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과 영성Ⅱ
1-4.생명적인 삶
이 찬송이 남의 얘기인 것 같지만 다 우리의 얘기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여러분이 가는 그 길이 주를 위한 길인지 나를 위한 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하나님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 길이 나를 위한 길이였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는 정말 주를 위한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한번 부릅니다.
주님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 목숨 다하리라 사명 다하리라 아버지 하나님 맹세하고 결단하고 그렇게 주를 위해 살아왔다라고 말하고 싶은 주님 보시기에 주님 영광 뒤로 하고 모든 것이 나의 자랑이였다면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주님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나의 길을 가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길을 가리라 모든 영광 주님께 우리는 정말 숨고 주님께 모든 영광 주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 모든 영광 주님께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는 우리의 길이 주를 위한 길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주여 감사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동일한 실수와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시고 주님만 홀로 영광받으시고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주를 위한 길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결심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우리 장집사님 기도하시고 시작하겠습니다.
크게 기도해 주세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한번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과 제가 볼 것은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입니다.
지난 달에는 물질과 영성 생명단계를 나눴지요.
이번 달에는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생명은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이시죠.
그래서 생명단계하면 다른 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생명단계라는 것입니다.
오늘 생명단계의 정의에 대해서 대인과 영성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인과 영성에 있어서 대인이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이웃이죠. 그죠.
이웃의 정의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이죠.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 되죠.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소자는 어느 누구가 소자가 기고 아니고 이게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이 소자인 것입니다.
“소자에게 한 것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그래서 생명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인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느냐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영중심의 삶, 여기서 영혼 중심의 삶은 “영”을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많이 혼동을 많이 하죠.
여기에서 혼은 무엇이냐면 영혼 우리 뇌에 의한 지정의는 그래서 우리는 삼분법을 할 때에는 영 혼 몸을 쓰죠.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잖아요.
우리가 죽으면 떠나는 것도 영입니다.
그러나 혼과 몸은 우리 육체가 살아있을 때에 이 혼은 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거고 우리 몸은 오장육부가 있는 거죠. 그죠. 근육과 살이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이것을 합쳐서 육신이라고 하죠. 육신. 혼까지 합쳐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혼육을 쓰고 있기도 하고 삼분법을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 “너희 몸과 혼과 육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그 날에 흠없길 원하노라”
거기는 삼분법을 쓰고 있지만 로마서에서는 영과 육신, 이분법을 쓰고 있지요.
여기에서 얘기하는 영혼중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영을 얘기합니다.
이 영은 이 영안에는 누가 와 계세요? 성령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와 계시지요.
그래서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영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실제의 삶을 산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영적 실제의 삶.
영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영적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육신 중심의 삶을 살고 있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혼과 육 이게 육신이잖아요.
우리에게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면 다 틀린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감정과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따라서 살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는 삶이에요. 진노하는 삶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영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요.
우리는 부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부부가 맺어집니까?
남편과 아내지요.
여러분이 남편이 아직도 영 중심으로 느껴지지 않고 육신 중심으로 느껴진다면 내가 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육신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이지요.
남편이 영으로 보여야 되요.
남편을 영으로 사랑하는 자는 남편이 남편으로 여겨지지 않고 주안에 있는 형제로 여겨져요.
내가 남편이라고 생각하니까 서운하고 섭섭한 거에요.
그러나 주안에 남편이라는 남편이 형제로 여겨져야 내가 그를 영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죠.
내가 아내를 육신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자매로 느껴집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부부간에 영적으로 이렇게 성화가 되면 남편으로 느껴지지 않고 주안에서 형제로 느껴져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장하여서 남편을 육체로 보는 게 아니라 육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으로 대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영중심의 삶을 살아야 되요.
이게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실제의 삶은 언제 이루어지냐?
내가 생명적인 삶을 살 때에 이루어지죠.
그러니까 생명적인 삶이라는 게 뭐냐면 나의 삶에 내가 나가는 게 아니라 예수가 나타나는 삶이 영적 실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타는 삶!
그래서 여러분 영성훈련을 통해서 대인과 영성 본능단계는 너와 나죠.
너와 나.
부부가 왜 깨어집니까?
그 사이에 하나님이 인정되지 않으니까 너와 나가 성격이 안 맞다 그러고 헤어지는 거죠.
본능단계는 너와 나죠.
윤리단계는 뭐에요?
