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대인과 영성 II - 율법적인 그리스도인과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서사라목사

하늘이슬 2024. 6. 25. 14:14

(1째주-3)

대인과 영성 II - 율법적인 그리스도인과 복음적인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 3장 19절부터 28절”까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 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 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 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 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 나이니라

말씀 한절 더 읽겠습니다.

“누가복음16장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 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오늘 설교 제목이 뭐냐 하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읽었는데요. 율법을 뭐라고 하냐면 갈라디아 3장 19절에서 “범법 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 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천사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으로 인을 쳐서 그들에게만 율법을 주셨는가? 이방인들에게는 안주셨는가? 왜 하나님 께서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하셨는가?

그 율법을 더한 이유가 그들이 범법함을 인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죄를 지으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졌잖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면 죄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요. 그러면 그 율법은 말씀에서 뭐라고 합니까?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전적으로 약속하신 자손 이 오실 때 까지 유효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에요.

이 약속하신 자손이 누구냐 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뭐하는 거냐 하면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죠. 그 런데 여기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 히려 율법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정하는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하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만일 우리에게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라는 것이 ‘옳음’과 ‘의로움’이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입 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고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단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고 성경은 말합니다. 뭘 준다구요? ‘의’를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율법은 어떤 역할을 감당했냐하면 우리에게 죄를 정하는 역 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에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말합니다.

계시될 믿음의 때 즉 주님이 오시기까지 우리가 죄 안에 갇혔다는 것이죠. 그래서 24절에 하나님께서 율법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

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율법으로는 절대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주고 정죄하기 때문에 결코 우리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약속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피흘리 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해 죄에 갇혔던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지요.

몽학선생이란 말은 어릴‘몽’ 배울‘학’인데, 이 말은 헬라문화에서 잘사는 가정에서 어 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종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 종은 주인의 자녀들의 교육을 맡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몽학선생인데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로 인도하는 영원한 우리의 선생 즉 고등학교 선생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한 것이 율 법이었다는 것이죠.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정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 려 죄에 갇힌 우리를 풀어주시는 그런 고등학교 선생에게로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를 더 큰 고등학교 선생에게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5절을 보면 믿음이 온 후로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나서 그가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심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이후로는 우리가 더 이상 몽학선 생 아래 즉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함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 우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이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26절과 27절을 합해서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후에 그 다음 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은 자 즉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물에 들어가서 즉 ‘나의 옛사람은 죽고’, 물위로 나오는 즉 ‘새롭게 부활하는’, ‘새로 운 나’로 탄생한다는 의미지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할렐루 야! 예수로 옷 입고 산다는 거예요.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만이 복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우리의 삶 즉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내가 죽고 새로운 나 로 부활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다음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셨 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인해 의롭다함을 입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십계명부터 시작해서 율법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무엇이 법이 되었냐하면 그들의 양심이 법이 되었

 

어요. 그들의 양심에 가책이 없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때까지만 그들이 율법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이후에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져서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러분, 율법은 죄를 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정죄합니다.

율법아래 사는 사람들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시비를 가리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합니 다. 하나님께서 율법시대 즉 구약시대에 그들에게 율법을 허락하실 때 그 시스템 아 래에 살았던 자들은 늘 죄를 정죄하고 살았어요.

그러나 주님이 오시고 나서는 그 율법이 죄를 정했는데 그것이 다 사함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도 남에게 대하여 정죄하지 않는 그런 시스템 안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 할렐루야!

그 후부터는 죄에 갇혀 있지 않고 죄에서 해방되어져서 언제든지 내 과거의 모든 죄 가 주님 앞에 죄사함 받을 뿐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 현재 짓고 있는 죄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하면 죄를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 다. 할렐루야!

여러분, “로마서8장 1절과 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이 뭡니까?

율법이죠.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율법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주님이 오시고 난 이후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 즉 주님이 우리에게 실천하신 용서와 사랑이 성령의 법이란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면 생명이 나타나잖아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였다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만이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는 율법 아래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해방되어져서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갈 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하지요.

