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과 영성 II - 이기는 생명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주여 한번 부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면 그것을 내려놓겠습니 다”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여 주시고 들려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주여 다 같이 부릅니다.
할렐루야 아버지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 합니다.
늘 우리에게 보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깨닫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그것을 버리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처리하고자 우리에게 많은 사건과 문제를 일으키고 계신 줄 믿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반드시 그것이 처리되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 름다운 모습들로 빚어지게 도와주시옵소서.
할렐루야! 하나님, 우리 육신은 괴롭다 할지라도 우리 영은 기뻐할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를 고쳐 주시고 우리가 변화 받게 도와주시고 또 변화될 것을 하나님 앞에 다짐 합니다.
주여, 우리가 깨어지길 원하고 더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하고 더 생명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희들이 빚어지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이기는 생명에 대해 보겠습니다.
저기 뒤에 책도 있죠? ‘이기는 생명’ 워치만니가 쓴거죠. 생명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이기고 승리합니다. 생명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죠.
여러분, 내가 승리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누굴까요? 나의 가장 큰 원수는 ‘나’입니다.
진리를 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가 사단이 아니라 ‘나’예요. 내가 진리를 행하지 못하게 가장 원수짓 하는 게 ‘나’란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공연히 사단 탓을 합니다.
어떤 곳에 가면 사단만 쫒고 있어요. 정작 문제는 ‘나’입니다.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찌꺼기를 처리하고 나면 사단은 오라고 해도 안 옵니다. 쓰레기통에 쥐들이 들랑날랑 하지 않습니까?
쓰레기통이 깨끗하게 비어 있으면 쥐가 올까요? 안 올까요? 안 옵니다. 그런데 쥐가 바글바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쓰레기통 안에 음식찌꺼기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을 치우면 쥐는 안 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욕심, 탐욕, 탐심, 감정, 혈기, 나의 못된 자아와 같은 것들이 없 으면 악한 귀신들을 오라고 해도 안 와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나’를 처리하면 사단은 오라고 해도 안 옵니다.
대개 일이 잘못되었을 때 10분의 9는 ‘나’가 원인이고 10분의 1만 사탄이에요. 나 때 문에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사탄이 나를 유혹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정작 내 안에 미끼 될 것이 없으면 사탄도 오 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가장 원수 되는 것은 사탄이 아니 라 ‘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나하고의 싸움이 언제 가장 힘든가 하면 윤리단계입니 다.
윤리단계에서는 내 영의 생각을 쫒고자 하는 것과 육신의 생각을 쫒고자 하는 힘이 비슷비슷해요.
영의 힘과 육신의 힘이 비슷비슷해요.
여러분, 씨름을 하면 누가 이겨요? 힘센 자가 이기잖아요.
그런데 영의 힘과 육신의 힘이 각각 50%, 50% 일 때가 윤리단계예요. 그래서 ‘나’ 하고의 싸움이 극심해요.
윤리단계에서 영의 힘이 51%가 되고 육신의 힘이 49%가 되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여러분이 영성훈련 받은 지 1년이 되는 때입니다.
이때 여러분의 영의 힘이 1% 육신을 능가하는 때입니다. 이때를 우리가 “여리고성이 무너진다” 고 말해요.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가장 견고한 성은 여리고성이었어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심령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분 안에 있는 가장 큰 여리고성 즉 가장 질긴 부분이 딱 무너지고 나면 영의 힘이 51%, 육신의 힘 이 49% 예요.
그러면 지금 여기 와 있는 여러분의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거의 예외가 없습니 다. 처음 영성훈련에 왔을 때 어떤 모습인가 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영으로 사 는 모습이 20~30%, 육신으로 사는 삶이 70~80% 정도 돼요.
워치만니가 ‘영에 속한 사람’ 이라고 상, 중, 하, 로 책을 썼잖아요.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가 영의 힘이 51%가 되는 순간부터예요. 여러분이 1년 정도 되면 영의 힘과 육신의 힘이 거의 반 정도 돼요.
여러분이 더 성장하여 3년 정도를 마치게 되면 영으로 사는 것이 60~70%, 육신으로 사는 삶이 30~40% 이 정도로 여러분이 바꿔집니다.
그럼 이 portion들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예를 들어 열가지 사 건이 생겼어요. 열개의 사건 속에서 여러분이 3년 정도 마칠 때 쯤 되면 영에 속한 사람은 7번은 승리하고 3번은 넘어집니다.
3번은 육신으로 치고 받습니다.
각 사람마다 어떤 부분에서는 약해요.
