요.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만 정죄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정죄하는 마음이 내 마음 안에 일어난다면 벌써 나는 넘어지고 있다 는 증거입니다. 누구 처럼요? 바리새인 시몬 처럼요.

우리가 얘기하는 사랑은 오래참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며 온유 하며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것인데, 우리가 시몬처럼 정죄한다면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전혀 못하지요.

정죄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그를 참아내며 바라고 믿고 소망하며 성내지 아니하 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를 참아 주겠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인간관계속에서 하루속히 시비를 가리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해요. 아멘.

정죄하는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시비를 가리고 정죄하며 삽니까?

제가 영성훈련 받은 지 10년이 넘었는데요, 제가 영성훈련을 받기 전에는 눈만 뜨면 정죄했어요. 남이 잘못하는 것만 보이는 거예요.

‘이 사람은 저게 문제이고, 저 사람은 저게 문제이고 말이야’ 그러면서 제가 제일 잘 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영성훈련에 들어 와서 듣고 또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니까 이제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보다도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면 도와 줄까?’

‘어떻게든 더 기다려 줘야지’, ‘참아줘야지’, ‘어떻게 인도해 줘야 할까?’ 이런 마음만 생기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아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뭔지 아세요? 실상 우리는 눈만 뜨면 인간관계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 니다. 아멘입니까?

광야에 홀로 내버려두면 거기서 무슨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습니까? 할렐루야! 인간관계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곳이 우리가 일할 자리이고 우리가 상급 받을 자리이며,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자리

 

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올바로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고 훈련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하게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양육하고 훈련하는 훈련장은 우리에게 펼쳐 주신 우리의 삶이 그분이 우리를 양육하시고 훈련하시는 장이란 것입니다.

이 삶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일어나잖아요? 이 삶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때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더 성장시키기 위해 사람이 보기에 망하게도 하십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왜 망했지?” “내가 교회에 헌금을 더 많이 냈는데 왜 망 했지?” “내가 선교헌금도 더 많이 했는데 왜 망했냐구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엔 좋은 거예요. 하나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 달라요. 그 사람은 망해야 하나님을 더 찾아요.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레벨에 계시는 분이 아니예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훨씬 높은 거예요. 아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다 이해하고 알겠습니까?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펼쳐 주신 그 삶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조 금 알아 갈 뿐이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분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할렐루 야!

모든 경륜과 섭리 속에서요.

“아휴, 내가 왜 저 철천지 원수를 만났지? 하나님이 그 인간 안 만나게 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런데 그 철천지 원수를 만난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원수를 내 앞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이 뭘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 목적이 그를 사랑하라고 두신 거예요.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고 기도해주라” “사랑해라” “겉옷을 벗어 달라 하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줘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되기까지 내 앞에 원수를 두시는 거예요.

 

원수가 없으면 자라지를 못하잖아요.

내가 할 생각도 못하잖아요.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도 못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때에 맞춰 원수를 붙이십니다.

“그 동안 편안했는데 또 나타났네”

왜냐 구요? 높아진 마음을 낮추시려고요. 다시 겸손케 하시려고요. 어떤 여자 집사님인데 그분은 10년 동안 결혼생활이 괴로웠어요. 자기는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 거예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10년 동안 늘 불행했어요.

그런데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깨닫게 된 것은 그 사랑을 받고자 한 것이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남편의 사랑을 얻으 면 내가 행복하겠지’ 이런 마음으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 거예요.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한 것이 아닌데 자기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은 부부간의 사랑도 이기적인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부부사이에 개입되면 내가 나를 위해서 상 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충성하라고 맡겨 주신 가장 가까운 그를 섬기고 사랑하는 거예요. 그것이 다른 거예요.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것 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지체이므로 사랑하는 것 하고는 너무 다른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위해서 상대를 사랑한다면 서로가 안 맞으면 언제든지 버릴수 있 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맡기셨다 생각하면 여러분이 혹여라도 상대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헤어 질 생각을 하겠습니까? 못하지요.

부부가 살다가 헤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헤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한 몸 이라고 했어요. 아멘

그래서 여러분이나 저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가장 가까운 자들을 훈련 파트너로 붙이십니다.

이 파트너가 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부모와 자식, 부 부간에 파트너로 붙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이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버지와 아들이 불화하게 하려고 왔다. 그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

여러분, 집안 식구를 왜 원수로 주실까요?

그들을 밀어내라구요? 마음속에서 내팽개치라구요?

그게 아니죠.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훈련되고 양육되어져서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

 

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하게 이르게 하려고 그들을 우리 곁에 두신다는 거예요. 불화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아멘입니까?

여러분, 이 계획이 너무 멋지지 않으세요?

우리 육체는 사실 너무 아프죠. 생각을 해보세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화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육체는 괴롭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있더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빨리 굴복되고 순종하면 그 어려움이 빨리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거나 알아차려도 무시하게 되면 그 관계는 계속 불화하 고 깨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직장에서 이 사람과 불화했는데 내가 양보해서 화해가 되었어요. 근데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 붙이십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는 정말 모난 사람들이거든요. 모난 부위 하나하나를 각 사람이 다르게 건드립니 다. 그걸 다 깎아내야 하니까 힘들죠.

이번엔 이 사람을 붙여서 깎아내고, 다음번엔 저 사람 붙여서 깎아내고..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다듬어 가시는 과정이란 것입니다.

저도 직장생활 했었거든요. 골고루 붙이시더라구요.