나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어졌지만 남에 대해서도 정죄하지 않고 사는 즉 율법 안에서 살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복음은 하나만 말하는게 아니라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고 우리의 남은 여생에서도 옛 자아의 모습으로 사 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새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 복음입니다.

생명은 용서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시비를 가리고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냐면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예요.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냐면 내가 죄인이었을 때에 나도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았어요. 남의 잘못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주님이 나같은 죄인.. 우 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어요? 우리는 남을 손가락질 할 만한 자가 못되잖아요. 나를 위해서 주님이 죽어 주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가 아 니라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예요.

성경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 얘기가 나오지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을 데리고 와서 그들이 하는 말이 “모세의 율법에는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 까?” 하고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게 법이예요.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 여인을 돌로 치라” 고 말씀하십니 다. 그들은 율법 속에 살았어요. 율법은 죄를 정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죄가 많이 쌓였습니다.

주님은 죄 없는 자가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나이 적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씩 그 자 리를 떠납니다. 결국에는 죄 없는 자가 없어서 다 떠나고 죄 없으신 주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범죄치 말아라”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법을 가지고 정죄하는 것을 주님은 원하지 않 으신다는 것이예요.

오히려 용서와 사랑으로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 추측을 합니다. 저는 주님이 땅바닥에 이렇게 쓰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나는 너희 죄를 위해 이 땅에 왔고 나는 곧 너희를 위해 죽 을 자이다. 너희 죄를 사하기 위해 죽을 자인데 너희도 똑같은 죄인이면서 동일한 죄 인을 데려다 놓고 정죄하느냐? 조금 있으면 나는 너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을 것이 다.” 저는 주님이 말은 못하시고 이런 내용을 쓰시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제 생각이예 요.

여러분, 여기 보면 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는 율법 대로 살고자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복음을 가르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만이라는 것이예요.

그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그리로 침입하는 거예요. 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으로 침입하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도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겠어 요?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을 따르고 있지만, 복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릅니다. 성령의 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법 즉 하나님의 법인데 그것이 용서와 사랑이라는 것이예요.

여러분,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가 율법 아래 사는 자가 아니라 복음 안에 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볼까요?

그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어요. 주님은 그들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어요.

그들보고 “네 안은 깨끗이 하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성경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 경에서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절에서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 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율법아래 있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형제 자매들을 정죄합니다. 저 들은 안식일에 왜 이삭을 잘라 먹느냐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신 말씀은 뭐예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비’예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예요. 주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성했어요.

율법은 ‘넌 죄인이다’ 라고 정죄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에 죄지 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주님은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율법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된다는 거예요.

우리도 죄사함을 받았으면 율법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 안에 사는 그리 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마가복음 7장 1절에서 2절, 5절” 보면,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 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계속해서 “14절에서 19절” 말씀 읽습니다.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 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손을 안씻고 먹는 것에 대해서 더럽다고 정죄해요. 우리도 그러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오히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 니다.

복음은 뭐라고 말하냐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내 안에서부터 깨끗하여져서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 앞에 옳은 행실로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복음이란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으나 내 안에서 항상 나오는 것이 남에 대한 훼방과 교만과 악한 생 각과 음란과 남을 속이고 간음하고 탐욕하고 악독하고 수군수군거리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삽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법 즉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며 사는 것이 율법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설령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못했다 할지 라도, 설령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 와 사랑으로 복음 안에서 그들을 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남의 죄를 가려 주고 덮어 주고 용서해주고 그 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봐야 합니다. “나는 율법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복음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여러분,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는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주님이 오시기까지이고,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복음이라는 시스템안에 우 리가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옛 사람을 택해서 늘 남을 정죄하고 산다면 죄와 사망의 법 을 쫒아서 결국 사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복음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은 어떤 것인가 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정죄하지 않고 시비를 가리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기

 

를 원하시는데요. “요한복음 15장 12절”을 보세요.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은 주님의 새 계명이지요. 그죠?

