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영성1- 하나님의 마음으로1
윤리단계 훈련에 대해서 본다.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내가 가지고 싶어서 가지는 게 아니다.
거기에 굴복되지 않고 인정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질 수 없다.
그 속에서 잘 만들어지면 된다.
잘 만들어지려고 할 때 죽어야 한다. 힘이 빠져야 한다.
그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 섬길 수 있을까 해야 한다.
내가 바꾸겠다고 뛰쳐나오면 하나님의 경륜이 이상하게 끝나고 만다.
우리가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합당화시키려고 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생긴다.
만약이 이 인간관계가 끝나버리면 다른 인간관계를 맺으면 되자. 그렇지만 그게 아니다.
그런 분들은 평생 그러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 내가 불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그 인간관계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할 수가 없다.
왜냐 하나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왜 저 사람이 이렇게 안 바뀌나? 누가 하고 계시다고요? 하나님이 하고 계신 것이다.
왜?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이 많이 바뀌면 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손에 있지만 우리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분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인간관계를 원망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사실은 감사해야 한다.
왜냐 나를 진리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나의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늘도 펼치시며 내일도 펼치실 것이고 과거에도 펼치셨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다.
나에게 있는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다.
파트너 된 분들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가기까지.
이게 대인관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적인 관계이다. 생명적인 인간관계이다.
생명적인 인간관계란 우리에게 붙여진 파트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적인 인간관계이다. 이 사랑이 누구로부터 나가는 것인가?
나로부터 나가는 것은 제한적이고 인색한 것이지만 내가 그분들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것, 그렇게 되기까지 그들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나를 주는 게 아니라 나를 주는 것은 육신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주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킨다.
그럼 내가 하나님을 주기까지 통과되면 어떻게 되는가?
파트너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동역자로 변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이것이 과정이다.
주님은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희들에게 먼저 검을 준다고 했다.
검을 주는 이유가 뭐냐? 정말 화평을 주시려고, 검을 먼저 주셔서 불화하게 한 다음에 정말 우리가 사람이 만들어져서 주님의 이름으로 화평케 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먼저 검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가 거기에 굴복되면 우리는 정말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는 생명의 길로 가는 그런 승리의 길로 가게 된다.
여러분이나 저나 이 길을 반드시 가야 된다.
하나님이 이 길을 가게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만드시는 것이다.
결국은 그 길을 가게하기 위해서이다.
정해져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안가니까 문제이다. 얻어 터지고. 쥐어 박히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람에게 행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향해야 인간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이다.
사람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한다.
인간관계 훈련의 첫째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관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늘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했고 그 사람 행동이 어떻고 그 사람행동이 틀렸고 ...이것이 우리 육신이 하는 일이다.
뭘 생각한다고요? 남의 허물 잘못 이런 것들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 육신이다.
성경은 육신을 거절하고 영의 생각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인간관계속에서 내가 자꾸만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그 인간관계가 제대로 될 리가 앖다.
늘 너와 나 사이에는 누가 있다고요? 하나님!!!
너와 나 사이에 크신 하나님이 있다. 너와 나는 미물이다. 조그맣다.
그러나 그 사이에 크신 하나님이 계시다.
조그마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크신 하나님께 잘 해야 한다.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이 우선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뭐가 보이냐면 사람보다 하나님이 먼저 보인다.
이게 자꾸 훈련되어진다.
내가 그 사람이 어떻게 하고 한 것이 우리는 육신이기에 먼저 반응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작용하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육신이, 육신의 생각이 사르르 들어간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너와 나 사이에는 구가 계사다? 하나님이다.
이웃에게 하는 것이 누구에게 하는 것이라고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기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내 멋대로 치받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관계를 가지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25:40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한 것에 대하여 본인에게 한 것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란 우리 모두가 지극히 작은 자이다.
내 이웃은 전부다 나에게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이다.
길가에 다니는 거지만 지극히 작은 자가 아니다.
그러나 내 삶에 있어서 모든 자가 나에게 오는 모든 자가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모든 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저 같은 경우에 시어머니 시누이가 지극히 작은 자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한 것이 누구에게 한 것이 되는가? 하나님께 한 것이다.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지극히 작은자 중에 하나이다.
