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목사님 바른영성훈련

195. 바른영성훈련 - 대인과 영성 IV. 관조하는 삶 - 서사라 목사님

하늘이슬 2024. 8. 7. 16:06

195. 바른영성훈련 - 대인과 영성 IV. 관조하는 삶 - 서사라 목사님


두 번째 시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먼저 본문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 좀 나누고 가야 될 것 같아서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다가 안 받잖아요. 그러면 어떤 현상으로 돌아가냐면은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서 육신대로 살게 되더라고요. 돼 있다는 게 아니라 살게 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육신으로 산 삶과 그렇죠.

육신으로 산 삶, 이게 시간적으로 몇 시간이 될지 그다음에 영으로 산 삶이 이제 하나님 앞에 계산이 되어지죠. 육신으로 산 삶은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시간으로 기록됩니다. 잃어버린 시간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산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육신을 위해서 살고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행하면 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으로 기록이 된다는 거죠. 저기 저 하늘나라에서. 근데 하나님 앞에 산 시간 하나님 앞에 산 시간, 산 시간입니다. 기록되는 건 뭐냐면 영을 쫓아서 산 시간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 시간으로 기록이 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잃어버린 시간이 이제 이것을 간단히 개념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했으니까, 이삭이란 이름은 마지막에 주셨지만 그러나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그랬기 때문에, 이 이삭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을 했는데 아브라함은 첩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잖아요. 이스마엘을 낳았다. 이게 86세 때 낳았거든요. 근데 99세 때까지 99세 때 가서 하나님 나타나셔서 네가 다음 해에 이삭을 낳을 것이다. 사라를 통해서. 근데 이삭을 통해서 낳은 약속의 말씀을 쫓아서 낳은 이삭은 이게 영영이죠. 그죠. 비유를 하면 이것은 육신이고 육신을 따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신을 따라서 행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육신을 따라 행한 거죠. 그다음에 이삭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낳았기 때문에 영이죠. 이쪽은 영이라면 이쪽은 육신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인생이 성경에 보면요 기록이 돼 있잖아요. 그죠 아브라함의 인생이 기록이 되어있는데, 86세 때부터 99세 때 그러니까 이스마엘을 낳았더라 하는 말만 있고, 99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할 때까지 이 시간이 기록이 없어요. 왜 기록이 없느냐? 하나님 앞에 살지 않아 하나님 앞에 산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신적으로 이스마엘을 낳아서 육신적으로 산 거예요. 내 아들 좋다. 내 아들 좋다.

하나님 말씀은 잊어버리고, 육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예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산 삶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성경의 기록이 없어요. 하나님 그걸 시간을 쳐주지를 않는 거예요. 13년이라는 세월에 대하여 여기는 기록이 없습니다. 잘 한번 보십시오. 그다음에 이삭이 태어나면서부터 젖 떼고 뭐 잔치하고 또 이스마엘이 이삭을 이렇게 무시하고 조롱하고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지금 99세 때 애 낳는 거, 이삭을 낳는 것부터 자세하게 또 기록이 되어 있죠. 이걸 보면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게 무엇인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산 시간은 영으로 영을 쫓아 산 시간으로 하나님 앞에 산 시간으로 기록이 되는데, 내 감정과 내 생각과 내 육신대로 쫓아서 사는 삶은 없더라는 거에요. 기록이 아예 없어요. 이게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사망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우리가 이 영성훈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되도록이면 우리는 영을 쫓아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 우린 여기 앉아 있거든요. 영에 속한 자로. 우리 체질이 바꿔져서 내가 24시간 살아지는 그 삶이 영을 쫓아서 사는 삶이 되게 하기 위해 지금 여러분이 여기 와서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얼마만큼 많이 내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살아있는 시간을 가져었지만 나중에 계산할 때 회개할 때 나는 얼마만큼 하나님 앞에 진짜 살아있는 시간을 가졌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에 기록이 된다는 거예요. 그 여러분 육신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삶인지 알아야 돼요. 그 영성훈련을 받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 다 육신으로 돌아갑니다. 왜냐? 345년을 받아도 아직도 가야 되는데, 그렇잖아요. 받다가 안 받는 사람은 당연히 육신으로 또 돌아가죠 여러분 이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자꾸 들어서 내 삶에 배어 들어야 돼요. 배어든다.

