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바른영성훈련 - 대인과 영성 IV. 정의 - 서사라 목사님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여러분이 가는 그 길이 주를 위한 길인지 나를 위한 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하나님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 길이 나를 위한 길이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는 정말 주를 위한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한 번 부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목숨 다하리라 사명 다하리라. 그렇게 주를 위해 살아왔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주님 보시기에 주의 영광 뒤로하고 모든 것이 나의 자랑이었다면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주님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아버지 하나님 나의 길을 가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길을 가리라 모든 영광 주님께, 주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 모든 영광 주님께.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는 우리의 길이 정말 주를 위한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 사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다시는 다 다시는 동일한 실수와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시고 주님만 홀로 영광받으시옵소서.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이 주를 위한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결심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장집사님 기도하시고 시작하겠습니다. 크게 기도해 주세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새로운 성령의 능력으로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환영합니다. 넘어질지라도 자주 엎드러지지 않으면 우리들이 계신 하나님의 오른팔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승리하게 하시며,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의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주님의 뜻을 거스리는 우리의 옛사람의 습성을 끊어버리고 좀 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아무리 힘을 끊고 기도하고, 정말 성경 공부를 사모하고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 살고자 하지만은 우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성령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이 시간에 임재하여 주셔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열려서 저희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그 뜻을 나타내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셔서 저희들과 더불어 함께 동역자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서 하나님 정말 세상의 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예수의 모습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 하루를 사모하고 그날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이 시간에 맞사오니 저희들을 다 도와주시고 다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와 영광드리며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한번 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볼 것은 대인과 영성 생명 단계입니다. 지난달에는 물질과 영성 생명단계를 나눴죠. 그죠 이번 달에는 대인과 영성 생명 단계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여러분 생명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죠. 그래서 생명 단계하면 다른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로 사는 삶이 생명단계라는 것입니다. 오늘 생명단계 정의에 대해서 대인과 영성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인과 영성에 있어서 대인이라고 하면 뭡니까?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이웃이죠. 그죠.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이웃. 이웃의 정의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 이것이 이웃의 정의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이웃이 되죠.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그랬냐면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이 소자는 어느 누가 누구가 소자가 기고 아니고 이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는 소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그래서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인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냐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영 중심의 삶, 여기서 영혼이라고 하는 건 영을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많이 혼동을 많이 하죠.
여기서 혼은 뭐냐 그러면 영혼 우리가 혼은 우리 뇌에 의한 지정의는 그래서 우리는 삼분법을 할 때는 영 혼 몸을 쓰죠. 그렇죠. 영 혼 몸.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잖아요. 우리가 죽으면 떠나는 것도 영입니다. 그죠. 그러나 혼과 몸은 우리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 이 혼은 뇌 작용으로 일어나는 거고, 우리 몸은 인제 오장육부가 있는 거죠.
근육과 살이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이걸 합쳐서 우리는 뭐라 그럽니까? 육신이라 그러죠. 육신. 혼까지 합쳐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 혼 육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삼분법을.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너의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하시는 그날에 흠없기를 원하노라 삼분법을 쓰고 있지만 거기는 대개는 로마서에서는 사도바울은 영과 육신 이분법 쓰고 있죠. 그래서 여기에서 얘기하는 영혼 중심의 삶이라고 하는 거는 영을 얘기합니다. 이 영은 이 영 안에는 누가 와 계세요? 예수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시죠. 그래서 영 중심의 삶을 산다.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영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실제의 삶을 산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영적 실제의 삶 영적 실제의 삶? 그러니까 영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영적 실제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육신 중심의 삶을 살고 있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혼과 육 이게 육신이잖아요. 우리에게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우리 의지는 하나님이 말씀이나 하나님이 틀렸다 그러면 다 틀린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감정과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따라서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는 삶이라는 거에요. 진노하는 삶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영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요 부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부. 부부에게는 부부는 어떻게 해서 부부가 맺어집니까? 남편과 아내죠. 남편과 아내. 여러분이 아직도 남편이 영 중심으로 느껴지지 않고 육신 중심으로 느껴진다면 내가 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육신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아직 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죠. 남편이 영으로 보여야 돼요. 남편을 영으로 사랑하는 자는 남편이 남편으로 여겨지지가 않고 주안에 있는 형제로 여겨집니다.
