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대인과 영성 II - 생명적인 삶 -서사라목사

하늘이슬 2024. 6. 25. 14:13

대인과 영성 II - 생명적인 삶

오늘 여러분과 제가 볼 것은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입니다.

여러분, 생명이라고 하면 생명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죠. 생명단계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생명단계라는 것입니다. 생명단계의 ‘정의’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인과 영성에 있어서 ‘대인’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이웃이죠. 이웃의 정의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어요.

이 소자의 의미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이 소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인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 중심의 삶을 말하는데요, 여기서 영혼이란 ‘영’을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혼동을 많이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혼’은 우리 뇌에 의한 지·정·의를 말하는데 3분법으로 말할 때는 영, 혼, 육(몸)으로 쓰지요.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떠나는 것도 ‘영’입니다. 그러 나 혼과 몸은 우리 육체가 살아있을 때 이 혼은 뇌의 작용으로 일어 나는 것이고 몸 은 오장육부가 있는 거지요. 근육과 살이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이것을 합쳐 서, 혼과 몸을 합쳐서 육신이라고 하지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영, 혼, 육으로 3분법을 쓰고 있어요.

그러나 대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영과 육신으로 2분법을 쓰고 있지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영혼중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영’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우 리의 ‘영’ 안에는 누가 와 계십니까?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와 계시지요. 그래서 생명단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영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적실재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영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영적실재의 삶을 사는 것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육신중심의 삶을 살고 있지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혼과 육에서 일어나는 모 든 것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셨어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시면 다 틀린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감정과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따라서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하 나님 앞에 원수가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진노하시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영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일례로 부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부는 어떻게 맺어집니까? 남편과 아내지요.

여러분이 아직도 남편이 영중심으로 느껴지지 않고 육신중심으로 느껴진다면 내가 영 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지요. 남편이 영으로 보여야 돼요.

남편을 영으로 사랑하는 자는 남편이 남편으로 여겨지지 않고 주안에 있는 형제로 여 겨집니다. 내가 남편이라고 생각하니까 서운하고 섭섭한 거예요.

그러나 남편이 형제로 여겨져야 내가 그를 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죠. 아내를 육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자매로 느껴집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부부간에 영적으로 성화가 되면 남편으로 느껴지지 않고 주안에서 형 제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장하셔서 남편을 육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대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이 영중심의 삶을 살아야 돼요. 이것이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실재의 삶이 언제 이루어지냐 하면 내가 생명적인 삶을 살 때 이루어지 죠. 생명적인 삶이 뭐냐 하면 나의 삶에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타나는 삶이 영적실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영성훈련을 통해서 대인과 영성의 본능단계 즉 본능단계는 ‘너 와 나’죠. 부부가 왜 깨어집니까? 그 사이에 하나님이 인정이 안되니까 너와 내가 성 격이 맞지 않다고 하고 깨지는 거예요.

대인과 영성의 윤리단계는 뭐예요? 하나님께서 그 사이에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 남편을 만나게 해주셨고, 아내를 만나게 해주셨다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맡겨진 자예요.

서로 어떻게 하라구요? 섬기라고요.

여러분, 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섬김을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섬기는 자가 복이 있어요.

섬김을 받을려고 하니까 헤어지는 거예요.

결혼은 왜 합니까? 우리가 몰랐을 때에는 그랬지만 이제 알게 된 상태에서는 섬기기 위해서 결혼하는 겁니다. 할렐루야!

언제까지 섬겨야 합니까? 평생이지요.

 

그럼 그 섬긴 상이 어디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있어요.

내 남편을 남편으로 보지 않고 내가 평생 섬겨야 할 형제로 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 러면 그 모든 상급이 하늘 나라에 있을 줄 믿습니다.

섬길 대상의 밭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먼데서 찾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대인과 영성 진리단계가 있고 생명단계가 있죠.

진리단계는 몸을 쳐서 복종하는 거예요. 이때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생 명은 그냥 흘러 나가는 거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살고 계시니까요.

내가 비켜나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살고 계시니까 예수가 나가는 삶이 생명단계입니다. 제가 다 되어서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이 잘 인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단계에 사는 사람은 예수님 같아야 돼요. 근데 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멀 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다 되어서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저를 본받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짜 멘토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멘토로 삼으셔서 열심히 달려 갈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단계 두 번째 정의는 대인과 영성에서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시비를 가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주 님의 마음을 본받는자라는 찬송처럼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사는 자가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조금 성장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시비를 안가립니다. 덜 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시비를 가리지요. 부부간에도 시비를 가리고 허물을 덮어 주지 못하고 밖에 가서 말하고 돌아다니고..