하나님께서 그 사이에 있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내 남편을 만나게 해 주셨고 내 아내를 주셨다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맡겨진 자에요.
어떻게 하라고 맡겨진 자입니까? 섬기라고.
여러분 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섬김을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니까 헤어지는 거에요.
결혼을 왜 합니까?
우리가 몰랐을 때에는 그랬지만 결혼은 왜 하냐면?
섬기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섬기기 위해서. 언제까지요? 평생~~
섬기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 섬긴 상이 어디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있어요.
내 남편을 내 남편으로 보지 않고 정말 형제로 보는 거에요.
내가 평생 섬겨야 할 형제!
그러면 그 모든 상급이 하늘나라에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섬길 대상의 밭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한다.
먼데서 찾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래서 대인과 영성 진리 단계가 있고 생명단계가 있지요.
진리단계는 몸을 쳐서 복종하는 거에요.
이때에는 죄와 피 흘리기 까지 싸와야죠.
생명은 그냥 흘러나가는 거에요.
아예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고 계시니까 내가 비켜나고 예수님이 살고 계시니까 예수가 나가는 삶이 생명단계입니다.
저는 다 되어서 제가 다 되어서 강의하는 것이 아닌 것을 잘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명 단계에 사는 사람은 예수님 같아야 되요. 예수님 같아야 된다.
근데 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멀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되어서 강의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저를 본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누굴 본받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또 사도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멘토는 여러분 앞에서 강의하는 강사가 멘토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짜 멘토는 누구에요? 예수님 그리고 사도바울입니다.
그분들, 예수님과 사도바울을 멘토로 삼으셔서 열심히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단계 두 번재 정의는 뭐냐면 대인과 영성에서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라 시비라는 게 뭡니까? 옳고 그름이지요.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있는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찬송이 있죠.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사는 자, 이런 자가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에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옳고 그름, 여러분 조금 성장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시비를 안 가리죠.
덜 된 사람이 교회 안에서 시비를 기리죠.
부부간에도 시비를 가리고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바깥에 가서 말하고 돌아다니고 이게 시비를 가리는 그런 거잖아요.
교회 안에서 부부간에 옳고 그름...
근데 생명적인 삶은 이런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지요.
근데 조금 성장되면 교회 안에서는 시비를 안 가립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성장한 사람의 얘기에요.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나쁜 점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게 조금 성장한 모습이지요.
조금 성장한 사람은 그걸 덮어주는데 문제가 뭐냐면 우리가 더 넓혀져야 될 것은 뭐냐면? 우리가 생전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이게 문제라는 거에요.
여러분이 성장해서 교회 안에서는 입 다물고 있고 시비 안 가리고 주님이 임재하는 것 같고, 그리고 주님이 존재하는 것 같고 그래서 다 인내하고 참고 바라고 부부간에도 참고 바라고 인내하면 되는데, 근데 생전 우리 교회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닌 곳에 가서 정말 억울한 일과 억울한 일과 부당한 일을 당한 그때에 여러분의 보습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우리가 넓혀나가야 되면 우리는 생명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법위가 계속 넓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넓혀야 되잖아요.
우리의 생명적인 삶이라는 건 가정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더 넓어져야 해요. 할렐루야!
시비를 안 가리는 거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내가 시비를 안 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단 내가 고비를 한 고비를 넘어선 사람이에요. 시비를 안 가리는 거.
이제 그거를 더 넓혀서 내 가족뿐 아니라 여러 번 만나는 자주 만나는 이웃들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데 가서도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있는 넓혀짐이 우리 삶에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대인과 영성에서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 대인관계에 진리와 생명의 차이가 뭐냐?
진리단계와 생명단계의 차이가 뭐냐?
진리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이 진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리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 물어서 그 뜻을 물어서 사는 게 진리단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단계만 가도 성공하는 거에요.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윤리단계에서 진리단계 까지만 가도 정말 승리하는 거에요.
그런데 생명단계는 뭐냐면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넓혀져서 하나님이 그냥 내 안에서 느껴져요.
어떻게 하기를 원하심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느껴집니다.
이게 성령의 움직임, 내안에 있는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서 사는 거에요.
왜냐하면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져서 그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이 알게 해 주세요. 그냥. 어떻게 하기를 원한다는 걸...
이게 성령의 움직임이거든요,.
