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Ⅱ. 물질과 영성 고난의 의미 넷째주(4-2)

하늘이슬 2018. 11. 29. 16:29

. 물질과 영성

 

11. 고난의 의미 넷째주(4-2)

 

 

오늘 제가 여러분과 볼 것은 영혼과 영성 제 3단계 진리 단계 들어왔습니다. 영혼과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제3단계가 진리단계지요.

영혼과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지요. 그죠.

나의 진짜 나는 영혼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 육체를 벗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선다고 그랬어요.

우리 육체는 다 벗게 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설 텐데 내 영혼, 이 안에 있는 그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영혼과 영성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진리단계 하면 여러분, 진리가 누구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또 예수님이 진리시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 내가 진리라고 그랬어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진리, 영혼과 영성 제 3단계 진리라고 하는 것은 내 삶이 진리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얘기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에 억지로라도 내가 따라가는 것을 얘기해요.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냐면 여러분이 처음으로 이 영성훈련에 들어왔을 때는 우리가 영이 있고 육이 있잖아요. 그 포션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 영이 20%, 육이 강해가지고 80% 내가 하루를 살면서도 육으로 행하는 것이 80%, 영으로 행하는 것이 20% 이런 포션으로 왔는데 진리단계에 가면 이게 영이 육보다 강해집니다. 50%를 넘어서는 단계가 진리단계지요.

영이 강해지는 거에요.

영이 주체가 되어서 내가 삶을 살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영이 주체가 되어져서 삶을 살기 시작하는 단계가 진리 단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는지 아예 원수라고 못 박아놨어요. 육으로 사는 것이. 그러니까 육으로 산다는 게 뭐에요? 내 마음대로 산다는 거죠.

지금 나에게 고난이 와 있는 이유가 뭡니까? 나를 영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나를 영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지금 나에게 육체의 고난이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육체가 고난을 당하므로 해서 영이 깨닫게 되어 있어요. 영이 자라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나에게 육체의 고난이 와 있는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해야 되요. 감사해야 될 문제에요.

왜냐하면 고난이 아니면 내가 자랄 수가 없거든요.

내 영이 자라는 것은 내 육체에 고난이 올 때 자랍니다.

그러니까 내 육체가 고난을 당하는 그것이 육체가 필요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물론 의의 병기로 쓰는 것이 육체를 주신 이유인데 그러나 내 영이 자라기 위해서는 내 육체가 고달파야 되요. 내 육체가 희생해야 되요. 내 육체가 댓가를 치러야 되요. 그래야 영이 자라거든요.

요한복음 663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63다같이 시작!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영이고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육은 무익하다 그랬어요.

그런데 무익한 육을 우리는 붙들고 살잖아요.

그게 하나님과 원수되는 삶이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빨리 내 육을 위해서 사는 모습들을 내려놔야 될 줄 믿습니다.

다 육체에요. 육신이에요. 요약을 하면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은 뭡니까? 육신입니다. 나를 위한 모든 것들.

여러분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이게 육신이라는 거거든요.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그랬어요.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이 뭘까요?

편안하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이게 다 육신입니다. 잘 보셔요.

~ 그게 어떻게 육신이에요?’ 그런데 육신이에요.

내가 편안하고 싶고 잘 먹고 잘 입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이게 다 육신이에요.

그러면 영은 뭐냐? 영의 사람들은 오히려 편안하고 행복한 거 보다도 우리는 어떻게 해요? 내가 좀 덜 행복하고 덜 편안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나이다이게 영의 사람이에요. 할렐루야!

우리를 그렇게 변하라는 거에요.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아세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다 이룬다 그랬잖아요. 여호와의 열심이 특심이라는 거에요.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특심이라는 거에요.

그만큼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걸 원하신다는 거에요.

영의 사람으로 살기를.

그러니까 내가 푹 퍼져갖고 내가 편한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가 행복하면 되고 이게 다 육신이라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거에요.