그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이 땅에 촉촉이 이렇게 처음에는 한 1방울 2방울 떨어지지만 그게 계속 떨어져 보십시오. 나중에 이 흙이 촉촉하게 돼요. 그렇게 되어져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영으로 살기 위해서 여기 와서 앉아있는 줄로 믿습니다. 은사 쫓아다니는 사람들 영으로 살까? 육신으로 살까요? 24시간 그게 와요? 안 와요? 오죠. 제대로 알고 하는 얘기인지 모르고 하는 얘긴지 알 수가 있나? 그치 그렇다면 이제 제대로 알고 하는 얘기죠. 그죠. 은사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육신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무슨 얘긴지 알죠? 이 사는 삶이 24시간 이제 육신으로 가는 거야. ? 은사가 최고니까. 하나님 하신 말씀을 다 놓치게 돼 있어요. 살면서 하는 말씀, 그리고 문제와 사건 속에서 보는 눈들이 닫히게 돼 있어요. 왜 은사가 최고거든. 그래요? 안 그래요? 눈이 지금 다른 데로 돌아가고 다른 데 초점이 가는데, 정말 귀한 거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제가 왜 얘기를 하냐? 영성훈련 받다가 떨어져 나가지 마라. 할렐루야. 그 얘기하려고 지금 하는 거예요. 아멘.

그래서 여러분 지금 영성훈련에 지금 와서 앉아있다는 사실이 너무 귀한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을 나중에 회계할 때 영으로 산 시간 내놔 봐라. 하나님 다 기록하고 계신다니깐요. 제가 왜 우리 전도사님을 갖다 귀하게 보냈는지 아십니까? 다 알아들어요. 그리고 촉촉히 들어가요. 나중에 아빠보다도 더 잘 될 거야. 아멘 할렐루야. 아니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 거기 가서 또 전하지 마십시오. 그냥 소망을 가지자고 한 얘기는 진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12장 다시 한번 봅니다. 사도행전 121절부터 5절까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때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헤아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세 때는 무교절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네씩인 네 패에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였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다음 계속 읽어보십시오. 6절 제가 읽겠습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가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누워 자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얘기하고 한번 더 얘기하고 싶어서 제가 읽자고 했습니다. 그는 누워 자고 있더라.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2630절입니다.

30절부터 다시작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하니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곳에 이르러 제자들이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여기까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베드로가 아주 확실하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33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죠. 그죠.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니까 또 주님이 뭐라 그러냐면 야 내가 너한테 진실로 얘기를 하는데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닭은 새벽에 울죠. 그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근데 35절 베드로가 뭐라 다같이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하니라 아멘. 여러분 이 구절을 왜 읽었냐 하면은 베드로는 자기를 신뢰할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절대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나는 그런 자가 아니야. 나는 그런 자가 아니야.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죽는 데까지 내가 주를 따라가겠냐 주를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거죠. 그죠. 자기를 신뢰할 때는 베드론 어떻겠습니까? 그렇죠. 실패했어요. 실패했다. 정말 이게 여러분에게 박혀져야 돼요. 박혀지길 원합니다. 자기를 신뢰할 때는 우리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이니까. 우리 인간들이 그런 종류예요.