그래서 물어볼 필요없이 내 안에 계신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단계에 있는 사람의 대개 보면요 어떻게 움직임이 느껴지냐면 예를 들어서 한 예를 들자면 어떤 자매나 어떤 형제가 계속 나를 헐뜯고 돌아다닌다, 그런 경우 있지요?
아무리 잘해줘도 그 마음이 왜곡되어진 사람은 헐뜯고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헐뜯고 돌아다녀도 밉지가 않은 거에요. 아무리 헐뜯고 돌아다녀도 밉지가 않아요. 그럴 때 어떤 생각이 드냐면 믿지가 않고 오히려 그 삶이 그 형제가 진짜 불쌍히 여겨지는 거에요.
이게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이지요.
그 마음이 안에서 일어나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이게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내 안에서 나타내는 것이죠.
그렇게 여겨질 때 그렇게 살면 되는 거에요.
이게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에 있는 그런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을 보면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잖아요.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에 스데반은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마음이 생명의 마음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냐구요? 그들이 모르기 때문이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은혜 받은 거, 그게 여러분이 잘나서 은혜 받은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여러분 된 게 여러분이 잘나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갑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알게 해 주셨다면 그들이 그런 짓을 하지 않지요.
그래서 스데반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한 것이지요.
이게 주님의 마음이잖아요.
주님도 똑같은 얘기를 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생명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모르는 그들, 나의 나된 게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닌 걸 알게 되면 그들이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그들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 삶이 생명적인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 거라는 거죠.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한테 뭐라고 했느냐면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을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여러분 우리가 참 실수하는 것들이 있어요.
성장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럴 수가 있는데 베드로가 그 얘기를 합니다.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여러분 우리는 많이 참는다 생각하잖아요. 그죠!
다른 사람들은 한번 만에 화를 내죠.
그렇지만 나는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화를 낸다....
그런데 별 차이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왜냐? 일곱 번 참다가 화를 내던지 한번 참다가 화를 내는 것 똑같다는 거에요.
왜? 그 마음 안에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요.
그럼 나는 일곱 번 참다가 화를 낸다 나는 아직도 시비를 가리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그랬나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그럼 이게 몇 번이에요? 490번이죠.
하나의 죄에 대해서 똑같은 동일한 형태의 죄에 대해서 490번을 용서하라는 얘기는 아예 시비를 가리지 마라는 거에요. 시비를 가리지 마라.
이게 생명적인 삶이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잘난 척하면서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시비를 논하고 있지만 주님은 생명을 말씀하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요 우리가 시비를 가릴게 못되는 게 뭐냐면 우리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잖아요.
근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아무리 못된 짓을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들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그것은 백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탕감받은 거 생각하면 말이지요.
여러분 일만 달란트와 백데나리온 차이를 아시죠? 그죠!
얼마만큼 차이가 나냐면 백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인 백달러, 만불이지요.
만불은 3개월만 내가 안쓰고 모으면 모여지죠.
근데 일만달란트를 데나리온으로 계산하면 10만년.
여러분 몇 년 살고 가요? 100년도 못살고 가잖아요.
아무리 우리에게 잘못해도 그들은 우리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은혜받은 거 생각하면 나같은 죄인 용서해 준거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런 마음으로 살아라는 겁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나에게 못 된 짓을 하고 아무리 나에게 손해를 입혔고 그것과 상관없이 여러분이나 저나 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며 생명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성경말씀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12장13절-27절 말씀입니다.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아~~저 사람은 왜 저 짓하고 돌아다니지? 왜 저 사람은 왜 꼭 저렇게 살아야 되고, 정말 같이 예수 믿는 형제자매인데 저 형제는 내 눈 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고 근데 그런 사람도 뭐라는 거에요? 한 몸이라는 거에요.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보기 싫고 아무리 다시는 상대하기 싫고 그런 사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 믿으면 다 한 몸이 되었다는 거에요.
1
4절 다같이 시작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자 여기 보세요.
우리가 몸에 덜 귀히 보이는 그것들을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여러분 이게 섬기는 거에요.
여러분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영혼이 잘 되어 있고 보기에 반듯한 사람들은 안 섬겨도 괜찮아.
그러니까 더 정말 부족하고 정신이 이상한 것 같고 정말 이상하고 이런 사람들을 뭐라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을 귀히 입혀 주라는 거에요.
근데 진짜 그게 예수의 마음이거든요.