깨어 있으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거기서 깨어나라는 거에요.

육신에 젖어있는 육신을 행복하게 하고 육신을 편안하게 하고자하는 그 육신적인 삶에서 깨어나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내가 행복하고 내가 편안하고 이런 게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육신적으로는 좀 불편하고 육신적으로 내가 좀 불행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져가는 것을 감사해야 되요. 아멘.

그게 이제 진리로 들어가는 자의 모습이죠.

진리가 뭔데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아가 안 죽으려고 빠닥빠닥 하잖아요.

여러분 잘 보세요. 객관적으로 나를 잘 볼 수 있어야 되요.

너무 주관적으로 빠져 있으면 내가 불쌍해. 나만 왜 이런 일을 당해야 돼?

이게 주관적으로 빠져 있는 거에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겨야만 되느냐? 이거에요. 아니요. 많은 사람들이 다 동일한 모습은 다 다르지만 그 정도가 비슷비슷해요. ? 우리가 깨져야하기 때문에요.

우리가 그냥 깨집니까?

한 사람에게는 질병의 모습으로, 한 사람에게는 남편을 통해서, 한 사람은 시집 식구들을 통해서, 또 한 사람은 자녀를 통해서. 다 다르잖아요. 각 집안의 우환과 고민이 다 다르잖아요. 그러나 그 정도의 크기는 비슷비슷해요.

어떻게 나만 이 고통을... 그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더 못되었나보다. 그런데 다 비슷비슷해요. 받는 이 고난들을 보면. 나만 당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속에서 정말 봐야 될 것이 뭐냐?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놓고 볼 수 있어야 되요. 아 지금 하나님이 예를 들어서 나에게 이런 문제를 허락하셨다. 이걸 떼어 놓고 볼 수 있어야 되요. 떼어 놓고.

아 그러면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은 뭘 하기를 원하시는가? ‘~ 내가 죽기를 원하시는 구나!’

왜냐구요? 그 환경은 누가 만드신 거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환경을 내가 아니라고 뛰쳐나갈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면 그 환경을 좀 이렇게 좀 객관적으로 미뤄놓고 ~ 거기서 내가 죽으라는 거구나!’ 그걸 깨달아야죠.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부딪쳐 보면 여러분들 알다시피 자아가 빠닥빠닥 올라오잖아요. 그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자아를 붙들고 살아야 될까요? 아니면 팍 이거 내려놔버리자. 밟아버리자 그냥. 나는 없다. 나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그 올라오는 자아를 붙들고 그래 나는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살아야 돼?’ 이걸 붙들고 살아야 되겠어요? 아니면 야 너는 그렇게 당해도 싸! 야 더 들어가. 너 성숙하고 성장하려면 너 거기서 죽어야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뭔데?’ 이렇게 생각해야 되겠어요?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어요?

빠닥빠닥 올라오는 자아를 붙들고 살아야 될까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정신을 차리고 나를 이렇게 제압할 수 있는 자, 딱 들어가게끔 그런 자가 훈련되어지고 더 성숙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이 육신이라고 그랬어요.

아직도 죽기 싫어서 빠닥빠닥 올라오는 나, 그렇죠. 왜 내가 덜 행복해야 되냐 이거야. 내가 왜 자유를 침범당해야 되냐 이거야.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냐 이거야. 이게 다 육신이라는 거죠. 이게 다 하나님과 원수된다 그랬어요.

,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사람들이 오고 가잖아요.

길게 갖다 붙여 놓은 자가 있고 짧게 붙여 놓은 자가 있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하고 계신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 상태에서 나에게 붙어있다. 그러면 거기서 뭐하라는 거에요? 그들에게 충성하라는 거에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우실 때가 있습니다. 언제요? 내가 통과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이 다 만들어지니까 사울을 전장에서 죽게 만들었어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통과하면 그것이 치워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런데 우리가 통과하지를 못하니까 계속 붙여 놓는 거에요.