근데 베드로가 자기를 이렇게 신뢰할 때는 실패했는데 그가 자기의 신뢰를 내려놓고,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할 때는 어떻게 됐습니까? 승리했죠. 죽음마저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신뢰했을 때는 그는 승리했다는 것이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한다고요? 하나님이 하시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는데 우리는 착각하기를 누가 한다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죠. 내가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다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한다구요? 실패한다는 거예요. 주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죠.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시는 거라는 거에요. 여러분 모세보고 '너 가라. 이제' 이제 됐다. '너 가라' 하나님 마음은 됐단데 그 얘기 안하고 모세한테 나타나서 야 내가 너를 통해서 애굽 사람들을 끌어낼 테니까 네가 가라 그랬더니, 모세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누구한테 갑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제발 보내라 그러잖아요. 그럼 이 모세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한다고 생각한 거죠. 결국은. 자기가 한다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 뭐라 그래요?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할 수 없는 너를 통해서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이 개념이 바꿔져야 돼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너를 통해서 내가 하는 거지 내가, 네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오히려 하나님이 안 쓴다는 겁니다. 왜냐? 일은 내가 할 건데 이 조그마한 게 아무것도 능력도 없는 저것들이 한다. 그러니까 그럼 해 봐, 오히려 하나님은 누구를 쓴다는 겁니까? 할 수 없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전혀 전혀 할 수 없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하겠다는 건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한다라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일을 하신 걸 보면 온 천지 세상을 다 창조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은 나무 잎사귀 하나 만들 수도 없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에 모든 걸 다 만들어 놓으셨잖아요. 그만큼 능력이 강한데 우리 인간은 나무 잎사귀도 하나 만들어낼 수 없는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그럼 하나님 뭐라 그럴까? 뭐라 그럴 것 같아요?

한마디씩 한번 해 봅시다. 뭐라고 그럴 거 같애? 내 주인은 나다, 이 가소로운 것, 이렇게 얘기할 거 같애. 저는 세상적인 말을 이렇게 잘 표현합니다. '이 가소로운 것' 여러분 있잖아요. 우리가 하는 짓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힘을 의지해서 내가 자기를 신뢰하는 자, 이렇게 베드로가 자기를 신뢰할 때는 그냥 넘어져 버렸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누구를 통해서?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자를 통해서. 근데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려고 설치면 하나님은 일은 안 하신다. 하나님이 일을 못하시죠.

그렇지만 내가 비켜나고 '하나님이 하시옵소서'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무슨 능력이 좀 나타나고 은사가 좀 나타나고 나한테 달란트가 좀 있고 내가 재능이 있고 그걸 가지고 내가 주의 일을 하겠다고 덤벼들면 예를 들어서 난 그거 갖고 하겠다. 그거하고 그럼 자기가 하는 거지. 그거하고 아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시옵소서 할 때 하고 어느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날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게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날까 아니면 우리가 하겠다고 덤비는 게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날까요?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여러분 마태복음 2818절에서 20절 보면 지상 대명령입니다. 가라! 한번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2818절에서 20절 다같이 시작

예수께서 나와 일러 가라ㄱ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해야 되는 건 뭡니까?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에요.
가라, 그러면 가서 제자 삼고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렇게 하라는 가라는 거에요. 제자 삼아라 세례를 주라 그다음에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근데 누가 함께하시겠다는 겁니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내가 그렇잖아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내가 너희와 함께 할 테니까. 가라! 가서 제자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린 단지 뭐하냐? 가는 거예요. 전하는 거예요. 제자 삼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럼 누가 하시겠다는 거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내가 하겠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뭐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그분이 하시는 거니까 우리는 뭐 해주면 되는 거예요. 나는 나를 비우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내 욕심을 비우고 그쵸? 우린 비우는 작업 비워만 드리면 돼. 깨끗해지기만 하면 그분이 깨끗해진 우리를 통해서 쓰시겠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일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 여호수아와 갈렙을 알고 있죠. 그죠. 여호수아와 갈렙을 알고 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자기자신을 바라봤어요. 그죠 정탐꾼들은 못 들어간다, 우리는, 저기 큰 성이 있고 아낙자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못 들어간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걸 봤어요. 갈렙은 똑같은 걸 보고서 그죠, 우리는 들어가자 누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누가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죽음을 다 바쳐서 생명까지 다 바쳐서 우리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누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아멘입니까?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예 자기를 말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힘이 없는 자다 뭐다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아예 하나님인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그게 진짜 믿음이 되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믿음이 언제 나타나냐? 이런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그들의 믿음이 시험이 되더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네가 정말 나를 믿느냐? 네가 정말 나를 믿느냐? 죽을 것 같은 그 상황 앞에서 거기에 통과되어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요한복음 21장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17절에서 19절 한번 가보도록 합니다.