그것을 제가 통과했어요. 교회 안에서도 붙이세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 성훈련 하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도를 즉각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 내가 굴복되어야지’. 내가 삿대질 하고 싸울 수 없잖아요.

근데 내가 아파요. 자존심 상해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도 꾸욱 참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납작 엎드려서 지내니까 내가 높아지고 싶어 높아지는 것이 아닌데 하 나님이 높여 주시더라구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거든요.

여러분, 이 세상에는 누가 승자예요? 진실한 사람들이예요.

포장하고 위장하고 그런 자가 아니예요. 진실한 자는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게 되어 있어요. 좀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여러분, 하나님도 그 마음이 진실한 자에 대해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 마 음이 정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끝까지 승리하는 자는 진실한 자예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한 자요.

소문은 나쁘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이 너무 많거든 요. 그 소문 하나하나 신경 쓰면 일을 못해요.

“개들아, 짖어라. 나는 간다” 이래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관계속에서 파트너가 붙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속에서 어떤 일이 터질 때 여러분의 모습을 보잖아요?

내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요. 하나님께서 나의 이 모습을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육신을 가진 존재이고 내 육신이 외부와 접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고 들리고 하죠. 그 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대로 반응하지 말고 무엇을 쫒아가며 살라고요? 영의 생각 을 쫒아서 살라는 거예요.

여러분, 영의 생각은 반드시 육신의 생각 뒤에 오게 되어 있어요. 할렐루야! 영의 생각은 늦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차례가 그렇거든요.

우리 바깥의 환경은 육신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왜요? 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육신이거든요.

육신의 반응이 먼저 올라오고 그 다음에 영이 반응하거든요.

그럼 우리는 무엇을 좇아가야 하겠습니까? 영의 생각을 좇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우리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살면 육신대로 사는 삶이거든요.

“너희가 빚진 자로되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러셨어요.

우리가 육신대로 사는 모든 것이 사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육신이 먼저 반응해서 육신대로 살고 있거든요. 이게 문제잖아요.

이것을 모르고 산다는 자체가 문제예요. 내가 지금 반응하는 것이 영인지, 육신인지도 모르고 산다는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지 아세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한다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고 있거든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니 평생 사단의 종으로 사는 거예요.

사단은 뭐라고 그래요? “네 육신대로 살아라. 네 마음 끌리는 대로 살아라” “네 본능대로 살아라”

본능대로 사는 삶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시는지 알아야 돼요.

내가 너희를 살려 줬는데 아담과 하와 이후에 너희가 육체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가 와서 너희 영을 깨워 놓았고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자가 되었는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으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불구하 고 이전 것을 택해서 우리가 사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시겠어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잖아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 자체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체로 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육신으로 살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기다린대요. 하나님 오셔서 상주실거래요. 육신의 생각은 모든 것이 사망이라고 하셨어요.

육신으로 행하는 모든 삶이 사망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영을 좇아서 산 삶 만큼만 천국에 가서 내가 찾아 먹는 거예요. 그것 만큼만 나에게 상이에요.

영의 생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밝혀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물어야 됩니다.

다윗은 계속 하나님께 물었어요.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하고요. 하나님께 묻는 삶은 우리 하나님을 나의 주인 삼은 자리에 모시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내가 다 선택하고, 내가 다 결정하고 내 가 다 해버리잖아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묻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왜요? 내가 주인의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거든요.

내가 그 음성을 듣든지, 못 듣든지.

내가 음성을 못 듣는다 해도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여러분이 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부터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대답해 주십니다.

당장 대답이 오지 않더라도, 꿈으로도 말씀하시고, 환상으로도 말씀하시고, 말씀을 들 을 때도 말씀하시고, 내가 기다리고만 있으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답을 주십니다. 아멘 입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으로 반응하는 존재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 더 하고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요. 그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자아 때문이예요. 내 자아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를 못해요.

그래서 여러분, 인간관계속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우리가 알아차려야 해요. 하나님께서 내 안의 자아를 내려놓게 하기 위해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아야 해요. 인간관계속에서 문제가 터지잖아요?

왜 그 문제가 터졌는가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이 때 내 안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내가 왜 화가 나지?” “왜 분노가 올라오지?”

예를 들어서 무시당한 것 때문에 내 안에서 분노가 올라 왔다면,

내 안을 들여다보면 “내가 얼마만큼 대접받아야 해”라는 마음이 있어요. 여러분,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성경에서 진리일까요? 아닐까요?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은 진리가 아니예요.

우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게 없어요. 성경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고 했기 때문에 나는 섬기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이 마음 처리하시기 위해서 무시당하게 하시는 거예요. 콱콱 밟히게 하세요. 이 마음을 들어내실려고요.

내 마음 안에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무시당하게 하 셔요. 이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겠습니 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지, 섬김을 받으려고

한 것 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주님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씀드려야 합니 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모든 인간관계를 감사하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그 모든 인간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분노를 일으킨 파트너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그 파트 너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요? 나를 위해서 쓰임 받았으니까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를 사용했으니까요. 할렐루야!

여러분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나면 그가 미워지지 않아요.

왜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를 사용하고 있고 지금도 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요.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제가 바꿔지겠습니다. 제가 그에게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섬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바뀌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하게 이르길 원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을 우리 삶에서 행하고 계시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오늘도 일어나고 내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그 속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처음에는 잘 안될 수 있어요. 의인은 안 넘어지는 자가 아니예요.

일곱 번 넘어졌다가 여덟 번째는 똑바로 서서 가는 자예요. 할렐루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아멘

여러분이 인간관계속에서 그 파트너의 개념을 이해하시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 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