우리가 그 상황이 싫다고 그래서 벗어난다. 그럼 또 다른 게 온다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 하나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 하나를 통과하기까지 안 넘어가요. 그 다음 거를요.

그러면 그 상황 속에서 통과하자. 할렐루야! 감사하고 아멘.

그게 맞는 정답이에요.

여러분이 그거 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다음에는 그거 지금 안 죽었는데 그거 죽이려고 붙여놨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 다 마찬가지요. 남편도 붙어 있고, 자녀도 붙어 있고 다 붙어 있어요.

그럼 붙여놨는데 거기서 내가 안 죽으면 다른 거 또 만나게요. 아니잖아요.

바로 나에게 현재 상태에 붙여놓은 그 자리에서 통과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위한 모든 것들, 내가 지금 내가 진리로 살아드리지 못하는 이유 육신의 것들은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은 육신이라고 그랬잖아요. 나를 위한 것들을 버리면 되요. 내가 행복해지지 않으려고 하면 되요. 내가 편안해지지 않으려고 하면 되요. 좀 덜 편안하면 되요. 덜 행복하면 돼. 그냥.

원래 그걸 원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하나님은 상대방을 보는 게 아니라 누굴 본다고 그랬어요? 나를 사랑한다는 거에요. 나를 사랑해서 지금 그 고난이 와 있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 속에서 잘 만들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0장을 한 번 보죠.

마태복음 20을 보면 다는 못 읽고요 거기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그런데 이 포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계속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한다. 포도원에 안 들어가고 계속해서 바깥에서 놀고 섰다 그게 누구입니까? 계속 바깥에서 놀고 선 사람이 나를 위해서 인생을 사는 자들이에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안 하려고 그래.

포도원에 들어가면 어때요? 햇빛이 쨍쨍 쬐고 괴롭지요. 그런데 바깥에 놀고 선 사람은요? 내 편한대로 사는 거야 나를 위해서 사는 삶.

그런데 주님은요? 그러면 삯을 안 주는 거야. 상도 없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 놀고 선 사람들, 육신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삯도 안 주고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내가 영으로 살고자 내가 좀 덜 행복하고 덜 편안하고 내 시간이 없고 자유가 없다할지라도 내가 영으로 살고자 해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는 자들, 하나님이 그걸 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영으로 살기를 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편 9012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게 뭔 말입니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우리가 오래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거죠. 그 오래 사는 인생이 아닌 인생 속에서 늘 우리 앞에는 영혼들이 왔다 갔다 한다는 거죠. 그런데 오랫동안 붙여져 있는 자도 있고 그다음에 짧게 붙여져 있는 자도 있고 그러나 그게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이셔서 그 속에서 우리가 섬기고 하늘나라에 상을 쌓기를 원하고 내가 죽기를 원하고 그런 인생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짜여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벗으려고 한다면 안된다는 거죠.

우리 인생의 수는 정해져 있어요.

그들이 우리에게 붙어있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 놓으신 동안 그 영혼들을 주의 이름으로 잘 섬기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다음에 시편 9010 보겠습니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제가 저기 참 은혜를 받았어요. 믿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런 태도구나.

뭐냐면 우리 광주에 이00목사님이라고 계세요.

원래 여기 와서 제가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사모님이 유방암에 걸리신 거에요.

처음에 발견될 때가 그 때가 2기인가 그랬어요. 그분이 4년 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대개 이제 암에 걸려서 5년을 넘으면 괜찮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5년을 못 넘기시고 4년 만에 가셨어요.

그런데 이 사모님이 영적으로 깨어 계신 분이라서 자기가 4년 만에 갈 것도 일기장에 다 써 놨대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거든요.