그래서 성장해도 그 부분에서 계속 넘어져요.
열 가지 사건 속에서 영으로 사는 삶이 70% 라는 말은 10번 중에서 7번은 이기고 3 번은 넘어진다는 의미죠.
그러면 여러분이 이 훈련에 처음 왔을 때는 어떻다는 거예요? 10개의 사건이 있으면 2~3번은 승리하고 7~8번은 넘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훈련을 통하여 이 portion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왜 바뀌어야 하는가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의 인생의 길이 속에서 심판을 받을 때 영으로 산 삶이 얼마인지, 육신으로 산 삶이 얼마인지가 결정되어지죠.
여러분이 바뀌어서 인생을 사는 것하고 그대로 사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살아드린 삶만 하나님은 count 하십니다.
그러면 육신으로 산 삶은요?
다 사망의 삶이에요. 하나님은 그것은 count 안 하십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이에 요. 죽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사데교회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정작 죽은 자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하셨 지요.
죄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육신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의 의미는 영으로 사는 삶은 생명의 시간으로 기록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영성훈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돼요.
전에 어떤 분이 영성훈련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셨는데 그분이 참 귀한 말을 하고 갔 어요. “목사님, 이 영성훈련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 네요.” 그 분은 그것을 깨달은 거예요.
여러분, 영성훈련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예요. 모든 스케쥴을 다 미루고서라도 와야 돼요.
여러분, 저는 영성훈련을 받을 때 모든 약속을 영성훈련시간에는 안 잡았어요. 어떤 약속도 안하고 여행도 안 갔어요.
왜냐구요? 죽고 사는 문제니까요.
그런 열성이 없이는 여러분에게 영성이 제대로 입혀지기 어렵죠. 저도 영성훈련 받을 때 아침저녁으로 쫒아 다녔어요.
영성훈련 있는 시간을 다 쫒아 다녔어요. 왜냐구요? 사모했기 때문에요.
겨우 1주일에 한번 있는 시간을 갈까 말까 하고 온다면 어떻게 영성이 입혀지겠습니까?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에게 영성을 입히시겠습니까? 모든 삶이 그럴 텐데요. 영과 육신을 대하는 삶이 그럴 텐데요.
인식이 그럴 텐데요. 어떻게 영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바꾸시겠느냔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진정성이란 것 있잖아요? 한결같음, 진실함요. 여러분이 삶에서 진실함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여러분, 누가 승리하는지 아세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에요. 한결같은 사람이 뭔가를 이루어요.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자 함이 아니지만 영성을 이루려면 한결같아야 돼요. 한결같이 추구해야 내게 영성이 입혀지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영성훈련하러 오라고 하는 데는 나를 주지 않고 주님을 주고자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결국 누가 승리하는가 하면 진실하고 한결같은 사람, 정말 나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깨어지기 원하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나는 그것을 다 적용시키고 싶지 않아요. 틀릴 수도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결코 적당히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시더라구요.
내가 적당히 살고 싶으면 “그래? 나도 적당히 할게.” 이러시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적당하게 대접하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적당하게 대접합니다. 끝까 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주시고 입혀주십니다.
여러분이 영성을 적당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입혀지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도 “어찌 내 마음을 이렇게도 몰라 주냐” 그러실 것 같아요.
제가 영성훈련 다닐 때 보면 영성훈련 강사들은 절대로 전화 안 해요. 오든 안 오든 너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너가 세워지고 싶으면 오고 떨어져 나가고 싶으면 떨어져 나가라는 식이에요.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아요.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이기는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여김’의 훈련을 해야 돼요.
로마서 6장 11절부터 13절까지 보겠습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 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 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 께 드리라
이기는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여김’의 훈련을 해야 되는데 “내가 죄에 대해서 는 죽었다”라고 여기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 ‘여기라’는 말을 할까요? 안 믿어지니까요.
내가 매일 죄를 짓고 사는데 내가 어떻게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에 대 해서만 산자로 여길 수 있어요?
안 믿어지니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김’의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 이 안 믿어지잖아요?
그 말씀이 안 믿어지니까 먼저 그렇게 여기라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여기라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이나 어떤 단체에서 어떤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은 참 보배다.” 라고 할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이 그렇게 안 보이는데 보배라고 여기기 시작하면 나중에 진짜 그 사람이 보배로 보여요.
무슨 얘긴지 알죠?