다같이 시작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너에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이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러분 이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죠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그렇게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했던 그가, 자기를 믿었던 그가, 정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주를 부인했고, 그러고 나서 주님이 주님과 얼굴이 딱 부딪쳤죠. 그렇죠. 부딪치고 나서는 그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나가서 통곡하고 울었다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정말 나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주님이 부활하고 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님은 알고 있죠. 그간 베드로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근데 물어요.

'니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사랑하느냐' 했더니, 베드로가 얘기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근데 그 말 속에는 옛날에 자기를 신뢰했던 그런 강한 그런 어조가 아니었 없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실패해 봤거든요. 그리고 또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랬더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 묻습니다. 정말 니가 나를 다른 사람보다 이 사람들보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근데 오늘 세 번째 보니까 이제 근심하는 거죠. 세 번째 물으니까. 근심하면서 가로되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주님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마음까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 얘기거든요.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지금 이 상태에는 베드로가 이제는 자기 신뢰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주님 주님이 제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 얘기거든요. 만일에 자기 신뢰가 무너지지 않았었다라고 하면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이고 주님 제가 두 번이나 사랑한다고 그랬는데 또 묻습니까?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를 했겠죠. 그죠. 이게 말 표현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를 신뢰하는 자였다면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는 자기 신뢰가 무너져 내려버렸어요.

주님 저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렇게 얘기하고 있죠.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신뢰가 무너진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근데 또 하나 우리 봐야 될 것은 베드로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기 신뢰가 무너졌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무너졌습니까? 실패를 통해서 여러분 실패하는 것을 어느 분이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실패,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실패로 통한 걸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얻는 거 하나님을 얻었다면 우리는 그 실패 자체보다도 하나님을 얻은 것, 하나님을 얻은 그 자체에 대하여 더 큰 소득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는 자기를 신뢰했던 자기가 무너지는 걸 보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신뢰가 무너지고 난 후에야 그는 정말 왕으로서 다스리는 자로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까지 다스릴 수 있는 환경도 다스리고 죄도 다스리고 사단도 다스리고, 다스리는 자로 살 수 있었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그런 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늘 성경은 정말 진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너 자신을 부인하라, 부인하라 라고 얘기했잖아요. 근데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언가가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거는 부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인정하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제가 왜 은사나 뭐 예언하는데 쫓아다니지 말라 그러냐면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 다 반대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을 비우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더러운 것으로 더 채우고 있는 거예요. 그런 방향으로 여러분이 완전히 비워져서 하나님으로만 채워지게 되는 그때는 괜찮아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은 할 수 없다라고 얘기하는 자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다음에는요. 관조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조, 관조라고 하는 것은 관조를 얘기하기 전에 베드로가 옥문 안에서 감옥 안에서 잘 수 있었다.
잘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는 영원을 바라보는 자였기 때문에 잘 수 있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영생을 삽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삶이죠. 끝이 없는 삶을 우린 영생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이 영원을 사는 삶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인데, 뒤를 한번 이렇게 돌아보자 이겁니다. 영원의 속에서 이렇게 바라보면 내가 사는 삶은 여기 찰나라는 것이지요. 내가 이 땅 위에서 지금 이 순간, 123년 이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찰나. 그럼 이 찰나의 불과한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아둥바둥하고 싸우고 다투고 니가 어떠니 저러고저떠니 하는 게 내가 영생을 사는 존재라면 여기서부터 여기를 가만히 보니까 ', 쓰잘데없는 짓을 내가 그렇게 했구나' 그렇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영원을 사는 존재라고 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영원 속에서 한번 이렇게 바라본다고 한다면,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지금 내 삶이 아주 부질없는 짓을 혹시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관조입니다. 관조라고 하는 것은 영원을 사는 존재가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지요. 여러분 어떤 분은 관조를 어떻게 표현했냐면요 관조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 지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했어요.