그런데 암에 걸려 빼빼 마른 상황 속에서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이 목사님이 찾아가서 목사님이 지금 57인가 그래요. 그럼 아직 젊잖아요. 그 부인이 53-54세밖에 안되었어요. 그런데 이제 찾아가서 손을 꼭 붙잡고 그랬다는 거에요. ‘나는 네가 참 부럽다. 정말로!’ 인생은 금방 뭐라고 그랬어요? 슬픔과 수고뿐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냐면 나이가 56세 된 목사님이 나이가 53세 된 사모님을 붙들고 나는 네가 참 부럽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활짝 웃더라는 거에요. 무슨 얘기하는지 알죠? 그게 믿음인 거 같아요.

정말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인 거 같아요.

그런데 그분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나는 네가 참 부럽다. 정말로!’

그러니까 이 목사님은 내가 지금 여기에 사는 것은(사실 부인이랑 같이 가고 싶은 거죠.) 오직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에요. 그분은.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참 믿음의 문제에요.

제가 그 미주 성산교회 신성종목사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지금 한국 가 계신 것 같은데 은퇴하시고 나이가 74-75세 되신 거 같아요. 그분이 또 간증을 하셨어요.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자기가 여기서 목회하거나 그럴 때는 간증을 안했대요. 그런데 이제 해야 될 거 같아서 한 대요. 지금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나간대요. 인도인가 인도네시아인가? 그런데 그분이 하는 얘기가 자기가 지옥과 천국을 보면서 자기가 어떤 생각을 했냐면 ~ 내가 죽는 것이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현관문을 통과하는 거구나!’ 그렇게 느껴지더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러분 죽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고 그런데 죽는 그 자체가 우리 믿는 자에게는 영으로 살고자 노력한 자에게는 현관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는 거에요.

또 하나는 이미 말이 나온 김에 더 합시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요 휴거가 일어나면 그리스도인들이 십분의 일만 휴거가 된대요.

10퍼센트만요. 그러면 이 온 지구상에는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자의 수가 15억 정도거든요. 70억 중에서 20억이거든요. 그럼 그 자들이 진짜 예수를 믿냐? 그 중에서 진짜 믿는 사람은 5억 그럼 5억에서 십분의 일이면 얼마입니까? 5천만명. 5천만명 중에 여러분이 들어가야 되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럼 내가 오늘 삶을 살면서 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될까? 안해야 될까?

나에게 붙여진 영혼을 내가 섬기려고 해야 될까? 안해야 될까?

무슨 얘기 하는지 알죠? 우리가 십분의 일에 들어가야 되는 거에요.

내가 아웅다웅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아멘

내가 그 십분의 일에 들어가야 되는 거에요.

그 신성종목사님 그 간증 속에는 뭐냐면 가장 큰 상을 받은 자들이 누구냐? 천국에서. 사도바울과 열두 제자들, 그 자들이 가장 큰 상을 받고 있고, 그 다음 서열이 누구냐면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평생을 통해서 열심히 복음 전한 자. 할렐루야!

그래서 그분이 칠십 몇 살에 인도로 선교사로 간 거에요. 그걸 봤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 내가 복음전하고 살아야 되겠구나!’ 아멘.

내 개인적인 삶에만 매여서 나에게만 매여있는 삶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나가서 전파하고 내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고 다 하라 말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날마다 사는 삶속에서 내가 영으로 살지 아니하면 다 사망의 삶이라고 그랬어요.

사데교회에 우리 주님이 뭐라고 그랬냐면 너는 살아있다는 말은 가졌으나 죽은 자다그것도 문제가 있는 거에요.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다 그게 뭐에요? 육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하거든요.

사데교회 교인들도 교인들이거든요. 예수 믿는 자들. 죽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주를 위해서 고난받는다 생각해야 되요. 아멘.

주의 이름으로 내가 남을 섬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정에서나 다른데서 예를 들어서 남편이 참 나를 안대해주고 힘들게 한다. 무엇에 있어서나. 그런데 그에게 내가 주의 이름을 그를 섬긴다 하는 것이 좀 힘들죠. 그죠.