내가 남편이라고 생각하니까 서운하고 섭섭한 거에요. 그러나 주안의 남편이 남편이라는 이 남편이 말이 좀 이상하지만 형제로 여겨져야 내가 그를 영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죠. 아내가 내가 육신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자매로 느껴진다.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부부간에 영적으로 이렇게 성화가 되면요 남편으로 느껴지지 않고 주안에서 형제로 느껴진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장하셔서 남편을 육체로 보는 게 아니라 육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으로 대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 중심의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대인과 영성 생명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실제 삶은 언제 이루어지냐? 내가 생명적인 삶을 살 때에 이루어지죠. 생명적인 삶. 그니까 생명적인 삶이라는 건 뭐냐 하면 나의 삶에 내가 나가는 게 아니라 예수가 나타나는 삶이 영적 실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타난 삶.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영성훈련을 통해서 본능단계 대인과 영성본능단계 본능단계는 너와 나죠. 그죠. 너와 나, 부부가 왜 깨어집니까? 그 사이에 하나님이 인정이 안 되니까. 너와 내가 성격이 안 맞다고 그러고 헤어지는 거예요. 본능단계는 너와 나죠. 그죠 윤리단계는 뭐예요?
하나님께서 그 사이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내 남편을 만나게 해주셨고, 내 아내를 주셨다는 개념이 형성되는,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뭐예요? 맡겨진 자예요. 맡겨진 자. 서로가 서로에게 맡겨진 자를 어떻게 하라고 맡겨진 자입니까? 섬기라고. 섬기라고. 여러분 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섬김을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섬김을 받으려 하니까 헤어지는 거예요. 결혼은 왜 합니까? 결혼 우리가 몰랐을 때는 그랬지만 인제는 안 상태에서는 결혼을 왜 하냐면 섬기기 위해서 하는 거죠. 할렐루야. 섬기기 위해서. 언제까지요? 평생. 평생. 섬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그 섬긴 상이 어디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있단 말이에요. 하늘나라. 내 남편을 남편으로 보지 않고 정말 형제로 봐야 된다는 거예요. 형제. 내가 평생 섬겨야 될 형제, 그러면 그 모든 상급이 하늘나라에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섬길 대상의 밭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한다. 할렐루야. 먼데서 찾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대인과 영성 진리 단계가 있고 그다음에 이제 생명단계가 있죠.
진리단계는 몸을 쳐서 복종하는 거예요. 안 돼도 쳐서, 이때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죠. 그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 생명은 그냥 흘러나가는 거예요. 아예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고 계시니까. 내가 비켜나고 예수님이 살고 있으니까 예수가 나가는 삶이 생명 단계입니다. 저는 다 돼서 제가 다 돼서 강의하는 게 아닌 것을 잘 인지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 단계에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예수님 같아야 돼요. 예수님 같아야 된다. 근데 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멀었다.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제가 돼서 강의를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저를 본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누굴 본받아야 됩니까? 예수님을 본 받아야 돼요. 또 사도바울을 본 받아야 돼요. 할렐루야. 우리의 멘토는 여러분 앞에서 강의하는 강사가 멘토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짜 멘토는 누구예요? 예수님, 그리고 사도바울입니다. 그분들을 예수님과 사도바울을 멘토로 삼으셔서 열심히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다음에는요 생명단계 두 번째 정의는 뭐냐 하면 대인과 영성에서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요, 시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두 번째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라 시비라는 건 뭡니까? 옳고 그름이죠.
가리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그 안에, 누구 안에 있는 내 안에 있는 그 안에 있는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찬송 있죠. 그죠.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사는 자, 이런 자가 대인과 영성 생명 단계에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옳고, 그름, 여러분 조금 이렇게 성장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시비를 안 가리죠. 덜 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시비 가리죠. 그죠. 부부간에도 시비를 가리고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바깥에 가서 말하고 돌아다니고 이게 시비를 가리는~ 그렇잖아요. 교회 안에서 부부간의 옳고 그름, 근데 생명적인 삶은 이런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란 말이죠.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다. 근데 조금 성장되면요 인제는 교회 안에서는 시비 안 가립니다.