그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다.
내가 인간관계하는 모든 자를 뭐로 여겨야 하는가? 지극히 작은자로 여겨야 한다.
그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인간관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냐면 내 남편이기 때문에,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뭐이기 때문에 내가 뭘 한다는 게 아니다.
이거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사랑하는 거니까 하는 것이지만 개념을 바꾸어서 인식을 바꾸어서 내 남편이라서 하는게 아니고 내 자녀라서 하는게 아니고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이기 때문에 주께 하듯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주께 하듯이 해야 한다. 그래야 상급이 있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안의 목적과 동기가 잘못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려고 하면 내 남편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해서 하면 지극히 작은자 중에 하나로 내가 주께 하듯 해야 주님이 받으시고 거기에 대한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은 마귀적이다.
하나님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자식과 부모간의 정, 정이라는 게 있다.
부모는 정 때문에 무조건 자식에게 다 준다.
이런 것은 상이 없다.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부모님을 보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다 주지도 않는다.
왜? 다 주면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맡겼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돌아가실 때에도 얼마는 구제하는 곳에 얼마는 필요한데 나머지는 자식에 나눠주는 것을 본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식이 돌아가는 자하고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하고 삶이 너무 틀린 것이다.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내 새끼 때문에 한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한 영혼 한 영혼을 맡겼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개네들을 생각할 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내 몸을 통해서 낳게 했지만 나에게 저 귀한 영혼을 맡겼구나 생각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남편을 볼 때 먼저 누구를 생각한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다.
시댁을 생각할 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먹으나 마시나 그들을 대하는 것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틀린 점이 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사람이 무섭지 않다.
내가 사람을 무서워한다면 내가 아직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소리를 그렇게 크게 듣지 마세요.
오히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첫번째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나의 존재 이유가 그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 목적이 그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저렇게 살아서 되나? 그리고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밀치려고 하고 비판이 생기고 우린 그런 것을 본다.
우리의 존재 인유는 그를 안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그들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럼 나에게 일어나는 인간관계속에서 나의 존재의 목적이 뭐라고요? 그들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존재하게 하시는 존재의 이유가 그들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섬겨야 한다.
엡5:22-26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했지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라고 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렇게 안하면 고난이 온다.
고난이 오는 이유가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기 때문이다.
그걸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많은 고난을 일으키신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났다고 고개 쳐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계속 고난을 보내실 수밖에 없으시다.
어떻게 하기까지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 까지.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내가 먼저 수그러져서 만들어지면 남편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주님을 위해서, 두 번째는 그들을 영혼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세 번째는 사람을 대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을 보라
이것이 가능한 얘기가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훈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 사람안에 있는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을 보도록 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를 사랑하는 주님은 내 안에도 계시지만 지금 나에게 못되게 굴고 있는 저분 안에도 있는 것이다.
근데 그 사람은 단지 자기 옛사람으로 살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 안에 계신 것이다. 그 분을 보라는 것이다.
근데 그분은 뭘 보고 있는가?
그 사람은 육신으로 해 대는데 그분은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 하는가? 영으로 하는가를 보고 계신 것이다.
그 사람안에 있는 그분이 내안에 있는 그 분인데 지금 나에게 해대고 있는 육신으로 해대는 그것을 보지 말고 그 안에 계신 주님이 날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님은 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안에서 한탄하고 계실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행하는 것을 보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뭐라고 얘기를 하든 “아하 그 사람은 아직 옛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보면서 나를 보고 “나도 저렇지” 해야 한다.
그 사람의 행위만을 가지고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주님을 보는 훈련을 자꾸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주님을 그 사람을 한탄하고 계시고 그리고 그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부단히 노력하고 계신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불쌍히 여겨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갖게 된다.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도 아픈 것이다.
불쌍히 여겨지고 그렇게 보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도 별로 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훈련이라는 것이다.
그가 아직 변하지 않는 이유가 나 때문인 것이다.
상대방이 안 변하는 이유가 아직도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환경이 주어졌다 그러면 이 환경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라.
그러면 나의 부족한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아하 하나님은 지금 이거 다루시려고 이런 인간관계와 환경을 허락하셨구나!