그렇게 생각을 바꾸는 게 힘들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냐면 주여주님의 이름을 불러요.

주여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겠습니다.’

내가 평생을 그를 주님이 하라했기 때문에 내가 죽고 지내고 내가 여기서 만들어지고 또 저가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실 때까지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바꿔서 소망을 가지고 내가 주님 때문에 소망을 갖고 그가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할렐루야!

그렇게 지금 내가 현재 상황을 참고 인내하는 거에요.

그게 상이 된다는 거에요. 그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바꾸기 힘들 때 소망을 생각하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저를 바꾸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믿기 때문에 내가 지금 참고 인내합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바꾸라 말이에요.

 

자 여러분 진리단계에서 정의 한번 들어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가 영혼이 중심이 되어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는 단계다 얘기를 했지요.

그죠. 영혼이 중심이 된다. 옛날에는 뭐에요? 그냥 육으로만 했어요.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만 살았어요.

그러나 이제 진리단계로 오면 영혼이 중심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기 시작하는 단계다.

그다음 두 번째로는 뭡니까?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기 시작하는 단계다. 그렇게 얘기했지요. 신령한 집, 여러분 신령한 집이란 신령한 집이 내 안에 지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내 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지면 여기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누가 살아요? 주님이 살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기 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지지 않으면 주님이 오시지도 않죠.

더러운데 주님이 어떻게 와요? 더러운데 오시지도 않아요. 주님이.

그런데 내가 신령한 집이 지어지면서 그 안에 주님이 시작하신 단계가 진리단계라는 거죠.

우리 빌립보서 3장 한 번 가봅니다.

빌립보서 37절에서 9

그러니까 이 진리단계에서는 어떤 마음이 나에게 생기는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단계에 있으면 내가 진리단계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7절에서 9다같이 시작.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할렐루야! 여기까지 만요.

그러니까 예수를 얻기 위해서 나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주님을 얻기 위해서, 이 단계가 진리단계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그 가치관이요 주님을 얻는데 있어서 이게 방해가 된다 싶으면 다 버리는 거에요. 배설물로 여기라.

여러분이 이 진리단계에 있기 전에는 어떻게 했냐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내가 입고 싶은 거 다 입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아니네. 그게. 다 끊는 거에요.

내가 사고 싶은 거 안사 이제부터는. ? 내 마음속에 양심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하면 안 되겠어. 이제.

내가 이전에는 비싼 거 먹고 다녔어요. 그것도 이제 안 먹어. ? 굶어 죽어가는 사람 있는데. 하나님이 심으라 그랬는데 심지도 않고 말이에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기 시작한 거에요.

주님을 얻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 교회에서 내가 옛날에는 막 인정을 받으려고 그 맘이 더 커서 막하고 그랬는데 이제 보니까 나는 좀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버린바 됨을 알게 되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르게 돕고 인정을 안 받아도 주님만이 나를 아시니까 기뻐하고 이런 게 주를 얻는 거에요.

옛날에 내가 주를 얻기 위해서는 옛날에 하던 그 이상한 짓 어리석은 짓 어린애 짓을 다 버리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게 주를 얻게 위해서 내가 나에게 유익하게 여겨지던 모든 거를 버리는 것입니다. 해로 여기고.

그러니까 진리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겉사람은 후패해 보이는데 속사람은 날로 새로운 단계. 그런데 여러분이 이걸 오해해 가지고 ~ 겉사람은 후패한다고 그랬는데 그럼 내가 옷을 갖다가 옛날에는 막 차려입고 다녔는데 이제는 좀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고 겉사람이 후패한 건데 내 속은 주님 때문에 기쁘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 기쁨이 기쁜 건 좋은데 그게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서 내가 막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니까 어디 가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받아야 되고 내가 왜 희생을 해야 돼? 하나님이 나한테 다 줄 것이고 나만 사랑하고 말이야이러면 이상하게 되는 거에요.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겉사람은 후패해도 내가 인정을 못 받아도 속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안 기뻐하는데 내가 막 기뻐서 날뛸 수 있어요.