하나님 하라면 하지 말라 했으니까 성장한 사람들의 얘기예요. 부부간에도 다른 사람이 가서 상대방의 나쁜 점들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게 성장한 자의 모습이에요. 조금 성장한 자. 근데 조금 성장한 자는 그걸 인제 덮어주는데 문제가 뭐냐면 우리가 더 넓혀져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생전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장해서 교회 내에서는 입 다물고 있고 시비 안 가리고 또 주님이 임재하는 것 같고, 그래서 다 인내하고 참고 바라고 부부간에도 참고 바라고 믿고 인내는 되는데, 근데 생전 우리 교회 사람도 아니고 예를 들어서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 곳에 가서 정말 억울한 일과 부당한 일을 당할 그때에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우리가 넓혀 나가야 되면 우리는 생명의 삶을 산다는 것은요, 계속 그 범위가 넓어지는 거예요. 넓혀야 되잖아요. 우리는 생명적인 삶이라는 건 내 가정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명적인 삶은 더 넓어져야 돼요. 할렐루야. 시비를 안 가리는 거,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시비를 내가 일단 안 가리기 시작했다. 이건 일단은 고비를 많은 고비를 넘어선 사람이에요. 시비를 안가리는 거요. 근데 그거를 더 넓혀서 인제는 내 가족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보통 만나지는 여러 번 만나지는 이웃들이 자주 만난 이웃들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데 가서도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우리가 넓혀짐이 우리의 삶에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대인과 영성에서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 진리와 대인관계 진리와 생명의 차이가 뭐냐? 진리 단계와 생명단계의 차이가 뭐냐? 진리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진리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렇잖아요.
진리가 하나님 말씀이니까. 그리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 물어서 그 뜻을 물어서 행할 때 이게 진리 단계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단계만 가도 여러분은 승리, 성공하는 거예요.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윤리단계에서 진리단계까지만 가도 정말 승리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 단계는 뭐냐면 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각, 하나님이 아는 지식이 넓혀져서 하나님이 그냥 내 안에서 느껴져요. 어떻게 하기를 원하심이 하나님이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게 성령의 움직임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서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져서 그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입니다. 그 하나님이 알리게 해주세요. 그냥 어떻게 하기를 원한다는 걸. 이게 성령의 움직임이거든요. 그래서 물어볼 필요가 없이 내 안에 계신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의 대개 보면 어떻게 이 움직임이 느껴지냐 하면은 예를 들어서 한 예를 들자면 어떤 자매나 어떤 형제가 다 주안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계속 나를 헐뜯고 돌아다닌다 그런 경우 있죠. 아무리 잘해줘도 그렇잖아요. 왜곡돼서, 그 마음이 왜곡되어진 사람은 헐뜯고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럴 때에 그 자매나 형제가 밉지가 않은 거야. 아무리 헐뜯고 돌아다니는데도 안 미워. 그러면 어떤 생각이든 밉지가 않고 오히려 삶이 그 형제가 진짜 불쌍히 여기죠. 이게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이란 거에요. 그 마음이 안에서 일어나요. 불쌍히 여겨져요. 그냥 이게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그 마음을 나타내시는 거죠. 그죠. 그렇게 여겨질 때 그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이게 생명 단계에 있는, 그런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에 있는 그런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을 보면요.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잖아요. 돌을 던질 때의 스데반은 뭐라 그랬습니까?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마음이에요. 생명의 마음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냐구요?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은혜 받은 거 그게 여러분이 잘나서 은혜받은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여러분 된 게 여러분이 잘나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갑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알게 해 주셨다면 그들이 그런 짓을 하지 않죠. 그래서 스데반는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게 주님의 마음이죠. 주님도 똑같은 얘기를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생명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모르는 그들, 내가 나의 나 된 게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닌 걸 알면, 그들이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그들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 삶이 생명적인 삶이라는 거예요. 그런 걸 하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한테 뭐라 그랬냐면은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그 잘못을 일곱번까지 하리까? 여러분 우리가 참 실수하는 것들이 있어요. 성장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럴 수가 있는데, 베드로가 그 얘기를 합니다. 일곱번까지 하리이까? 여러분 우리는 많이 참는다 생각하잖아요. 그죠 다른 사람은 한번 만에 화를 내고 그렇지만 나는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화를 낸다. 근데 차이가 뭘까요?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일곱번 참다가 화를 내든지 한번 참다가 화를 내는 거랑 똑같다는 거에요. 왜? 그 마음 안에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럼 나는 일곱번 참다가 화를 낸다. 아직도 나는 뭐예요? 시비를 가리는 자라는 거에요.근데 주님은 뭐라 그랬습니까? 일곱번까지가 아니라 뭐라 그랬어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이게 몇 번이에요. 490번. 하나의 죄에 대해서. 똑같은 동일한 형태의 죄에 대해서, 490번을 용서하라는 얘기는 아예 시비를 가리지 말아라는 거죠.