그래서 여기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죄에 대해 죽은 자가 아닌데 죽은 자라고 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훈련을 계속 하다 보면 이것이 나중에 믿음으로 들어온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첫 번째는 ‘여김’의 훈련을 해야 되고 두 번째는 ‘믿어드리는’ 겁니다.
믿음이 오면서부터 믿어드리는데 그 다음에는 내가 믿기 때문에 순종이 됩니다. 이렇 게 차례대로 일어난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안 믿어지니까 ‘여김’의 훈련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믿음이 오니까 내 몸이 순종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기는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김’의 훈련을 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무 엇이 필요한가 하면 ‘절망’이 필요합니다.
이 ‘절망’은 누구에 대한 절망이냐 하면 나에 대한 것이에요. 우리는 자신이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사람이란 것을 발견하고 나서 자신 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는 결코 이기는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먼저 절망해야 돼요.
“나로서는 안 되는 자구나!” “나로서는 절대로 안 되는구나!” 이것을 알아야 돼요.
이 절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고는 결코 절망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지 않고 대충 편하게 넘어가고, 적당히 죄짓고 살고 그 러잖아요.
그러나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봐야 절망하게 되어 있고 절망을 한 자라야 내 힘으 로 하려는 것을 내려놓게 되어 있어요.
절망 끝에는 내 힘으로 하려는 것을 내려놓게 되고 그럴 때에 나에게 ‘여김’이 들어 오는 거예요.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내려놓으니까 “아, 나는 죽은 자구나!” 라고 여겨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내 힘으로 하려는 힘 때문에 “하나님이 너는 죽었다.” 라는 말씀이 들어 오지 않아요.
내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고, 내 힘으로 주의 일 하려고 하고 내 힘으로 뭔가를 하려 고 할 때는 주님이 전혀 힘을 쓰실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주님이 나타나실 수가 없어요.
절망까지 가서 내 힘이 완전히 빠져야 내가 완전히 포기되어져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해야 해요.
우리 육체에서는 절대로 선한 것이 나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만 선하세요.
하나님만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만 선한 것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육체로 하려고 하는 모든 힘이 빠지지 않고는 하나님이 시작하지도 않더 라는 거예요.
여러분이나 저나 많은 절망을 거쳐서 오직 주님으로만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돼요. 할렐루야!
이기는 생명에서 차례가 있죠.
처음에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되고 절망이 오고 나로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여 기는 훈련으로 들어가고 믿어지고 순종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여러분,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랬어요.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는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있죠. 나는 죽었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예수와 함께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주님만 죽으신 게 아니라 나도 죽은 것을 기억하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두 가지의 의미를 기억하고 날마다 죽는 훈련을 하지 않 으면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진리의 삶이죠.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라도 복종하는 삶인데 이것은 생명의 삶의 시작점이라 는 것입니다.
진리의 삶은 생명의 삶의 시작점이에요.
진리의 삶과 생명의 삶의 차이점은 진리의 삶은 억지로라도 복종시키는 것이고 생명 의 삶은 그냥 흐르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은 그냥 흐르는 것이 삶이 되어 버린 삶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까 놓친 부분인데 윤리단계와 진리단계는 나와의 싸움이 있어요.
윤리단계는 그 싸움이 극심하고 진리단계는 나를 포기하고 나를 많이 내려놓았기 때 문에 그나마 나와의 싸움이 조금 덜합니다.
그러나 생명단계에 가면 나와의 싸움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삶이 내 삶이 되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통 해서 사시기 때문에 나와의 싸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생명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높은 단계의 삶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와의 싸움이 없는 삶이에요.
그냥 내 안에서 주님이 평범하게 사는 삶이에요.
저도 이 삶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가자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훈련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훈련이 안됩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왜 이 삶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가?”
“왜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 안 되고 이 힘든 훈련을 해야만 하는가?” 예요. 계시록에 보면 이기는 자의 삶에 대해 나오죠.
어떤 분은 계시록2장과 3장은 외우라고 얘기합니다.
여기에는 일곱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마지막 부분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가 하면 “반드시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어떻게 하리라” 고 하시죠.
이기는 자가 되면 소망이 있잖아요?
“아! 내가 이기는 자가 되면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겠구나” 이런 소망이 생기는 거 예요. 그래서 2장과 3장을 외우라고 하시는 분도 있어요.
제 생각엔 참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이기지 못하는 자는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로 가는 거예요. 우리는 육신으로 살지 말아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하는 거예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훈련이 안되느냐가 문제예요.