무슨 얘기하는지 아시죠.

이게 착각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진짜 기뻐하시기 때문에 내가 기뻐해야 되요.

이게 속이 날로 새로워지는 거에요.

근데 사람들은 체면을 걸어요. 자기가 막 착각을 해서 자기 맘대로 살면서 할렐루야하는 사람들 많아요. 이게 착각이에요.

정말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기뻐해야 그게 진리의 사람이에요.

속이 날로 새롭도다가 거기에 해당한다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냐?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안 기뻐하면 다 틀린 거에요. 다 아닌 거에요.

그다음에 세번째로 진리단계 특징이 뭐냐?

다섯 가지 신분으로 살아드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이 있죠. 그죠.

다섯 가지 신분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저는 외우기를 자왕제성신 이렇게 외웁니다.

그러면 다섯 가지 신분이 자녀로서의 그다음에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그다음에 성전으로서 신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여러분 자녀라고 하는 것은 자녀의 특권이 있습니다.

누림이 있지요. 자녀로서 특권과 누림이 있습니다.

누림이 있으면 그 반면에 뭐가 있어요?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아요.

동전이 앞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앞면이 있고 뒷면이 있어요. 그림이 다르고요. 뒷면에 있는 게 뭡니까? 책임과 의무라는 거에요.

자녀로서의 책임과 의무. 책임과 의무가 뭡니까?

내가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지만 책임과 의무는 뭐에요?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그분의 말씀을 잘 지켜드리고, 이게 자녀의 신분이죠.

두 개 다 잘 하라는 거에요.

왕은요 우리는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잖아요.

왕으로서 살게 된다 말이에요.

왕은 뭡니까? 내가 다스리면서 산다는 거에요.

뭘 다스리면서? 나를 다스리고 육신을 다스리죠. 그죠.

그다음에 죄를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리고 환경에 넘어지지 말고 환경은 나를 자꾸 넘어뜨리려 하잖아요. 그러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승리하는 쪽으로 가야 되고 그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사단을 다스려야 되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거죠.

이런 것을 다 다스리면서 사는 자가 왕으로서 신분을 사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왕으로서 신분을 살려면 동전의 뒷면, 뒷면이 뭐냐면 하나님을 내가 나의 왕으로 삼지 않으면 나는 다스리는 자가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동전의 뒷면이 뭐냐?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래야 나는 다스리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시작하는 단계가 진리단계에요.

왕의 신분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왕으로서의 다스리는 왕으로서 살기 시작하는 단계가 진리단계라는 거에요.

그다음에 제상장은요 날마다 나를 번제로 드리라 그랬지요.

제사장의 역할은 뭐냐면 로마서 121절에서 2

그분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서 그분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뜻이 뭔지를 분별해서 우리 몸을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날마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게 지금 제사장의 삶이죠. 우리 몸을 날마다 그분의 뜻에다가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그랬잖아요. 이게 제사장으로서 삶이에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시작 단계라는 것입니다. 진리단계가.

여러분 어떠세요? 여러분 지금 내가 이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들어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다음에요 성전, 아까 신령한 집이 지어진다고 그랬지요.

성전으로서의 삶을 우리는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성전으로 살 때에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시는 성전이라고 그랬는데 내 몸을 더러운데다가 갖다 놓고 죄짓는데다가 내 몸을 갖다 놓고 그다음에 남을 막 험담하는데 가서 같이 끼어갖고 막 험담하고 여러분 술은 안 먹겠지요. 담배 안 피겠지요. 내 몸이 성전이라고 그랬으니까 내 몸을 성전으로 취급해야 되요. 내 몸을 거룩하게.