그게 정말 소자거든요.
다 이웃이 소자라고 했지만 정 말 그런자가 소자거든요. 그런 자들을 더 귀히 입혀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전체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말이에요 밀어내고 그건 사람의 생각이에요.
성경의 말씀은 전체를 위해서 하나를 밀어내라는 것이 없어요.
부족한 자를 더...
여러분 몸에 병이 들면 그것을 무시합니까? 아니면 더 신경을 씁니까?
더 신경을 써줘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밀어낸다고 한다면 그건 오히려 성경의 말씀과는 반대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영성 훈련이 얼마나 귀한지를 또 스스로 느꼈는데요.
최근에 큰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근데 모든 성도들이 교인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 다 하는 거에요.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위에 계셔야 하는데 내가 먼저야...
그러니까 모든 신앙생활이 나를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근데 이사야 43장 21절 보면 “내가 내 백성을 지은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찬송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찬송 받는데는 전혀...
주류가 내가 서 있는 길이 그 길이 되어져야 되는데 엉뚱한 길에 서 있더라는 거에요.
그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설정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 한번 살아보십시오.
나를 위해 산 삶밖에 안되는 거에요.
헌금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해요.
내가 삶에 축복받기 위해서요.
하나님은 동기를 살피잖아요.
그 마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잖아요.
나를 위해서 하는 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천지차이에요.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에요.
근데 그걸 교회 안에서도 조장시키고 또 그걸 따라가고 그러면서 제가 느낀 것이 영성 훈련이 참으로 귀하다.
하나님께서 왜 이 영성훈련을 이 LA에 세웠는지를 제가 알겠어요.
저는 다른 교회 몇 년 동안 가 보질 못했어요.
그냥 열심히 영성훈련 시키면서 그랬는데 한번 가 봤더니 지금도 그 교회 예를 들어서 주류가 아직도 나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진리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지요.
진리적인 삶을 살 수가 없어요.
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적인 삶을 삽니까?
생명적인 삶은 고사하고 자식이 복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그게 뭐에요? 그게 이 땅위에서 내가 구하는 거에요.
이 땅에서 나를 구하며 사는 거에요.
말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주를 위한 존재입니다.
나는 주를 위해 생명 받치고 나는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면서 정작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 오신 이유는 그걸 바꾸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할렐루야.
나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주를 위한 삶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 아멘.
그래서 여기 보면 귀하지 않는 덜 귀한..
그러니까 23절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섬겨야 된다는 거죠.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24절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신다는 거에요.
우리가 그렇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요.
내가 아무리 나는 안 그런데요. 안 그럴 것 같은데요.
그게 통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라 그러면 더해야 하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래서 25절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이게 생명적인 삶이거든요,
만약 한 지체가 아프다 그러면 모든 지체가 다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거에요.
근데 전체가 고통을 받으니까 그 사람 밀어내 버리는 거에요.
이것은 성경적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전체가 고통을 받더라도 그것을 치유하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힘들죠.
힘들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힘들어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요.
이게 개인적인 삶에도 적용이 되지만 전체적인 삶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이~ 이런 질문이 생겨요?
어떤 지체가 예배를 방해한다.. 지체는 지체니까 예배를 방해하고 이를 보다 보다 못해서 밀어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다들 들어왔어요. 그래도 하나님께 먼저 물어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우리가 사랑을 언제까지 베풀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해야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라 하실 때는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람의 생각으로 그런 지체들을 밀어내지 말라는 것이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6-27절)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에서는 어떻게 되냐면 이 지체의 개념이 실제가 됩니다.
지체의 개념이 나에게서 실제가 되는 거에요.
여러분이 저 못된 사람이 나에 지체다 그리스도 몸 안에서 나의 지체라고 믿건 안 믿건 성경은 우리의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건 안 믿건 상관없는 거에요.
내 생각은 다 틀렸고 하나님의 말씀만 옳은 거에요.
이미 지체가 되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지체의 개념이 실제가 되어져서 그가 아프면 내가 아파야 되요.
그가 아픈 것이 내가 아픈 것으로 느껴져야 되요.
그런 자가 생명 단계에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지금 생명단계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가 다 생명단계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전 단계를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어떻든가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여러분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 그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기가 쉽든가요? 어렵든가요?