첫째 이유가 환경을 환경으로만 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환경에서 많이 말씀하십니다. 환경은 100%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왜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되었나?” “왜 저 애가 내 아들이 되었나?” 전부 100%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하나님은 “모모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만 들리는 것이 아니예요. 환경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바꿀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환경으로 때려 버리십니다. 천둥처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해 요. 이 환경을 환경으로만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 이 안 되는 거예요.
환경은 누가 조성하신다구요? 하나님이시죠.
우리가 훈련되기 위해서는 환경을 하나님의 손길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붕어빵 어떻게 만들어요?
붕어빵 만드는 틀이 있고 반죽을 넣고 팥앙금 넣고 그 위에 반죽을 더 부어서 틀로 덮고 앞뒤로 뒤집어가면서 구우면 붕어빵이 나오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붕어빵을 만들어내는 틀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내고 싶으신 거예요. 그렇게 우리를 빚어내고 싶으신 거예요.
그래서 그 틀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는데 그 틀이 뭐냐 하면 환경을 조성해 주신다 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으라는 거예요.
우리는 어리석어서 환경 탓을 하고 사람 탓을 해요.
변명하려 하고 남 탓하고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을 모르고 말예요.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자기 사랑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훈련이 안됩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 항상 나의 유익과 이익과 편안함을 따지기 때문에 훈련을 훈련 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요.
여러분, 주를 위해 산다고 하는 자는 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 럴 때 자기 사랑을 버릴 수가 있어야 돼요.
자기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돼요. 내 가정이 교회거든요. 가정에서부터 자기사랑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주의 것이 되어야 돼요. 여러분이 영성훈련 받을 때 자기사랑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 자기사랑은 정말 쓸모없어요.
헛되고 죽고 썩어 없어질 것이고 상 받지 못하고 면류관 없고.... 그런데 그것을 뭐하러 끝까지 붙잡고 있습니까?
빨리 버려야지요. 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나의 가장 큰 원수가 누구라고 했어요? ‘나’죠. 나를 버려야 해요.
내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우린 훈련될 수 있어요. 나를 선택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비반에서 주관적인 구속사와 객관적인 구속사를 얘기했어요. 객관적인 구속사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거예요.
주관적인 구속사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지는 얘기에요. 내가 빚어지는 이야기에요.
사단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예수를 믿지 않는 곳에서 견고한 진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사단이 온갖 짓을 다하고 있고,
또 사단이 하는 일 중에 한 개인에게 있어서 한 개인이 성화되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 을 좇아 살지 못하도록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으로 유혹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합니다.
사단도 이 두 가지 일로 참여하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해요?
“사단을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피하리라” 이것은 주로 객관적인 구속사에 대한 말입니다.
사단이 객관적인 구속사에서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할 때는 대적해 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예수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관적인 구속사에서 내가 성화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과정속에서 사단이 하는 역할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관적인 구속사에서는 사단을 탓하지 말고 나 를 고치라는 거예요.
객관적인 구속사에서 방해하는 사단은 무조건 대적하여 완전히 궤멸시키도록 예수이 름으로 대적해야 하지만, 주관적인 구속사에서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사단을 탓하고만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나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 많아요.
이것을 잘 분별하셔서 내가 고쳐져야 하는 그 상황에서 사단을 탓하고만 있지는 말라 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를 고치고 그 다음에 사단을 쫒 아내야 됩니다. 내가 고쳐지면 사단도 물러가요. 사단도 안와요.
10분의 9는 ‘나’책임이에요. 사단을 탓할 것은 10분의 1이죠.
여러분 스스로를 사단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훈련하여 많이 변화될 수 있도록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모래위에 집 짓는 자와 반석위에 집 짓는 자의 얘기가 나오죠. 모래위에 집 짓는 자는 다 떠내려가고 반석 위에 집 짓는 자는 그대로 있죠.
모래위에 집 짓는다는 의미는 육신대로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반석 위에 집 짓는 자는 영을 쫒아 사는 자죠.
예수가 기초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심령 속에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집 짓는 자 가 있고 내 육신을 기초로 하여 집 짓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 반석위에 집을 짓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성훈련 아홉달째 대인과영성 II 4-1 훈련 II/서사라목사 (0) | 2024.06.29 |
---|---|
영성훈련 아홉달째 대인과영성 II 3-3 두 가지 허상/서사라목사 (0) | 2024.06.29 |
영성훈련 아홉달째 대인과영성 II 3-1 훈련/ 서사라 목 (1) | 2024.06.29 |
대인과 영성 II - 정의-서사라목사 (0) | 2024.06.25 |
대인과 영성 II - 구속사적 영성서사라목사 (0) | 2024.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