그다음에 신부로서의 삶

신부는 뭐 한다고 했어요? 옳은 행실, 옳은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이지요. 옳은 행실 세마포입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어요.

빛은 이렇게 집안사람들에게 비취느리라. 할렐루야.

어디서부터 비추라고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이 나는 그것을 등경위에 둔다 그랬어요.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 선반위에 둔다 모든 집안사람들에게 비췰 수 있도록 할렐루야.

그 빛이 누군데요? 빛은 예수 그리스도시거든요.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있잖아요.

그 빛을 예수의 빛을 비추고 살아야 되요.

어디서부터요? 가정에서부터 집안사람에게 다 비취느니라.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거룩한 삶이 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된다? 집안에서부터.

집안에서부터 집안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나에게서 그 사람들이 뭘 봐야 된다구요? 빛을 봐야 되는 거에요.

그 빛이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멘.

그럼 예수를 비추고 살지 못하고 사는 나는 잘못 살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거라 말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고 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특징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구속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그랬어요.

객관적인 구속사와 주관적인 구속사가 있다.

객관적인 구속사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는 것이고, 주관적인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는 과정, 하나님 나라에 나를 참여시키기 위하서 참 열매를 맺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다루시는 과정이 각 개인마다 다루시는 과정이 주관적인 구속사라 그랬어요.

성경말씀을 볼 때 이제는 어떤 게 열리냐면 구속사적인 해석으로 해석이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열리게 되어져서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 이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거구나!’

근데 하나님 말씀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삶도 이제는 그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가 가기 시작해요. 할렐루야.

주관적인 구속사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객관적인 구속사로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시고 앞으로 나를 어떻게 쓰시길 원하시고 지금 나는 어떻게 참가되고 있는지...

이게 구속사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내 삶도 해석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이게 내 삶에서 해석이 되어진다는 것이 참 큰 거에요.

이전에는 주관적인 구속사가 뭔지 하나님이 내 삶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몰랐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예를 들자면 저 자신을 봐도 말씀을 읽으면서 ~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뭔가?’ 그것을 생각하고 읽지요? 그죠!

그럼 그건 누구 중심으로 읽는 겁니까? 나 중심, 내가 처한 상황, 내가 지금 받아야 될 말씀, 그걸 기대하고 성경을 읽어요.

그것도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원래 성경이 쓰여진 이유는 누구 입장에서 쓰여졌습니까? 하나님.

그럼 이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해야 되요.

제가 한번은 기도를 막 했어요.

하나님 성경을 깨닫는 그 지혜와 계시의 영을 나에게 좀 주십시오.’

왜냐하면 성도들을 잘 먹이려면 나를 갖다가 하나님이 잘 깨닫게 해 주시고 잘 해야 성도들이 와서 먹을 건데 나를 안 열어주시면 어떻게 먹입니까?’

내 양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를 막 열심히 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딱 말씀하셨어요. 뭐라고 하시냐면 성경을 볼 때 네 입장에서 보지 마라.’는 거에요.

그 성경을 읽을 때 나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원래 성경이 쓰여진 이유가 내 입장에서 쓰여진 게 아니라 누구 입장에서 쓰여진 거에요? 하나님 입장에서 쓰여진 거에요.

그래서 내가 막 열어달라고 애타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딱 하시는 얘기가 내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내가 지금 해석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하 진짜 오리지날 뜻이 보여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할렐루야.

안 그러면 내 입장에서 있잖아요. 내 처지와 내 상황 속에서 맞는 말씀, 대개는 그러잖아요. 내게는 무슨 말씀을 주실까? 그런 생각을 하고 읽으라 또 얘기하잖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정작 하나님이 오리지날로 쓰신 목적과 의도를 캐취할 수 없더라구요.