이게 생명적인 삶이라는 거에요. 베드로는 자기가 잘난 척하면서 일곱번까지만 하면 되겠습니까? 시비를 논하고 있지만 주님은 생명을 말씀하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요 우리가 시비를 가릴 게 못 되는 게 뭐냐면 우리는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잖아요. 근데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우리에게 아무리 못된 짓을 했다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다. 그런 일 굉장히 거하잖아요. 그럼에도 그것은 백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탕감 받은 걸 생각하면. 할렐루야. 여러분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 차이를 아시죠? 그죠. 얼마만큼 차이가 나냐면은 100데나리온은 이 한 데나리온이 얼마예요? 하루 품삯이니까. 100달러. 그죠 그럼 1만 불이잖아요. 1만 불은 3개월만 내가 안 쓰고 모으면 모여지죠? 그죠. 근데 이 1만 달란트 데나리온으로 계산해 보면 얼마만큼 일을 해야 버는 돈이냐? 10만 년. 여러분 몇 년 살고 가요? 100년도 못 살고 가잖아요. 근데 10만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이 돈이에요.
하루 품삯으로.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우리에게 잘못해도 그들은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은혜 받은 거 생각하면 나 같은 죄인 용서해 준 거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살아라는 겁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나에게 못된 짓을 하고, 아무리 나에게 손해를 입혔고, 그와 상관없이 여러분이나 저나 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며 생명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요. 우리 성경 말씀 하나 찾아보죠.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고린도전서서 12장 한번 보도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27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시작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잠깐만요 거기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또 뭐라 그랬어요?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뭐가 되었고? 한 몸이 되었다. 저 사람은 왜 저 짓 하고 돌아다니지? 저 사람은 왜 꼭 저렇게 살아야 되고? 정말 같이 예수 믿는 형제자매인데 정말 내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고 하는 형제자매도 뭐라는 거예요? 한 몸이 됐다는 거예요.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내가 보기 싫고, 아무리 내가 정말 다시는 상대하고 상대하기 싫고, 그런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믿으면 다 뭐예요? 한 몸이 됐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14절 다같이 시작
몸은 한 지체뿐 아니오.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래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또 귀가 이러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임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네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에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에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자 여기 보세요. 우리가 몸에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여러분 이게 섬기는 거예요. 여러분 잘 돼 있는 사람은 영혼이 잘 돼 있고, 보기에 반듯한 사람들은 안 섬겨도 괜찮아. 그러니까 더 정말 부족하고 정말 정신이 이상한 것 같고, 정말 이상하고 이런 사람들을 뭐라는 거예요. 귀 입혀주라는 거예요.
근데 그게 진짜 예수의 마음이거든요. 그게 소자거든요. 정말, 다 이웃이 소자라 했지만, 정말 소자거든요. 그런 자들을 더 기이 여겨야 되는데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전체를 위한다고 그러면서 또 밀어내고 말이죠. 그건 사람의 생각이에요. 성경의 말씀은 전체를 위해서 하나를 밀어내라 이런 말씀이 없어요. 부족한 자를 병든 곳을 더 여러분 몸에 병들면 그것을 무시합니까?
오히려 더 신경을 씁니까? 더 신경을 써줘야 되는데 오히려 우리가 밀어낸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의 말씀과는 반대되는 행위들에요. 여러분 참 제가 저는 이 영성훈련이 얼마나 귀한지를 제가 스스로 또 한번 최근에 느꼈는데요. 최근에 제가 어떤 교회를 한번 방문한 적이 있어요. 거기는 큰 교회더라고요. 보니까 근데 모든 성도들이 교인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어떤 방향이냐? 내가 잘되기 위해서 다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위에 계셔야 되는데 내가 먼저야 그러니까 모든 신앙생활을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근데 이사야 43장 21절을 보면 내가 내 백성을 지은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찬송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이 찬송을 받는 데는 전혀 주류가 내가 서 있는 길이 그 길이 되어져야 되는데 엉뚱한 길에 서 있더라는 거예요. 그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설정이 돼 있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평생 한번 살아보십시오. 나를 위해서 산 삶밖에 안되는 거예요. 헌금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해요.