그게 보여지기 시작한다.
나의 부족한 그것을 더 잘하려고 더 메꾸려고 나는 거기를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도 하나님이 그걸 요구하시기 위해서 이런 환경을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라고 깨달아진다 말입니다.
나는 됐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안 된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어떤 환경이 펼쳐졌을 때 그것을 묵상하라. 왜 나에게 왔을까?
그 다음에 위장된 평화에 속지마라.
깊은 의미가 있다.
내가 육신적으로 잘되고 또 재물도 별로 부족한 게 없고 건강하고 교회 직분 받아서 잘 다니고 이레 저레 잘된다면 진짜 잘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적인 편안함이 내가 잘되고 있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위장된 평화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가운데 빚으시길 원하시고 오히려 내 육신이 괴롭고 좀 안된다 할지라도 오히려 내 영이 진주처럼 영롱하게 깍이고 닦아지는 것이 잘되 있는 건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아무 걱정없고 편하고 내가 기쁘고 남편이 나에게 잘해주고 이러면 나는 잘되고 있는 거다?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고난속에 있는 자가 잘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고난을 통해서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고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었다 라고 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바로 행하나이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편안함, 육신적인 행복, 그런 것들이 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잘되고 있는 것은 차라리 내가 고난의 풀무속에 있을 때가 내가 잘되고 있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눈이 멀었고 헐벗었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는 것은 그 영혼이 파리해지고 전혀 힘을 못쓰고 시들시들 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육신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추구하고 달려갈 길이 뭐냐 하면 주님의 길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길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늘 낮은 데였고 대접 못 받았고 힘들었고 머리 둘 데가 없었고 그러면서 그 안에 하나님 때문에 기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 모든 생명을 걸었고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자가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 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했던 것을 보면 결코 그는 육신적으로 행복하고 따뜻했고 그런 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장차 그분이 받은 영광에 들어가려면 우리도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생의 고난이 없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난을 주신 하나님, 고난의 풀무불에 넣고 있다면 그 정도의 사랑이 하나님은 엄청난 사랑을 나에게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 없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거꾸로 잘 생각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원한다. 이것도 훈련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주여 할렐루야! 나는 주님이 주신 힘으로 능력으로 해 낼 수 있습니다. 해야 한다.
그 힘이 죽는 힘이다. 죽으라는 것이다.
죽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내가 없어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길 축원한다.
소유의식을 버리라.
우리가 인간관계속에서 우리가 진짜 유의해야 될 것은 소유의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소유의식리라는 것은 뭐냐?
내 남편, 내 자녀,
남편이 내 것이다. 자녀도 내 것이다.
이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내 것이라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안되면 주장이 있으니까 맨날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사망의 삶이다.
내 소유의식을 가정에서부터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있다? 없다? 없다.
내 자녀도 내게 아니다. 내 남편도 내게 아니다.
주장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자식이 내 한 몸으로 느껴지는가?
남편이 내 한 몸으로 느껴지는가?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따로 떨어진 한 영혼이다.
물론 남편도 한 영혼이지만 성경에서 말하기를 남편이 나와 같이 한 몸이고 자녀는 딴 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남편은 쓸모가 없으니까 버려도 되구요, 우리 자식은 절대 버리면 안된다고 한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남편이 한 몸이다. 자녀가 한 몸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동물과 같은 삶 그런 삶이 된다.
정이라는 마귀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패하는 경우가 많다.
자식보다 남편이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살라.
그렇게 안사니까 고난이 온다.
남편이 한 몸이면 헤어질 수 있는가? 없다.
청년들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는가? 말씀이다.
하나님은 부부 관계 속에서 주장하는 관계가 아니라 남편이 내가 바라는 남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남편이 바라는 아내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
남편이 자라는 아내가 먼저 되자.
자기만을 위해주길 원한다. 살을 빼라는 것,...
우리가 내가 바라는 남편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바꿔져서 내 남편이 바라는 아내가 되어보자 이렇게 바꿔보자.
이게 섬기는 것이다.
남편을 기쁘게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걸러내고 성령을 통과시켜야 한다.
약1:19-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고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화를 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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