그럼 내가 읽을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에서 이걸 쓰셨을까?’ 이걸 생각하는 거에요. 무슨 얘기인지 알죠? 하나님 입장에서 내가 이해한다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왜 이 얘기를 쓰셨지?’ 내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아하 우리를 사랑해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거에요. 할렐루야. 우리를 사랑해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요. 아멘.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되요.

아멘입니까? 아멘.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보면 성경을 보면 인물 영성 쪽에서 개인들을 보면 모든 게 다 주관적인 구속사와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시는 입장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쓰임받게 하는 그런 객관적인 구속사로 지금 성경에 쓰여져 있구나가 깨달아져요.

그런데 그 인생이 누구 인생이냐? 내 인생이라는 거에요.

나의 인생이라는 거에요. 할렐루야.

내 인생이 성경에 안 적혀 있다 뿐이지, 왜 안 적혀있을까요?

왜 몇 명만 적혀 있을까요? 그 사람들은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도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았나? 주관적인 구속사와 객관적인 구속사가 다 기록이 되어 있을 거에요. 여러분의 하나하나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 속에서 얼마만큼 내가 불순종했고 돌아갔고 좀 빨리 갔으면 되었을걸....

이게 다 기록이 되어 있다 말입니다.

거기에 적혀질 때 여러분 잘 적혀질 수 있도록 승리할 수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진리 단계 들어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요.

내가 진리로 살아지기 시작하는 단계, 진리가 뭐라구요?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내가 살아지기 시작하는 단계, 못 살면 마음이 아픈거야. 마음이 안 아픈 게 그게 이상한 거에요. 마음이 아파야 되요.

마음이 아프면서 내가 왜 못 살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 사는 내가 발견되어지면 하나님 앞에 막 부끄러워져요. 그게 진리단계 있는 사람이에요. 부끄러워지는 거에요. 하나님 보기에도 부끄러워, 괜히 나를 보고 있는 거 같아.

앉아있어도 부끄럽고 막 서 있어도 부끄럽고 하여간 막 부끄러워요.

안 부끄러운 사람 그게 이상한 거에요.

부끄러워야 되요. 그게 지금 하나님 앞에 살기 시작하는 단계라 말이지요.

여러분 많이 부끄러워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승리하는 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또 이 자리 있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또 아버지 끝까지 승리하는 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권고하심을 감사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우리는 이 줄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승리하는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그만큼 우리가 갈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줄을 놓지 않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 우리 주님 따라 갈 수 있는 우리 모두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는 자로 아버지 남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함께 하여주실 것을 믿사옵고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 잠깐 기도합니다. 1분간 기도하는데 하나님!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주님이 펼쳐놓으신 그 환경 속에서 제가 복종하겠습니다. 제가 죽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많은 열매가 분명히 맺어질 것을 믿습니다.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에 맺어질 열매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눈물을 뿌리며 감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열매들이 내가 죽음으로써 맺어질 것을 믿습니다.

주님 내가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죽겠습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한번 부릅니다.

주여!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 그 속에서 죽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열매들을 생명의 열매들을 우리 주님께서 맺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맺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열매 맺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지게 우리가 죽을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께서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댓가를 치름이 필요합니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내가 때로는 부끄러워지고 또 수치를 참아야 되고 죽어야 되며 우리는 그러면 앞에 아름다운 열매,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드실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질 줄로 믿습니다.

주여 죽게 하소서. 주여 죽게 하소서.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죽는 힘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승리는 사랑하는 자, 주는 자, 사랑을 주는 자가 승리합니다.

희생하는 자가 승리합니다.

우리를 승리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물결 위를 걷는 믿음, 그런 믿음을 갖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능력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능력이라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사랑이라 했습니다.

끊임없이 주는 사람, 끊임없이 주는 사람, 나를 포기하는 사람, 내가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는 우리에게서 또 한번 패배당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다시 한번 우리는 결단합니다.

내가 죽기로 결단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마음 받아주시고 또 힘들더라도 붙들어 주시고 반드시 앞에 있는 즐거운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가 죽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