근데 이 지나가는 걸 표현을 또 어떻게 했냐면 우리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 다음에 생각을 해봐요. 내가 목적지로 지금 가고 있다. 여행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 가서 세미나를 해야 되고, 뭐 어디 가서 가족을 만나야 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가고 있다고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럴 때 멍하게 나는 목적지 갈 거 생각하면서 멍하게 차창 밖을 내다보면 뭐가 지나가고 있습니까? 산도 지나가고 나무도 보이고 집도 지나가고 그냥 쫙 지나가잖아요. 그 지나가는 것처럼 내 인생의 일을 지금 일어나는 내 인생의 일을 그렇게 차창 밖을 통해서 지나가는 것처럼 보는 것이 관조입니다.

상관하지 않는 거, 여러분이 차창 밖을 이렇게 본다고 해서 내가 거기 가서 살 겁니까? 거기 가서 그 사람들하고 얘기할 겁니까?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지나가는 거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런 것들을 관조, 관조 할 수 있어야 돼. 하나하나 파고 들어 갖고 내가 간섭해야 되고 이런 일이 아니에요. 관조하라! 여러분 이 관조하는 게 참 중요합니다. 왜냐면, 나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가야 하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관조하라! 관조. 지나가는 것이지는요. 그럼 여러분 이거를 우리 삶에 한번 적용을 한번 해보자고요. 제가 어떤 목적을 갖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야 되는 목적지가 저기예요. 근데 옆에서 자꾸 이렇게 태클을 걸어요. 태클, 태클이 뭐죠 뭐야? 이렇게 발을 거는 거야. 그리고 찝쩍거리고 옆에서. 그렇잖아요. 그럼 누가 찝쩍거린다고 해서 내가 지금 목적지로 가야 되는데, 거기서 가서 또 한참 이렇게 헤매다가 이렇게 돌아와야 되겠어요? 이것 놔라, 그러고 빨리 가야 되겠어요? 그게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옆에서 이렇게 찝쩍거리는 건 뭐냐? 잘 보셔요.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육신으로 옵니다. 잘 보셔요. 우리는 영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 근처에 있는 사람들 다 육신적이에요. 세상 걸 원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아예 그들은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근데 육신적인 사람에게 내가 말려들면 뭐 금방 뭐라 그랬어요? 말려든다는 얘기를 했어요.

내가 가야 되는 목적지가 있는데, 관조하지를 못하고 그 사람이 거는 태클에 내가 말려드는 거야. 그러면 어떡하겠어요? 말려들면 말려든다는 표현이 빠진다는 얘기죠. 그러면 다시 목적지로 갈려고 이렇게 틀 때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그죠. 말려 들어야 되겠어요? 말려들지 말아야 되겠어요? 말려들지 말아야 돼요. 이게 관조입니다. 지나가는 것. 그래라 찻장에 바깥에 보이는 것 갖고 내가 기차문을 열고 뛰어 나가서 뭐 이러니 저러니 합니까? 안 하잖아요. 그냥 앉아서 지나가는 걸로 보는 거예요. 이게 관조라는 것이죠. 내 인생을 살았는데 그 사람이 와서 와서 찝쩍거리고 육신적으로 치받고 하는데 나도 그럼 그 말려들었고 육신적으로 치받고,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지 말라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나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내가 할 도리만 하면 되는 거야. 나는 영으로 그렇잖아요.

그 육신으로 오는 사람들을 육신으로 치받고 하는 건 내가 말려드는 거예요. 말려 드는 거, 그걸 지나가는 걸로 보라는 거예요. 지나가는 걸로. 아멘입니까? 그러면서 내가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이게 관조하는 겁니다. 영원을 사는 자들은, 목적지가 있는 자들은 이렇게 관조할 수가 있어야 돼요. 일일이 옆에서 태클 걸고 그다음에 육신으로 치받고 하는데 같이 그냥 말려들어서 육신으로 치받고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육신으로 치받는 거 내버려 둬요. 우리가 그 사람들 바꿀 수 없어요.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내버려 둬요. 지나가, 지나가라 우리는 그 사람들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문제, 그래서 여러분 영원 속에서 이제 우리 삶을 갖다가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돼요. 그러면 영원 속에서 우리가 지금 일어난 일들을 보면 금방 지나가는 일로 삼되, 지나가는 것으로 삼되 우리가 말려들지 말아야 되니까. 지나가는 걸로 삼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 영원 속에서 바라보면 나는 섬김을 받는 자가 복 됩니까? 섬기는 자가 복 됩니까? 그렇죠. 섬기는 자가 돼야 됩니다. 무슨 얘기하는지 아세요? 그들이 육신으로 와서 우리를 찝쩍거리고 우리를 말려들게 하려고 막 그런 어떤 사탄의 움직임들 많이 있어요.