그러나 생명적인 삶은 이런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데 조금 성장되 면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서 시비를 안가립니다. 부부간에도 조금 성장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대방의 나쁜점들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조금 성장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조금 성장한 사람은 더 넓혀져야 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앞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장해 서 교회안에서는 입다물고 있고 시비를 가리지 않고 주님이 임재하는 것 같고 다 인 내하고 참고 바라고, 부부간에도 참고 바라고 믿고 인내합니다. 그런데 내 교회사람도 아니고 내 교회도 아닌곳에 가서 내가 억울한 일과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여러분의 모 습은 어떠한가 하는것입니다. 거기서도 넓혀 나가야 하는데요, 우리가 생명의 삶을 산 다는 것은 그 범위를 계속 넓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우리의 생명적인 삶은 더 넓혀져야 돼요. 할렐루야!

 

내가 시비를 안가리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시비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많은 고비를 넘어섰다는 것이에요. 근데 그 범위를 더욱 넓혀서 내 가족뿐만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도 시비를 가리지 않는 그 런 정도의 넓혀짐이 우리의 삶에 있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 대인과 영성에서 진리단계와 생명단계의 차이가 뭐냐 하면 진리단계는 하나 님의 말씀이 진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 안에 계신 하 나님께 물어서 행할 때 이것이 진리단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단계만 가도 여러분은 성공하는 거예요.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윤리단계에서 진리 단계까지만 가도 정말 승리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단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각과 지식이 넓혀져서 하나님이 내안 에서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지 느껴져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서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 은 그 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져서 그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길 원한다는 것을 그냥 알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움직임이거든요. 물어볼 필요가 없이 내 안에 계신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이 움직임이 느껴 지냐면 어떤 자매나 형제가 헐뜯고 다니는데 그가 밉지가 않은 거예요. 오히려 굉장 히 불쌍히 여겨지는 거예요. 이게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이지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안에서 일어나요.

이게 성령께서 내 안에서 그 마음을 나타내시는 거지요. 그죠? 그렇게 여겨질 때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그럼 스데반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잖아요.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스데반은 뭐라고 말했 어요.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생명의 마음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은혜 받은 것이 여러분이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조금 나은 것이 다른 사람보다 잘나서 조금 앞선다고 생각하 십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알게 해 주셨다면 그들이 그런 짓 을 하지 않죠. 그래서 스데반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에요.

 

주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생명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나 된 것이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닌 것을 알고, 그들이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그들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 삶이 생명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우리가 실수하는 것들이 있어요.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할수가 있는 데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말하죠.

여러분, 우리는 많이 참는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단번에 화를 내고 나는 참고 참다가 화를 내는 것의 차이가 뭘까요? 별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구요? 일곱 번 참다가 화를 내든지, 한번 참다가 화를 내든지 똑같다는 거예요. 그 마음 안에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곱 번 참다가 화를 낸다면 나는 아직도 시비를 가리는 자란 것입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이것이 무슨 말씀이에요?

하나의 죄에 대해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아예 시비를 가리지 말라는 말씀 이죠. 이것이 생명적인 삶입니다.

베드로는 잘난척 하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리이까 했지요.

베드로는 시비를 논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말씀하고 계시더란 것입니다. 성경 에 보면 우리가 시비를 가릴게 못되는 것이 우리는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이잖아 요. 근데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리 못된 짓을 했다 할지라도그들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다 할지라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하면요.

여러분, 백 데나리온과 일만 달란트의 차이 아시죠?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으로 100불이라 하면 백 데나리온은 3개월정도 모으면 되죠. 일만 달란트를 데나리온으로 계산하면 10만년을 모아야 해요.

우리는 백년도 못살고 가잖아요.

아무리 우리에게 누군가 잘못해도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은혜 받고 용서 받은걸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겁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나에게 못된 짓을 하고 손해를 입혔고 그와 상관없이 그들을 용서하며 생명으 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다같이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27절” 말씀입니다.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 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 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분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 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 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3절에서 보세요.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 며” 여러분, 이것이 섬기는 거예요. 영혼이 잘되어 있고 보기에 반듯한 사람은 안섬겨 도 괜찮아요. 뭔가가 부족하고, 정신이 이상한 것 같고, 정말 이상한 이런 사람들을 귀히 입혀 주라는 거예요. 이게 진짜 예수의 마음이거든요. 그들이 소자예요. 모든 이 웃이 소자라고 했지만 그들이 정말 소자예요.

그런 자들을 더 귀히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안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전체를 위한다면서 그들을 밀어내고 말이죠. 다 사람의 생각이에요.

성경에는 전체를 위해서 하나를 밀어 내라는 말씀이 없어요. 부족하고 병든 자를 더 신경을 써줘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밀어낸다고 한다면 성경의 말씀과는 반대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이 영성훈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최근에 느꼈는데요.

최근에 어떤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좀 큰 교회예요. 그런데 모든 교인들의 생 각하는 방향이 내가 잘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위에 계셔야 하는데 내가 먼저예요. 모든 신앙생활이 나를 위해서 하는 거 예요.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

 

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찬송받으셔야 하는데, 교인들의 주류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설정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예요.