내가 삶에 축복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동기를 살피잖아요. 그 마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잖아요. 나를 위해서 하는 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천지 차이예요.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근데 그거를 교회 안에서 또 조장시키고 또 그걸 따라가고 그러면서 제가 느낀 게 뭐냐? 참 영성훈련이 참 귀하다. 하나님이 왜 이 LA에서 영성훈련원을 세웠는지를 제가 알겠어요. 저는 다른 교회 별로 가보질 않았어요. 몇년 동안. 그냥 열심히 영성훈련 시키면서 그랬는데 한번 가봤더니, 지금도 그 교회 예를 들어서 주류가 아직도 나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진리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죠. 진리적인 삶을 살 수가 없어요.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어떻게 진리적인 삶을 삽니까? 뭐 생명적인 삶은 고사하고 자식이 복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그게 뭐예요? 이 땅 위에서 내가 구하는 거에요.
이 땅 위에서 나를 구하면서 사는 거예요. 말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주를 위한 존재입니다. 나는 주를 위해서 생명 바치고 나는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면서 정작 사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 오신 이유는 그걸 바꾸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할렐루야. 나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벗어나서 정말 주를 위해서 사는 삶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 보면 뭐라 그랬어요?
23절 우리가 몸에 덜 귀이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섬겨야 된다는 거죠. 우리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해야 되고 그 얘깁니다. 그다음에 24절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예요. 내가 아무리 나는 안 그런데요. 안 그럴 것 같은데요. 그게 통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라. 그럼 더 해야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25절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여러분 이게 생명적인 삶이거든요. 그러니까는 한 지체가 너무 아프다. 그러면 그 지체와 함께 전체가 고통을 같이 받아야된다는 거예요. 근데 전체가 고통을 받으니까 그 사람을 밀어내버리는 거야. 이거는 성경적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잖아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전체가 고통을 받더라도 그걸 치유하라는 겁니다. 아멘입니까?
그 과정이 힘들죠. 근데 힘들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힘들어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죠. 아멘.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이게 적용이 되지만 전체적인 삶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이 그러면 이제 그런 질문이 생겨요. 어떤 지체가 예배를 방해한다. 지체는 지체니까, 예배를 방해하고 그걸 이제 보다보다 못해서 밀어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다들 들어왔어요. 그럴 때에 그래도 하나님께 먼저 물어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을 베풀되 언제까지 하는 거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해야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라 하실 때는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람의 생각으로 그런 지체들을 밀어내지 말라는 것이죠. 또 한 지체가 영광을 얻은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래서 이 생명 단계에 대인과 영성 생명 단계에서는 어떻게 되냐면 이 지체의 개념이 실제가 됩니다. 지체의 개념이 나에게서 실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저 못된 사람이 나의 지체다. 그리스도 몸 안에서 지체다. 믿건 안 믿건 성경은 그가 우리의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믿건 안 믿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 생각은 다 틀렸고 하나님 말씀만이 옳은 거예요. 할렐루야. 이미 지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체의 개념이 실제가 되어져서 그가 아프면 내가 아파야 돼요. 그가 아픈 것이 내가 아픈 것으로 느껴져야 돼요. 그런 자가 생명 단계에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지금 생명단계를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아직도 다 생명단계에 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그 전 단계를 조금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부당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어떻던가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럴 때 그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쉽든가요? 어렵던가요? 아니 그 사람이 잘못했으면 아니 내가 잘못했으면 괜찮은데 나는 전혀 아무리 봐도 별로 잘못한 게 없는데 형제자매가 어떤 뭐 부당한 일을 당한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럼 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쉽더냐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인제 쉽지가 않으니까 하는 얘기 아니에요. 그러면 부당한 일과 어긋난 일을 당했을 때도 화를 내지 말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 되는 이유? 말아야 하는 이유, 첫째 성경에는 뭐라고 얘기하겠냐면 성을 내는 것이 뭐예요? 그렇죠. 의를 이루지 못한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살고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간에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정의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성경에는 뭐라 그래요? 오른뺨을 때리면 뭐라고 그랬어요? 왼뺨을 내밀어라. 