우리 가는 길을 제대로 못 가게끔. 그런 자들을 우리는 또 그들을 지나간다는 말이 버린다 이런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될 도리는 뭐냐면 섬기는 자가 되면서 할렐루야. 관조하라는 거예요. 저는 지금 답을 다 드렸어요. 여러분의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관조하시면서 어떻게 하라구요? 섬기라는 거 우리가 우리가 영원을 산다고 생각하면 영원을 사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그런 일들이 조그맣게 보이는 거예요. 조그맣게.

우리 로마서 8장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24절에서 25절 다같이 시작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오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뭐냐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냐면 누가 보는 것을 바라리요? 그랬어요.

근데 여러분 사도바울은 누가? 그랬거든요. 근데 우리 모두가 다 보이는 걸 바라보고 따라가고 있잖아요. 이게 참 도전이 돼야 돼요. 누가 보는 것을 바라리오? 우리가 보이는 것 갖고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면서 다투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를 지금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는 것을 바라리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보이는 거 따라가고 있습니까? 안 보이는 거 따라가고 있습니까? 진짜요? 그럼 안 보이는 거 따라가면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네 다시 한번 25절 다같이 시작.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어떻게 하라고요?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진짜 보이지 않는 걸 따라가고 있다면 지금에 있는 상황들을 참으라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지나가는 것으로 참고 인내하라는 거예요. 그게 금방이라는 거야. 금방 영원에서 바라보면 그게 찰나라는 거예요. 찰나, 그 찰나를 못 견뎌갖고 말이에요. 영원 속에서 상 받지 못하고 영원 속에서 멸망하고 그래야 되겠습니까? 영원 속에서 보면 지금은 찰나인데, 지나가는 것인데 그걸 못 붙들어갖고 말이에요. 다 지나가는 거를 그걸 막 그걸 못 잡아 가지고,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그러는데 여러분 우리가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은 그건 설물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는 걸 우리는 보화화라고 생각하고 혹시 살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봐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높아진 그 모든 것을 파하라 그랬어요. 근데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사도바울은 배설물이다 라고 얘기하는 그것을 우리는 그 배설물을 좋다고 손에 잡고 말이에요.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나중에 보면 정말 헛되고 헛된 것을 잡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여러분 영원 속에서 바라보면 섬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아니면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 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영원 속에서 지금을 바라보면서 용서할 자 용서하고, 관용할 자 관용하고, 더 주고 할렐루야. 그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나눠준 하얀 종이들 제가 2장씩 나눠줬어요. 거기다가 여러분이 지금 맡기지 못하는 것들 첫째, 가장 나를 바드 하는 거, 그거를 관조 관조를 적용해서 관조하는 훈련을 좀 해봐야 되겠어요. 그니까는 종이 2개를 줬으니까 첫째는 1번 그다음에 두 번째 종이는 2번을 쓰는데 나에게 이이제 바드가 되고 문제가 되고 해결이 안되는 그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12번으로 해서 한번 적어보세요.

이런 문제가 있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 관조를 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쓰고. 내가 영원 속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걸 나는 지금 나의 마음이 어떤지 관조하셔 가지고 영원 속에서 내가 뒤로 바라보고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느낌을 받는지 그러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걸 갖고 내가 아둥바둥했던 거 회개하셔야죠.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가 아둥바둥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걸 관조하면서, 지나가는 사건으로 보면서 제가 그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종이 2장을 나눠줬잖아요. 한 종이 하나에다가 첫 번째 그다음에 두 번째까지 한번 적어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10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꼭 발표하고 싶으신 분만 나와서 발표하시고, 나는 좀 숨기고 싶다 그러면 숨기시고, 다음에 하나님과의 문제 속에서 해결한 다음에 간증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