그렇게 평생 한번 살아보십시오. 나를 위해서 산 삶밖에 안되는 거예요. 헌금을 위해서 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내가 축복받기 위해서 해요.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살피세요. 그 마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시잖아요. 나를 위해서 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천지차이예요.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 안에서도 조장시키고 교인들은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영성훈련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왜 LA에 영성훈련원을 세우셨는지 알겠어요. 저는 몇 년 동안 다른교회에 가보지를 않았어요. 열심히 영성훈련 시키면서 왔는데 한번 가봤더니

지금도 그 교회의 주류가 아직도 나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런 사람은 결코 진리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지요. 결코 진리적인 삶을 살 수가 없어 요.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어떻게 진리적인 삶을 삽니까?

생명적인 삶은 고사하고 자식이 복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그게 뭐예요? 이 땅위의 것을 구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나를 구하면서 사는 거예요. 말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주를 위한 존재라고 말해요.

나는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하면서 정작 삶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는 것은 나를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을 벗 어나서 정말 주를 위해 사는 삶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예요. 아멘.

고린도전서 12장 23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섬겨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24절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 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신다고 말씀하셔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부족 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해야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25절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 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이 생명적인 삶이거든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전체가 고통을 받으니까 그 한 사람을 밀어내 버리는 거예요.

 

성경은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전체가 고통을 받더라도 그걸 치유하라는 겁니다. 그 과정이 힘들죠. 힘들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힘들어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요. 아멘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적용이 되지만 전체적인 삶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 니다. 일례를 들면, 어떤 지체가 예배를 방해하는 경우가 생겨요. 그것을 보다 못한 교인들이 그 지체를 밀어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럴때에도 하나님께 먼저 물어 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해야죠.

우리가 사랑을 베풀려면 얼마만큼 해야 되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해야 됩니 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하실 때 해야 괜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람의 생각으로 그런 지체들을 밀어 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에서는 지체의 개념이 나에게 실재가 됩니다.

저 못된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나의 지체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믿건 안믿건 성경은 그가 우리의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믿건 안믿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 생각은 다 틀렸고 하나님 말씀만이 옳은 거예 요. 할렐루야. 그는 이미 지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체의 개념이 실재가 되어져서 그가 아프면 내가 아픈 것으로 느껴져야 돼요. 그 런 자가 생명단계에 있는 자예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생명단계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아직 생명단계에 가질 못했기 때문에 이전 단계를 조금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어떻던가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 형제와 자매를 용 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쉽던가요? 어렵던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화를 내지 말 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무슨일이든지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정의합니다. 두 번째, 성경에서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으므로 화를 내지 말아 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기 때문에 화 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들을 드러내 십니다. 그렇게 드러난 나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애통해야 합니다. 나 의 모습을 가지고 애통할 때 어떤 위로가 오는가 하면

“봐라. 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것을 발견케 하십니다.

그럼 누구의 힘으로 됩니까? 예수님 마음으로 되지요.

우리는 결국 내가 사랑할려고 해도 안되니까 예수님께서 ‘나’ 로 하라고 하시는 거예 요. 이것이 이기는 생명이죠. 그럴 때 내 안에 빛이 들어오고 평강이 임할줄로 믿습 니다. 그래서 애통을 많이 해야 해요. 그래야 생명의 삶으로 넘어갈 수가 있어요.

 

우리가 오늘 대인과 영성의 생명단계의 정의에 대해서 봤는데요.

대인과 영성의 본능단계가 있었죠. 여기는 아예 하나님이 없죠?

윤리단계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모든 이웃이 나에게 오는 것은 하나님께 서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도, 부당한 일도, 억울한 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거예요.

윤리단계에서는 나를 헐뜯고 손해를 입힌 자가 파트너의 개념으로 오죠. 그는 나를 깨뜨리기 위한 파트너예요.

그래서 윤리단계에서는 자아파쇄 훈련을 열심히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드러내는데 파트너가 사용되죠.

그러면서 그 이웃이 나의 파트너로 여겨집니다. ‘그 파트너로 인해 나의 더러운 것을 드러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고치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입니다.

진리단계로 가면 이 파트너의 개념을 넘어서서 섬기는 대상이 됩니다.

“아! 그렇구나. 저 못된 사람을 하나님이 섬기라고 보내주셨구나!” 할렐루야! 섬기는데까지 나아가는 거예요.

윤리단계에서는 파트너 역할만 해도 감사하고,

진리단계에서는 내 안에 있는 것 들을 처리하고 나서 파트너를 섬김의 대상으로 섬기 며 나아갑니다. 아무리 나를 찔러도 섬기고 아무리 나에게 못되게 굴어도 섬기고 내 가 이제 섬길 밭을 발견한거예요. 이게 진리단계예요.

그리고 오늘 생명단계를 나눴습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이 나가는 단계지요.

“마태복음 25장 34절에서 36절” 보겠습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 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 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 느니라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 십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모든 소자들.. 잘 먹이시고 잘 입히시고 잘 마시게 하시고 찾아 보고 돌아보게 하시고 그렇게 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한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