이게 성경의 말씀이기 때문에.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화를 내지 말아야 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부당한 일과 억울한 일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드러내실 때에 나의 모습, 드러난 나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애통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애퉁해야 되는 거, 그럼 주님 앞에 앉아서 애통하면 위로가 임한다고 그랬잖아요. 위로, 정말 나의 모습을 놓고 하나님 앞에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로하시는데 어떤 위로가 오냐? 주님 앞에 와서 애통해야죠. 그죠 어떤 위로가 오냐면 '봐라 니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위로를 주십니다. 니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걸 발견케 하시는 거예요. 그럼 누구 힘으로 됩니까? 예수님 마음으로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결국 내가 사랑하려고 하니까 안 되니까. 나(주님)로 하라는 거 나로 이게 뭡니까? 이기는 생명이죠. 이기는 생명. 나로는 안 되니까. 주님이 위로하시는 것이 그래 나로 해보라는 거예요. 예수님으로 해보라는 거야. 그럴 때 여러분 마음안에 빛이 들어오고 평강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애통을 많이 해야 돼요. 그래야 발전이 있는 거예요. 그래야 생명의 삶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 정의에 대해서 봤는데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서 조금만 더 한 5분간만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명 단계가 아니라 지금 나는 생명단계를 얘기했어요. 이기는 생명을 얘기했는데, 여러분 우리는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본능단계가 있었죠. 그죠. 대인과 영성본능단계 여기는 아예 하나님이 없죠. 그죠. 윤리단계부터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모든 이웃이 나에게 오는 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인정하죠. 그죠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도 부당한 일을 당한 일도 억울한 일을 당한 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거예요.
윤리단계에 있는 때는 그 이웃, 나를 헐뜯고 예를 들어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그런 자가 파트너의 개념으로 오죠. 그렇죠. 파트너. 나를 깨뜨리기 위한 파트너. 그래서 자아 파쇄 훈련을 열심히 하잖아요. 윤리단계에서 내 안에 있는 걸 드러내는 데에 그 파트너가 사용을 받는 거죠. 그죠. 내내 속에 있는 더러운 거 드러냈는데 그래서 그 이웃이 나의 파트너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감사를 받죠. 아 저 파트너를 사용하셔서 나를 드러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나가는데 진리 단계로 가면 이 이웃은요, 인제는 파트너의 개념을 넘어서서 섬기는 대상이 됩니다. 그렇구나.
인제는 내가 저 못된 사람을 하나님이 섬기라고 보내주셨구나. 할렐루야. 섬기는 것까지 나아가는 거예요. 윤리단계에서는 파트너 역할만 해도 감사, 진리 단계에 있는 사람은 오히려 그 사람을 인제는 내 안에 있는 거 처리되고 나서 그를 섬기는 대상으로 섬김으로 나아갑니다. 아무리 나를 찔러도 섬기고, 아무리 나에게 못되게 굴어도 섬기고, 내가 인제 섬기는 밭을 발견한 거예요. 이게 진리 단계에요. 그다음에 우리는 오늘 생명 단계를 나눴습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이 나가는 대인과 관계에서 예수님이...
우리 마태복음 25장 35절 36절 찾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입니다.
25장 35절에서 36절 다같이 시작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창세 이전부터 너희를 위해서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라고 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34절에 나와 있죠. 그죠.
그때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줄일 때 너희가 먹을 걸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했고 나그네 됐을 때 영접했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힐 때 와서 보았느니라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모든 소자들을 잘 입히시고 잘 먹이시고 잘 마시게 하시고 찾아보고 돌아보게 하시고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한번 부르고 하나님 나에게 다가온 모든 이웃들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살길 생명의 삶을 살길 원합니다. 또 성장한 자들은 주님 내가 평생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 가서도 시비를 따지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서 캐치해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겠습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부릅니다.
우리가 가야 될 그 목표가 골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마음을 허락하셔서 아버지 하나님 우린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들로서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아무리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주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이 알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주님 그렇습니다.
다시는 화내지 아니하고 화를 내지 말아야 될 이유들에 대하여 주님이 원하시지 아니함으로 아버지 하나니 우리가 아버지한테 더 넓혀갈 수 있도록 생명의 삶을 더 범위를 높여 갈 수 있도록 우리들이 축복하시고, 주여 세상에 정말 빛과 소금으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귀한 우리들 되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주님의 마음을 더 넣어 주시옵소서.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 그것을 주님의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아주 큰 것입니다. 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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