아니 내가 잘못했으면 괜찮은데 나는 전혀 아무리 봐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형제자매가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러면 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쉽드냐 말입니다. 왜 다 말을 안해요? 다들 쉬운가 보죠.
우리 장집사님 쉽죠? 이지에요...그렇구나...
쉽지가 않으니까 하는 얘기지요.
부당한 일과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
첫째 성경에 성을 내는 것이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주를 위해 살고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간에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성경에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어라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부당한 일과 억울한 일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들어내실 때에 드러난 나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애통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애통해야 됩니다.
그럼 주님 앞에 앉아서 애통하면 위로가 임한다고 했잖아요. 위로...
정말 나의 모습을 놓고 애통을 할 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데 어떤 위로가 오느냐? 주님 앞에 와서 애통해야죠?
어떤 위로가 오냐면 ‘봐라~ 니 힘으로 되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로를 주십니다.
‘니 힘으로 되는게 아니다...’
우리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것을 발견케 하시는 거에요.
그럼 누구의 힘으로 됩니까?
예수님 마음으로.
우리 안에는 결국 내가 사랑하려고 하니까 안되니까 “나(예수)로 하라”는 거에요. “나(예수)로 하라” 이게 뭡니까? 이기는 생명이죠!
이기는 생명, 나(자신)로는 안 되니까 주님이 위로하시는 것이 “그래 나(예수)로 해 보라”는 거에요.
예수님으로 해 보라는 거에요.
그럴 때 여러분 마음 안에 빛이 들어오고 평강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애통을 많이 해야 되요.
그래야 발전이 있는 거에요.
그래야 생명의 삶으로 넘어갈 수가 있어요.
우리 대인과 영성 생명단계 정의에 대하여 봤는데너무 일찍 긑나는 거 같아서 5분만 더 하겠습니다. 이기는 생명.
여러분 우리는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본능단계가 있었지요?
여기는 아예 하나님이 없지요.
윤리단계부터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을 합니다.
모든 이웃이 나에게 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것이다. 인정하지요? 예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도 부당한 일을 당한 일도 억울한 일을 당한 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거에요.
윤리단계에 있을 때에는 그 이웃이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나를 헐뜯고 그런 자가 파트너의 개념으로 오죠! 나를 깨뜨리기 위한 파트너, 그래서 윤리단계에서 자아파쇄훈련을 열심히 하잖아요. 내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그 파트너가 사용을 받는 거죠! 그죠!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 드러내는 데에, 그래서 그 이웃이 나의 파트너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감사로 받지요.
아~ 저 파트너를 사용하셔서 나를 드러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나가는데...
진리단계로 가면 이 이웃은요 파트너의 개념을 넘어서서 섬기는 대상이에요.
아~~그렇구나! 이제는 내가 저 못된 사람을 하나님이 섬기라고 보내주셨구나~!
섬기는 것 까지 나가는 거에요.
윤리단계에서는 파트너 역할만 해도 감사!
진리단계에 있는 사람은 오히려 그 사람을 이제는 내 안에 있는 것 처리되고 나서 그를 섬기는 대상으로 섬김으로 나아갑니다.
아무리 나를 찔러도 섬기고, 아무리 나를 못되게 굴어도 섬기고, 내가 이제 섬기는 밭을 발견한 거에요.
이게 진리단계에요.
그리고 오늘 생명단계를 다뤘습니다.
대인관계에서 나에게서 예수님이 나가는 단계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36절 찾아보고 마칩니다.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창세 이전부터 너희를 위해서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라고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34절에 나와 있지요.
34절“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모든 소자들 잘 입히시고 잘 먹이시고 잘 마시게 하시고 찾아보고 돌아보게 하시고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다가온 모든 이웃들 그들에게 내가 생명의 삶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또 성장한 자들은 주님 내가 평생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 가서도 시비를 따지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서 캐치해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겠습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부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표가 우리가 가야할 골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 주님의 마음을 허락하셔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들로서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주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마음이 알아지길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주여 아버지 하나님 주님 그렇습니다.
다시는 화내지 아니하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이유들에 대하여 주님이 원하시지 아니하므로 아버지 우리가 더 넓혀갈 수 있도록 생명의 삶을 더 범위를 넓혀갈 수 있도록 주님 축복하시고 주여 정말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귀한 우리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주님의 마음을 더 넣어주시옵소서
우리 힘으로 안되는 그것을 주님의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아주 큰 것입니다.
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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