누가복음 7장 36절에는 시몬이란 바리새인 집에 예수님이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셨는 데 그 동네에 사는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 시몬은 저 사람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 것이 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이 시몬의 마음을 알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 장 40절부터 48절”까지 읽어봅니다.

40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 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 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 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 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러분, 복음의 능력이 윗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그 죄를 주님께로 가지고 나오면 다 사함 받는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이 오시지 않고 율법만 있었다면 불교와 똑같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뭐라고 해요?

너는 죄인이고 너의 죄가 태산 같이 쌓여서 넌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고 우리에게 율법만 있었다면 불교와 비슷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율법으로 정죄 받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 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 안에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 자신도 그 복음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라는 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계명이지요. “내가 너희 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할렐루야!

우리는 분명히 이 복음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율법적으로 사는 것입니까? 왜 내가 율법 안에 사는 자처럼 살고 있느냐 말입니다.

왜 나의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는 모습은 왜 아 직도 율법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 안에 있으면 복음 안에 있는 자처럼 주님이 복음으로 우리를 용서했듯 이 우리도 복음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 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가복음 16장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 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아직도 사람을 대할 때 옳고 그름에 빠져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옳고 그름의 눈으로 보시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보셨어요. 우리의 눈도 주님의 눈처럼 그렇게 변해야 해요.

누구를 보든지 시비를 가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 다. 아멘입니까? 이것이 복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아직도 나의 모습이 옳고 그름 안에 빠져 있다면 복음 안에 사는 자가 아닙니 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려고 오셨어요. 그 복음이 나에게 적용이 되면 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 안에 살게 하실려고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은 결코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삶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아요. 아 직도 내 안에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아휴, 저건 틀렸어.” 이런 생각이 든다면 나는 율법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바뀌어져야 돼요.

어떻게 바뀌어져야 되냐 하면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볼 때 “나도 그랬어.

내 모습이 저 모습이었어.”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참아주고 기다려 주며 그 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될 때에 우리가 복음 안에 사는 그리스 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고 하나님도 속지 않습니다. 나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복음 안에서 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인가? 자기를 보시면 알잖아요?

내가 아직도 시비를 가리는 눈을 벗지 못하고 아직도 남을 보면 옳고 그름이 따져진 다면 나는 아직 몽학선생아래 즉 율법 안에 사는, 예수님 믿고 영원한 불못은 면했지 만 나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복음 안에 살게 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것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어요?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 용서하리이까?” 했을 때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씩 해라” 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자들은 고작해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이란 것이에요.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비교하자면, 일만 달란트는 일당을 1데나리온(100불)으 로 했을 때 10만년을 일해야 벌수 있는 돈입니다.

우리가 10만년은 살수도 없어요. 고작 100년 안팎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100데나리온은 3개월정도 일하면 벌수 있는 돈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에베소서4장 13절에서 14절” 보면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 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은 다른 일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용서와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데이트 할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부부가 되면 서로를 잘 알아요. 그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진짜 아는 거예요. 부부처럼 하나가 되어서 그분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 습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해요.

어린아이는 몽학선생 아래 있으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정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오직 사랑 안 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그에게까지 자란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것입 니다. 우리는 머리가 시키는데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머리를 그리스도로 잡은 자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결론적으로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우리 스스로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지만 내가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고 율법적으로 살 고 있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복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의 시스 템 자체가 이전과는 완전히 새롭게 변한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완전히 새롭게 변한 복음의 시스템 안에서 살기를 주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에게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입니까?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 믿는 자’란 뜻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지만 율법 안에 사는 자인지, 내가 복음 안에 사는 자인지 나 자신을 살펴보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용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가 나 타납니다. 그죠?

그의 삶에는 성령의 열매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 제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성령의 법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 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온 새로운 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주여 한번 부르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